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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세상 시름없는 곳에서의 풍경사진

‘어부가’, 조선 시대 세 선비가 함께 부르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5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갈수록 시름이 많은 세상이다. 해가 바뀌면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퇴출될 듯하다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이번엔 북에 사는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핵문제는 팽개치고 교류 안한다고 남에 짜증을 낸다, 세상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묶이고 왕래를 안 하니 돈이 돌지 않아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말라버린 돈을 돌리려 해도 제도에 가로막혀 끙끙대고 있다. 이런 세상에 시름을 잊고 좀 마음 편히 사는 방법은 없는가?​

 

이 가운데 시름없는 것은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창파에 띄워놓고

인간세상 다 잊었으니 날 가는 줄 알겠는가

 

1549년 6월 유두(流頭) 사흘 뒤에 귀밑털에 서리가 내린 노인은 낙동강의 지류인 분강(汾江)의 고깃배 뱃전에서 어부가 보는 세상을 노래하는 시조를 선보인다. 이 시조를 만든 이는 당시 83세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서른둘에 벼슬길에 올라 중앙과 지방의 온갖 요직을 거치며 유능한 관리로서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았지만, 중앙 정계의 소용돌이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오려는 소망은 일흔넷이 되어서야, 그것도 겨우 병을 핑계로 허락될 수 있었다.

 

그만큼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기에 내려올 당시 조선조 5백 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임금이 참석하는 은퇴식을 받았고 배 타러 한강으로 가는 길에는 장안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전송했다는 전설의 정치인이자 문인, 농암은 내려와서 분강(汾江)에 배를 띄우고 산천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신의 심사를 어부에 빗댄 9편의 장가와 5편의 단가 등 14편의 <어부가>에 담았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것이지만 이를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옛날의 시조는 노래로 불렀다. 농암은 배 위에서 틈틈이 시조를 가다듬어 노래로도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가 여름이 지난 늦가을에 농암이 사는 분천에 귀한 손님 두 사람이 찾아왔다. 바로 청홍도(충청도) 감사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풍기 군수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었다. 온계는 퇴계보다 다섯 살이 많은 형이다.

 

54살의 온계는 그해 청홍도 감사를 제수받고는 9월에 휴가를 내어 고향에 와서 선조의 사당에 분향 고유를 했으며, 49살의 동생은 그 전에 단양군수로 있다가 형님과 같은 도에 근무할 수 없다며 임지를 바꿔 달라고 해서 풍기군수로 임지를 바꿔 부임했기에 이때 형님을 맞아 같이 고유를 하고 오랜만의 해후를 즐겼다. 온계는 다음 달인 10월에 임지로 돌아갔는데 그 전에 두 형제가 함께 농암을 찾은 것이다.​

 

농암은 52살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으면서 평생의 지음(知音)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났다. 34년 후배지만 뜻이 맞고 추구하는 것이 통해서 늘 자주 만나고 아꼈다. 농암의 집은 퇴계가 터를 잡은 도산(陶山)에서 그리 멀지 않아, 강변길로 걸어서 두 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데, 농암의 집 앞을 흐르는 분강(汾江)에서 농암과 퇴계는 가끔 배를 띄우고 술잔을 물에 흘려보내면서 음풍농월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1549년 가을 안동이 낳은 세 인물은 분강 위에서 배를 같이 탔다. 이날의 모임은 좀 특별했다. 이날의 동향을 알게 해준 것은 농암과 온계가 쓴 시이다. 먼저 농암의 시는 「경명(景明, 온계 이해의 자 字)과 경호(景浩, 퇴계 이황의 字)가 함께 병암에서 유람하다가 저물녘에 부내[汾川]에서 배를 탔다. 경호의 운자(韻字)에 차운했다」는 시이다.​

 

江頭橫小艇  강어귀에 작은 배 놓여 있으니

歌鼓雜陳時  장단 맞춰 실컷 노래할 때로세

赤壁蘇仙句  소동파의 적벽가 구절이요

潯陽白傅詞  심양 땅의 백거이 가사일세 ​

 

秋山新帶瘦  가을이라 산엔 잎새들 지고

落日遠含姿  지는 해 그 자태 한껏 뽐내네

爛熳舟中興  흐드러진 배 안의 즐거움이여

看他舞袖僛​  그대들 춤사위 구경할 때로세.

