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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조선 전기의 대학자 최항(崔恒)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⑬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2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을 살피고 있다.

 

 

최항(崔恒, 태종 9년/1409~성종 5년/1474)

 

최항(崔恒)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로서 세종ㆍ문종ㆍ단종ㆍ세조ㆍ예종ㆍ성종 때 관직에 있으면서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역사와 언어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2004년 10월의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최항은 1409년(태종 9) 삭녕(현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연천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세종 16년(1434)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세종 25년(1443)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인 세종 33년(1450) 집현전부제학이 되었다.

 

최항은 1452년(문종 2)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단종 1년에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역임, 1455년(세조 1) 대사헌ㆍ호조참판ㆍ이조참판ㆍ형조판서ㆍ공조판서를 지낸 뒤 1460(세조 6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7년(세조 13년) 영의정에 올랐고, 1474년(성종 5) 죽었다.

 

▪ 생애: 집현전의 또 다른 인재

 

젊은 시절에 비범한 뒷이야기를 하나 남겼다. 굉장히 머리가 비상하긴 했는데 학습이 귀찮았는지 일종의 기여 입학을 통해 시험 없이 성균관에 들어갔다. 얼마 뒤 과거 시험에서 편입생은 시험 자격 없음이란 공고가 붙었는데, 이에 세종대왕에게 항의문을 보냈고 결국 시험 응시 자격을 따냈다.

 

그렇게 얻은 시험 자격을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섰는데 이 학사의 당돌함이 시험관들에게도 전해졌는지 한 시험관이 최항에게 "어디서 굴러 처먹던 피랑자(皮狼子. '가죽 불알 자식')가 시험장에서 소란을 부리는 건지"라고 시비를 걸자 최항은 "그쪽 불알은 쇠로 만들었수?"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결국 그 시험에서 장원까지 하고 말았으니. 이렇게 세종 때는 기운이 넘치는 신하들이 많았다. 그리고 훗날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최항은 박팽년ㆍ신숙주ㆍ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를 도왔으며, 운회(韻會)를 한글로 뒤쳤다(번역). <훈민정음해례> 등을 지어 올렸다. 잠시 세자의 교육을 맡기도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도 했다.

 

최항은 《동국정운(東國正韻)》ㆍ《자치강목(自治綱目)》ㆍ《통감훈의(通鑑訓義)》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경국대전(經國大典)》 등 국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책들을 비롯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40여 권을 펴냈다.

 

문종 때는 《세종실록》 편찬과 《고려사》의 열전 부분을 집필하였다. 이런 최항에게 1453년(단종 1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 계유정난과 최항

 

계유정난 당일 밤에 최항은 동부승지직(요즘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급)을 맡아 임금에게 직접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평소 같으면 최항은 단종의 시중 정도만 맡았겠지만, 이날 김종서를 죽인 수양대군이 바로 동부승지 최항에게 온 것이다. 최항의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임금의 접견을 불허하거나 최소한 시간만 끌어줬다면 계유정난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때 최항은 신숙주의 후임이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신숙주의 후임인 최항을 당연히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겠지만, 최항은 스스로 수양대군파로 생각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최항에게 조정 신료들의 명단을 내놓으라고 하자, 최항은 처음에 말을 돌리며 넘기기를 주저했지만, 수양대군의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명부를 넘기고 만다. 그리고 이 명부는 살생부가 되어 바로 반대파들은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 계유정난 이후

 

계유정난 뒤, 최항은 정난공신 1등이 된다. 최항은 바로 수양대군에게 찾아가서 저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빌지만, 수양대군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더 큰 상을 수여한다.

 

세조 즉위 후에는 《경국대전》 등 수많은 법전과 훈민정음으로 된 불경 등을 펴냈다. 이조, 형조, 공조, 예조에서 알게 모르게 이 사람의 손을 거쳐 간 일이 많았으며, 이 사람이 없었다면 조선 초기의 기반은 닦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이한 점은, 문관임에도 세조에 의해 무관직에 임명이 된다. 최항은 바로 세조에게 찾아가서 저는 문관이니 군사관계 일은 제발 시키지 말아 달라고 빌지만, 세조는 잠재력이 있다며 더 높은 직위를 준다. 그래도 일단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하고 문제없이 임기를 채웠으니 세조는 사람 보는 눈만큼은 확실하다고 해야 할 것인지?

