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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이회영과 여섯 형제, 모든 것 버려 자부심을 지키다

《이회영 –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 김은식 지음, 봄나무 사람책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1월 17일. 대련 수상경찰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는 짧았다. 그가 살다 간 태산 같은 인생에 견주면 허무한 결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간다지만, 30년이 넘는 숱한 시련에도 건재했던 아버지였기에 아들 이규창의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는 곧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가 대련으로 간다는 정보가 어떻게 일본 경찰에게 들어갔는지 모든 연결망을 동원해 샅샅이 알아보았다.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이 누구인지 찾게 될 때는,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김은식이 쓴 이 책, 《이회영-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는 1910년, 망국의 파도가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그해, 일제의 치하에서 단 한 해도 살 수 없다며 1910년 12월 30일 재산을 처분해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일가의 이야기다.

 

 

나라가 망했을 때 조상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으며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권문세족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책에 소개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자결, 사설 게재, 무장투쟁을 하는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대다수 양반은 일제가 던져주는 달콤한 혜택에 취해 거리낌 없이 나라를 ‘갈아탔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국권 피탈을 당한 1910년 8월 29일, ‘조선 귀족령’이라는 것을 함께 발표했다. 국권 피탈에 공을 세운 조선의 귀족들에게 일본의 귀족 작위를 하사하고 상금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법령을 통해 76명에 달하는 조선 지배층 인사들에게 후작, 남작, 자작, 백작과 같은 귀족 작위가 내려졌고 엄청난 액수의 은사금이 뿌려졌다.

 

그 가운데도 가장 많은 금액을 받은 이완용은 오늘날의 값어치로 약 230억 원에 달하는 15만 원을 받아 챙겼다. 그리고 놀랍게도, 귀족 명단에 포함된 76명의 인사 가운데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 이는 단 8명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늦게라도 반납했거나 몰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까닭으로 압수당한 이들까지 포함해도 13명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 귀족령이 발표된 다음 날인 8월 30일에는 모두 1천 700여만 원에 달하는 ‘임시 은사금’이 전국의 양반들과 유생들에게 던져졌고, 대부분은 돈벼락에 취해 망설임 없이 일본의 신하가 되었다는 점이다. 차마 역사책에 올리기 부끄러운,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수치스러운 단면이다.

 

(p.97)

그렇게 수백 년 동안이나 민중들을 억누르며 버텨 왔던 조선의 지배 세력은 간단히 친일파로 변신했다. 그동안 양반들의 차별과 수탈에 신음하던 수많은 백성은 또다시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한 수탈 앞에 그대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회영 일가는 달랐다.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는 자부심이 있었다. 숱한 전쟁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조선왕조와 운명을 같이해 온 공신 가문의 자손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도 느꼈다. 나라의 녹을 대대로 먹으며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여섯 형제의 뜻이 한꺼번에 맞기도 어렵거니와, 그 많은 재산을 비밀리에 처분하고 급히 떠나기란 더욱더 쉽지 않은 일이건만, 의기투합한 그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도 가산을 신속히 정리했다. 한시라도 일제가 빼앗은 땅에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책임을 통감해야 할 양반들이 일제가 내린 재물과 작위에 취해 있는 모습은 더욱더 보기 싫었다.

 

(p.100)

이회영은 이제 한시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하루도 나라를 강탈해 간 일본의 조선총독부 통치 속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온갖 특권을 누리다가 한순간에 일본이 던져 준 귀족 작위와 재물에 눈이 먼 양반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섞고 싶지 않았다.

 

1910년 12월 30일, 이렇게 오늘날의 값어치로 약 600억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만주로 건너간 여섯 형제는,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것이 무려 35년에 달하는 긴 고생길의 시작일 줄은 말이다. 만주 땅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가져온 재산은 모조리 바닥났다.

 

이회영 일가의 재산으로 10년 동안 길러낸 3,500명의 독립전사,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 독립운동 역사는 훨씬 더 초라하고 볼품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제목처럼, 1910년 만주로 떠나던 그때부터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는’ 10년을 보냈고, 1920~30년대는 더 이상 버릴 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채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중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p.191)

먼저 1925년에는 셋째 형 이철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31년에는 막내 이호영과 그의 일가족이 북경 근처에서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정확히 누구에게, 어떻게, 왜 죽임을 당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 밖에도 여섯 형제 중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넌 둘째 형 이석영은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장남 규준을 잃고 상해 변두리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이미 칠순을 넘겼다. 그런가 하면 맏형 이건영은 조상들 제사를 모시기 위해 먼저 서울로 돌아갔지만, 그의 두 아들인 규면과 규훈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군에 투신했고 그중 규면은 상해에서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더라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굶어 죽는 일은 없었을, 아니 심지어 가진 재산만으로도 호화롭게 살았을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이회영이 가는 곳을 밀고한 사람이 바로 둘째 형 이석영의 아들, 이규서였다는 것이다.

 

이규서는 모든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남은 형제들이 서울로 돌아가서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일제의 말에 넘어간 게 잘못이었다고 애걸했지만,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대가 끊긴 채 홀로 남을 큰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결국 아버지를 죽인 이규서를 처단하고 만다.

 

그 누구보다 끈끈하던 이회영 일가에도 이런 일이 닥칠 만큼 독립운동은 끝없는 절망과 무기력, 의구심과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광복되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본은 세력이 약화하기는커녕 세계 최강대국을 넘볼 만큼 강성해지고, 식민 지배가 30년이 넘어가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 또한 희미해져 갔다.

 

이런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마지막까지 만주에서 일으킬 거사를 계획했던 이회영의 희망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것은 조상 대대로 일구고 가꿔 온 나라에 대한 마지막 의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희망보다는 의리, 그것이 65살 된 노인 이회영을 만주로 가는 배 밑바닥으로 보냈던 마지막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희생이 있었던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나라가 망했을 때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린 가문도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자부심이 후손들의 자부심까지 지켜낸 것이다. 여섯 형제 가운데 광복 때까지 홀로 살아남아 고국 땅을 밟은 이시영이 흘렸던 눈물에는, 마지막까지 자부심을 지켜낸 가문에 대해 자랑스러움도 담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