 

시의 말미에는 “경명(온계 이해)은 청홍도(충청도) 감사로 있고, 경호(퇴계 이황)는 기천(基川, 풍기의 옛 이름)의 군수로 있으면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분향고유(조상의 사당에 향을 피고 고하는 일)한 뒤 이어서 농암으로 나를 찾아왔다”라는 설명이 붙어있어 이날 모임의 성격을 잘 알려준다.

 

 

이에 농암의 후배이자 퇴계의 친형인 온계 이해도 시를 남긴다.​

 

凜冷初冬日  싸늘한 초겨울 어느 날이요

江村欲暮時  강마을의 해질 무렵이로세

喚船方載酒  배를 불러 그 안에 술 실었고

按譜更調詞​  악보 보며 노랫가락 맞췄지

 

疏散臞仙貌  세상을 초웧한 신선의 모습이요

淸修老鶴姿  고결한 모습은 늙은 학의 자태로세

德將猶自醉  덕이 있어 오히려 그에 취해서

不覺累僛僛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네.

 

그동안 위의 두 시는 농암과 온계의 문집에 각각 실려 있었는데, 같은 날 행사를 묘사한 이 시 두 편만으로는 그저 세 분이 한 날 잘 모여 놀았다는 정도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고문헌연구가인 서수용 씨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퇴계의 친필 한시를 1수 발견해 공개했다. 농암과 온계 두 분 시의 원운이었던 것이다.

 

山寺烹茶後  산사에서 차를 마시고 나온 뒤요

江船喚酒時  다시 배를 타고 술을 부를 때로세

綠波攝綺席  푸른 물결 비단 자리에 넘실대고

紅袖唱漁詞  어여쁜 기생들 어부가를 불러대네 ​

 

福地非人世  명산 복지라 인간 세상 아니요

仙風異俗姿  신선 풍도는 속세 모습 아닐세

吾儕亦何幸  우리들 또한 무슨 요행을 만나서

醉德舞僛僛  덕에 취해 덩실 춤출 수 있었나.

 

대개 따로 발견된 시들은 제목이 누락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시는 세 분이 먼저 산사에 가서 차를 마신 뒤에 강으로 내려와 배를 탔고, 배에 동승한 기생들이 어부가를 불렀다는 점이다. 어부가를 부른 것은 이 시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어부가는 6월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시를 통해 농암이 온계와 퇴계를 불러 어부가를 초연한 것이 된다.

 

 

술이 오르고 노래가 나오면서 이날의 모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유쾌한 자리였음을 세 사람이 남긴 시를 통해 알려준다, 퇴계가 “우리들 또한 무슨 요행을 만나서, 덕에 취해 덩실 춤출 수 있었나”라 한 데서 보듯, 세 분은 세상 걱정을 잠시 잊고 처음 공연한 어부가를 보고 들으며 모처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선비 학자 정치가 중에서 귀향해서 낙을 누린 사람으로는 농암만 한 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자리의 다른 두 주인공은 그렇게까지는 되지 못했다. 퇴계의 형인 온계는 1549년 당시 충청감사였는데 이듬해 서울시 부시장으로 올라갔다가 정권을 잡고 있던 이기(李芑) 일당의 집요한 모함에 따른 고문으로 8월에 운명해야 했다.

 

퇴계는 그 전 해에 둘째아들 채를 잃고 1549년 그해 여름에 둘째아들의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형편이 너무 어려워 포기한 상태였다. 또 본인도 풍기 임소를 이탈한 데 대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진행되거나 기다리던 가운데 그해 늦가을에 마음속으로 가장 의지하던 넷째 형님과 또 존경하는 고향선배인 농암과 함께 선상음악회에서 술을 나누고 노래를 함께 듣고 춤까지 추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조선 시대 고단한 벼슬살이, 복잡하고 힘든 가정사 등 험난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시간을 가진 한 장의 풍경사진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이런 즐거움도 없었다면 우리 선조들의 삶은 정말 너무나 차갑고 황량했을 것이다.

 

이제 양력으로 6월, 농암이 어부가를 고쳐 부른 때는 음력 6월이지만 무더위가 시작되었으니 양음력 차이는 별문제가 아니다. 세 분의 뱃놀이는 가을에 이뤄졌으므로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러나 세상 이리 근심 걱정이 많을 때 그저 그런 온갖 시름을 잊고 잠시 즐겁게 놀았던 세 분의 사진이 담긴 풍경화를 미리 한 장 꺼내어 보는 것도 시름을 참시라도 잊어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