 

결국 신숙주의 뒤를 이어, 문관의 으뜸인 영의정까지 지내고 무사히 은퇴한다. 세조가 죽은 뒤에는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탁고 대신이 되며 이후 1474년에 향년 66살을 일기로 사망한다. 성품을 봐도 겸손하고 말이 적었으며 비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재상이다. 특히 혼탁한 시기에 40년 동안 벼슬살이하며 한 번도 탄핵받지 않은 것은 대단한 이다.

 

▪ 비판받는 일

 

그러나 젊었을 때의 호기로움과는 달리 나이가 들어가면서 패기를 잃었다.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인사(人事)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가정 문제에서도 그 우유부단함이 심했는데 집안일은 부인의 주장대로 행해졌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분노한 부인에게 수염을 통째로 뽑혀서 임금과 동료 신하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자식들의 혼사에도, 상대 가문의 재산만을 보고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래서 최항 스스로 "우리 집은 활인원(活人院)이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활인원은 조선시대에 서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 기관인데 말하자면 '이 집안에는 정상인 인간이 한 명도 없구나'라는 식의 한탄을 했다고 한다. (참고 : 나무 위키)

 

최항의 졸기로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보자.

 

 

▪ 최항의 졸기

 

“좌의정 최항(崔恒)이 졸(卒)하였다. 최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최항의 사람됨은 겸손하고 조심성 있고 말이 적은 데다가, 비록 한더위라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무릎을 모으고 꿇어앉아 온종일 게으른 표정이 없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문장(文章)으로는 대우(對偶, 조건 명제의 가정과 결론을 뒤바꾼 뒤 각각 부정을 취하여 얻는 명제)에 능하여 한때의 표문(表文, 임금에게 표로 올리던 글)과 전문(箋文,길 흉사가 있을 때 임금에게 아뢰던 사륙체(四六體)의 글)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까지도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평을 하였으며, 세조ㆍ예종(睿宗)의 《실록(實錄)》과 《무정보감(武定寶鑑)》ㆍ《경국대전(經國大典)》은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그의 호(號)는 태허정(太虛亭)이며, 유집(遺集)이 세상에 전한다. 최항은 어떤 일에 임해서는 과단성 있게 재결(裁決)함이 적었다. 이조와 병조의 우두머리가 되고 윗자리에 있을 때도, 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대로 의위(依違, 가부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함) 할 뿐이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훈구 대신들과 시비를 논란하면서 그의 뜻을 관찰하려고, 최항에게 묻기를,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어떤 법을 제정하려 하고, 남쪽과 북쪽도 정벌(征伐)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 하니 최항은 옳고 그름과 쉽고 어려움도 계산해 보지 않고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성 있게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 번 최항에게 물으니, 다시 대답하는 말도,

 

"옳습니다."라고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는 문형(文衡)을 맡은 자로서 의정(議政,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에 제수(除授)가 되면 반드시 사양하였었는데, 최항은 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그대로 받으면서 사양하지 않으니, 그 당시의 여론이 그러한 점을 비난하였다. 그의 아내는 서씨(徐氏)인데, 성질이 사나웠으며, 가정일은 모두가 서씨가 하자는 대로 했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최항은 딸이 많았는데, 사위를 선택하면서, 부자 사람만 고르고 인품은 논하지 않았으므로 대다수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최항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우리 집은 활인원(活人院)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병신만 모였다는 뜻이었다. 기채(奇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항 친구의 사위인, 이배륜(李培倫)이란 자의 사위였다. 그 기채에겐 딸만 하나 있었다. 그 딸이 정효상(鄭孝常)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부유하게 잘살자 최항은 그 부(富)를 탐하여 근친임도 싫어하지 않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아들 최영호(崔永灝)의 아내를 삼으니, 온 조정에서 비난하였다. 최항의 아들은 최영린(崔永潾)과 최영호인데, 최영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가 되었다. 그런데 성품이 잔악하고 혹독하여 비록 처자식들이라도 형편없이 학대하였다.” (《성종실록》5/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