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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설득하기가 더 쉬워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번 찍어도> 9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박 교수와 점심 내기를 하고 나서 며칠 뒤에 김 교수의 가정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 교수는 고3 아들이 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늦둥이 딸이 하나 있다. 김 교수의 자녀 교육 방침은 자유방임에 가까웠다. 공부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부모가 시킨다고, 과외 선생을 붙여준다고, 안 하는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3 아들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0등 이내의 상위권에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급 석차가 10~20 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도의 실력이었다. 담임선생님 말로는 이러한 성적권의 학생들을 진학 지도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조금만 잘하면 이른바 서울대학(요즘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이면 다 서울대학이라고 부른다)에 보낼 수 있겠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된다.

 

어느 가정이나 사정은 비슷하리라. 교육과 관련한, 남편은 대개 방임형이고 아내는 극성형이다. 대학까지 나온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가 대학에 못 가면 자기가 창피를 당하는 줄로 안다. 자기가 모자라서 자녀가 공부를 못하고 대학에 못 가는 줄로 잘못 아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는 꼭 대학에 보내야만 자기가 대학 가지 못한 한(?)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어머니는, 본인 학력의 고저를 막론하고,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 바쳐 아이들의 점수를 1점이라도 올리고 싶어 한다. 자녀가 공부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점수를 올려준다고 소문난 학원을 찾아내어 아이를 그 학원에 보낸다. 그래도 불안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마련하여 고액 과외를 시킨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어떤 기준으로 따져 보아도 세계 으뜸일 것이다.

 

김 교수네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수능시험을 보려면 100일 정도 남은 어느 날 아내는 심각하게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가 부모로서 고3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참, 무슨 수수께끼 같군.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요?”

“남들처럼 유명하다는 선생님 불러다 과외를 시켜주지도 못했고, 당신 아들 성적이 오르는지 내리는지 관심을 가져 봤어요?”

“과외 하지 않고 그 정도면 잘하는 편이지 뭘 그래. 꼭 서울대학에 가야만 부모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서울대학교 입학정원이 몇 명이요? 고3 학생들을 다 합치면 아마 70만 명쯤 될 것이요. 지난번 모의고사에서 전국에서 상위 15%에 들었으니 그 정도면 잘했지 뭘 그래.”

“정말 당신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니까. 그 점수로는 국립서울대학은 꿈도 꿀 수 없고, 서울에 있는 대학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지요? 딴소리 말고 자식을 위해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해요.”

“자식을 위한 일이라는데 내가 거절할 수야 없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좋아요. 지금 우리가 누구를 의지해야겠어요? 우리 내일부터 아들 입시를 위해 새벽기도에 나갑시다.”

 

이렇게 하여 수능시험 전, 그러니까 D-100일부터 김 교수는 교회에 다닌 이래 처음으로 새벽기도를 나가게 되었다. 새벽기도는 5시에 시작되므로 4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한다. 새벽기도를 나가야 아들이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논리에는 약간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괜히 논리적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이른바 고3 엄마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부부싸움으로 이어질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고3 학부모는 특별한 존재이다. 고3 학부모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를 위해 부모 가운데 한쪽이 자지 않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다. 고3 학부모는 가문의 여러 애경사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면책특권이 있다. 아들이 공부하는 시간에는 텔레비전 시청을 해서는 안 된다. 아들 방의 문을 꽝 닫아서도 안 된다. 물론 부부관계도 조심하여야 한다. 부모의 일상 모든 행동은 아이의 점수와 관련되어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고3 아들이나 딸은 집안에서 왕자나 공주 대접을 받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세태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우리나라 고3 학부모 전체가 그렇게 한다. 나라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감히 먼저 나서서 ‘이건 잘못된 것이요!’라고 외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동화에서는 옷을 입지 않고 나체로 돌아다니는 임금님을 보고서도 벌거벗었다고 외치는 어른이 한 명도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대한민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새벽기도를 다닌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그날도 싸움은 별거 아닌 데서 시작되었다. 새벽기도에 가게 되면 목사님이 나오셔서 찬송가 두어 장 부르고 성경 몇 구절을 낭독하고 간단한 설교를 하신다. 대개 30분 이내에 기도회가 끝나고 나면, 각자 개인 기도를 하다가 아무 때나 그냥 나오면 된다.

 

그날도 5시 30분에 목사님 기도가 끝났다. 개인기도 목록이 그렇게 길지 않은 김 교수는 5분도 안 되어 기도를 끝내고 나와서 차에서 기다렸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FM 93.1에서 그 시간에 국악이 나온다. 국악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는데, 김 교수는 새벽기도를 다니다가 조용한 시간에 듣는 국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날은 6시가 지나 국악이 다 끝났는데도 아내가 나오지를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웬일인가 교회로 다시 들어가 보니 아내는 쿨쿨 자는 것이 아닌가? 아내를 깨워 나오면서 가벼운 핀잔을 주었는데, 그것이 발단되어 싸움으로 이어졌다.

 

20년 동안 아내와 살면서 겪어 보니, 부부싸움의 특징은 3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는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둘째는 승패가 분명하지 않다. 셋째는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다. 김 교수의 부부싸움은 말이 싸움이지 격렬하지 않다. 몇 시간 내에 끝나는 때는 없고 대개는 장기전이다. 처음에 몇 번 싫은 소리가 오고 가다가, 김 교수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면서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이러한 침묵의 싸움은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계속된다.

 

그사이 전혀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니고, 김 교수는 아주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할 뿐이다. 예를 들면, ‘오늘 저녁 먹고 들어온다’라는 등의 꼭 필요한 말은 한다. 말은 하되 짧게 한마디씩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고 던진다. 물론 그사이에 부부관계는 자연히 생략된다. 한 이불을 덮고 자지만, 손을 잡지는 않는다. 밥상에서도 눈이 마주치지 않는다. 집을 나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김 교수의 경험으로 볼 때 부부싸움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내를 설득하는 것보다는 논리학의 원조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설득하기가 더 쉬우리라. 이렇게 말없이 지내다가 그저 우연히 아무 쪽에서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싸움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싸움은 때가 때니만큼 상당히 오래 갔다. 심상치 않다. 거의 3주 이상 침묵의 싸움이 진행되었다. 그사이 김 교수는 몇 차례 슬쩍 화해를 시도했는데, 아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여자가 숙이는 맛이 있어야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