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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려거든 《아리랑》을 읽어야 한다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번 찍어도> 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박 교수에게 여기 아가씨들은 팁이 얼마냐고 물으니, 8만 원이란다. “아이고, 비싸네. 박 사장님은 나하고는 수준이 다르군요.” 김 교수가 계산서를 들여다보니 안주 한 접시에 3만 원, 노래 값 2만 원, 티시라고 해서 테이블차지(table charge)가 별도로 3만 원 등이 적혀 있었다. 보신탕에 소주 2병을 포식하고 3만 원을 내었는데, 안주 한 접시에 3만 원이라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박 교수가 거들었다.

“김 사장, 팁은 각자 줍시다. 보신탕에다가 술까지 대접받았는데, 팁까지 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소?”

“그러실래요? 좋아요. 미스 장은 박 사장님이 책임지세요.”

 

김 교수는 카드를 꺼내어 웨이터에게 주었다. 그러고 나서 김 교수는 양복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흰 봉투를 하나 꺼내었다.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 봉투를 주면서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스 최, 이 봉투는 팁이 아니고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적지만 성의 표시로 알고 받아라.”

“성의 표시라고요? 그런데 오빠, 봉투를 열어보아도 될까요?”

“마음대로.”

 

미스 최가 봉투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빳빳한 초록색 지폐가 10장 들어 있었다. 김 교수는 묘한 습관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김 교수는 술자리에 가게 되면 그날 오후에 은행에 가서 만 원짜리 새 지폐를 10장 찾아서 봉투에 넣어 준비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줄 때 그냥 주지 않고 봉투에 넣어 주는 것이 예의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다.

 

팁도 마찬가지라고 김 교수는 생각한다. 아무리 술집 아가씨에게 주는 돈이지만 봉투에 넣어 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라고 볼 수 있으며, 이왕 준비하는 돈을 새 돈으로 주면 받는 사람은 기분이 좋을 것이다. 미스 최가 고마운 눈빛으로 김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업소에 나온 후에 팁을 흰 봉투에 넣어서 받기는 처음이었다.

 

 

“뭘 봐? 그런데 2만 원은 쓰면 안 된다.”

“왜요?”

“그건 재료비야. 네가 아까 술 먹으면서 요리를 잘한다고 자랑했잖아. 나중에 매운탕 끓여 놓고 너의 아파트에 우리를 초대할 때 쓸 재료비를 미리 주는 거야. 알았어?”

“알겠어요. 오빠. 한 번 아파트로 초대할게요. 박 사장님도 같이 오세요.”

“네가 부르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지.”

박 교수가 화답했다.

 

이제는 계산도 다 끝나고, 갈 시간이 되었다. 김 교수가 말했다.

“너는 헤어질 때 보니 더욱 예쁘구나. 전화번호 있으면 적어 주라.”

“삐삐 번호 적어드릴까요?”

(필자 주: 당시에는 아직 휴대폰이 나오지 않았다. 삐삐라는 호출기가 유행이었다.)

“삐삐는 싫다. 짝사랑은 싫어. 전화번호를 적어 주라.”

“알았어요, 오빠.”

 

미스 최는 방을 나가더니 메모지에 전화번호와 삐삐 번호를 함께 적어 주었다.

“그런데, 오빠, 언제 또 오실 거에요?”

“왜, 내가 마음에 들었니?”

“그럼요, 오빠. 그러니까 전화번호까지 알려드리지요. 제가 처음 만나서 전화번호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오빠.”

“그래?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전화번호 적어 준 아가씨가 너무 많아 골치가 아프다. 내 수첩에 아가씨 전화번호가 세 쪽은 된다. 시간 좀 내서 꼭 한번 만나자는 아가씨가 한 타스는 될 거야.”

“와, 우리 오빠, 인기 좋네요! 그런데 오빠, 명함 있으면 하나 주세요, 오빠.”

(한번 말하는데 오빠가 세 번이나 들어갔다.)

 

김 교수는 평소 같으면 술집에서 명함을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미스 최가 하도 애교를 떨며 오빠! 오빠! 해대니까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나 보다. 김 교수가 엉겁결에 명함을 꺼내어 주고 말았다. 순간 ‘아차!’ 하는 후회가 스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쏘아놓은 화살이라.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명함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미스 최가 말했다.

 

“어마나, 우리 오빠, 교수님이네! 와, 박사님이네요.”

“야 임마. 조용히 말해라. 요즘에는 흔해 빠진 것이 박사다.”

“오빠, 나 박사님하고 연애 한번 해도 될까?”

“그렇게 쉽지 않을 걸. 나는 비싼 몸이다.”

“그럼 오빠와 연애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오빠.”

“그게 쉽지 않지. 네가 나하고 만나고 싶으면 학교로 전화해도 좋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무언데요?”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집 근처 책방에 가서 조정래가 쓴 《태백산맥》 제1권을 사서 다 읽고 나면 전화해라.”

“아이고, 쉬우네요, 오빠.”

“아니다. 《아리랑》이 일제 때 이야기이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아리랑》이 먼저구나. 《아리랑》이 읽기 편할 거야. 《아리랑》 제1권을 사서 읽고 전화해라. 책을 읽을 생각이면 나하고 약속하자.”

 

김 교수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오빠, 좋아요!”

미스 최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걸고서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전화하지 않는 거야. 알았지?”

김 교수는 다짐받았다.

 

두 사람이 술집을 나온 것은 12시 5분쯤이었다. 아가씨들은 문밖까지 나와 “또 오세요.”라고 애교를 다해 인사를 했다. 남자 종업원이 따라 나오더니 보스 전송하듯 깍듯이 인사를 했다. 김 교수는 “돈이 좋기는 좋구나”라고 다시 한번 실감했다.

 

김 교수는 아가씨와 아쉽게 헤어진 후 박 교수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12시 40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