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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시인발정(施仁發政)’ : 세종의 첫 말씀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 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施仁發政, 方推渙汗之恩。”(《세종실록》 즉위년 8/11, 1418)

 

한문의 시대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세종은 한 나라의 임금이다. 임금은 정치적으로 백성을 다스린다. 중세시대 백성들이 뽑는 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정치를 통해 백성들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에 정치는 백성을 다스리며 희망을 주어야 한다. 세종은 백성을 잘살게 하려고 여러 가지 제도의 개선, 기존 사물의 개선, 새로운 제도, 나아가 창제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힘쓰셨다.

 

이런 세종의 발자취와 그 의미를 하나씩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왜? 하필 한자(漢字)로 이루어진 사자성어(四字成語)를 통해서일까. 세종이 정치를 하는 동안이나 이후 몇백 년은 한자가 우리의 주 의사교환 수단이고 공식 언어였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조선조 4대 임금 세종 때의 일이었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주된 글로 사용된 것은 한글이 아닌 한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대주의적 관점에서는 한문이 진정한 글이었고, 한글은 단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천한 글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개화시대에 개화주의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꾼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국한문혼용체로서 국어(한글)와 한문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함으로써 새 시대에 걸맞은 글을 추구하게 되었다. 1894년에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에서 모든 공문서의 표기를 국한문혼용체로 한다는 조항이 정해지고, 근대문물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었던 신문들 역시 상당수가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세종시대의 사상과 활동은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세종의 정치와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잘 요약된 당시의 ‘사자성어’를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발정(施仁發政)

 

세종 즉위년(1418) 8월 11일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태조께서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시고 부왕 전하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으시어,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이 천자(天子)에게 이르고, 효하고 공경함이 하늘과 땅의 신령에 통하여 나라의 안팎이 다스려 평안하고 나라의 창고가 넉넉하고 가득하며, 해적이 와서 복종하고, 문치(文治)는 융성하고 무위(武威)는 떨치었다. 그물이 들리면 눈이 열리듯이 대체가 바로 서매 자질구레한 조목이 따라 잡히어, 예(禮)가 일어나고 악(樂)이 갖추어져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흡족하게 젖어 들었고, 융성(隆盛)한 공적은 역사책에 넘치어, 나라가 태평함의 극치(極致)를 이룸이 옛적에는 없었나니, 그러한 지 이에 2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근자에 오랜 병환으로 말미암아 청정(聽政)하시기에 가쁘셔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었다.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이에 영락 16년 무술(戊戌) 8월 초 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大妃)로 높이었다. 모든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명을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직위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 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하였다. ” (《세종실록》 즉위년 8/11, 1418)

 

(참고) : 군주민수(君舟民水)

 

 

참고로 고대 정치와 관련한 사자성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이 있다.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바꿀 수 없었던 고대와 중세의 역사에서는 소위 ‘민심’이라는 백성의 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용어가 배와 물에 비유한 ‘군주민수’다. 이 말의 뜻은 ‘군주는 배(舟)고 백성은 물(水)과 같아서 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성난 물의 파도는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라는 뜻이다. 이로 보면 ‘군주민수’가 보다 보편적이고 ‘시인발정‘은 구체적이라 할 수 있다. 곧 이는 국민이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세울 수도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뜻의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나타낸다.

 

‘군주민수’의 출전은 《공자가어(孔子家語)》 <오의해(五儀解)>이다. 이에 따르면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임금인 애공(哀公)에게 “무릇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합니다. 임금께서 이것을 위태롭다고 여기신다면 무엇이 위태로운 것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 《순자(荀子)》 <왕제편(王制篇)>에도 다음과 같이 인용된다. “전하는 말에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가 있는데, 이를 두고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