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달빛에 물든, 우리 역사 속 기이한 이야기

《귀신들린 책》, 유동후, 토파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귀신들린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귀신’은 우리가 무서워하면서도 궁금해하는, 두렵지만 알고 싶은 그 무엇이다. 인간의 본능에는 신비로운 현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엄격히 기록으로 남겨진 ‘정사(正史)’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야사(野史)’가 더 흥미롭기도 하다.

 

소설가 이병주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출판기획자 겸 여행작가인 지은이 유동후가 쓴 《귀신들린 책》은 달빛에 물든 설화다. 민담과 야사에서 선뜻 믿을 수 없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려 뽑아 우리 전통문화의 깊은 뿌리를 보여준다.

 

 

제1장에서는 아랑 전설, 죽어서 뱀이 된 비구니 등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2장에서는 황소로 둔갑한 도승과 오백나한, 화랑으로 현신한 미륵불, 무심천에 나타난 일곱 부처님 등 절의 연기설화를 담았다.

 

제3장에서는 무학대사와 간월도 설화, 백제왕과 천안 위례산 건설 등 온 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명 관련 설화를 보여준다. 제4장에서는 야광주에 얽힌 사내 이야기, 연개소문전, 전우치전 등 서사성이 뛰어난 이야기를 수록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항복을 찾아온 복성군 이야기다. 이항복과 복성군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다. 복성군은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의 소생으로, 억울하게 옥사에 휘말려 사사되었다가 뒤늦게 무고함이 드러나 원통함을 풀게 되었다. 그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복성군의 혼령이 담력이 세기로 소문난 이항복을 찾아온 것이다. 복성군은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공론에 관해 물었다.

 

(p.61-62)

“두 분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승을 하직한 일은 만백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복성군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나도 제사를 통해 뒤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진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다만 세상에 떠도는 공론이 어떠한지 궁금할 따름이라오.”

그 말에 항복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얼마나 비통해하고 애통해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복성군의 두 눈에서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실로 그러하다면 내 몇 번을 더 고쳐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겠소이다. 정말 고맙구려. 그간 힘들었던 내 마음의 한을 그대가 말끔히 풀어주었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 한이 되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어찌 여기는지 알고자 하였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심약하여 마주할 자를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이항복에게서 답을 들은 것이다. 이항복은 이 일을 평생토록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만년에 북청으로 귀양 가 있을 때 심심풀이 삼아 말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 숙종 때 어의를 지낸 유이태에 얽힌 설화도 흥미롭다. 조선의 명의 유이태는 천연두와 홍역을 연구해 《마진편》이라는 의학서를 남기기도 했다. 공을 인정받아 안산군수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고향인 산청에 낙향하여 병자들을 돌보았다.

 

어느 날 유이태의 집으로 한 청년이 노모를 모시고 왔다. 유이태가 첫눈에 보니 노모에 맞는 약이 있긴 하지만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병을 고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헛된 희망을 품게 할 수 없었기에 꼭 처방을 알려달라는 청년에게 하늘이 결정할 일이라며 돌려보냈다.

 

노모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던 청년은 어머니가 갑자기 목마르다고 하자 물을 찾아 헤맸다. 산골짜기를 헤매던 가운데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깨진 박 조각이었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었다. 노모는 아들이 가져다준 물을 아주 맛있게 마셨다.

 

그러자 얼굴에 금세 혈색이 돌았다. 눈을 크게 뜨고 아들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노모는 병환으로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p.245)

어찌 되었든 효자는 노모를 업고 다시 유이태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난 유이태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과연 효자에게는 하늘의 보살핌이 따로 있는가 보군. 자네의 어머니가 마신 물은 천년두골 삼인수(千年頭骨 三蚓水)라는 물일세. 즉 ‘천년 된 해골에 지렁이 세 마리가 빠져 죽은 물’인데 들어보기야 했지만 내 능력으로 감히 어찌 그 귀한 약을 구할 수 있었겠나? 아무튼 하늘이 자네의 효성에 감동하여 내린 약이니 앞으로도 노모를 성심껏 잘 모시게. 그것이 하늘이 내린 은덕에 보답하는 길일세.” - <산청군지(山淸郡誌)> -

 

귀신, 신비한 해골물 … 모두 인간의 이성이 형형한 대낮에는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달이 뜨고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이런 설화나 야사가 당시의 민심, 세태, 분위기를 더욱 잘 담아낸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역사에 내려오는 고전 속 설화들은 무궁한 상상력의 원천이다. 조금만 이성을 내려둔 채 고전 설화가 주는 신비로움을 이 책과 함께 만끽해 보면 어떨까. 이성의 결박을 조금만 푼다면, 감성이 지배하는 고전 설화가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