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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민중의 음악을 전하여 온 것은 오직 광대뿐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78]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창극조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1930년대에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여기에 주축이 된 김창환을 비롯한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과 같은 명창들의 약전(略傳)자료를 중심으로, 창극사를 발행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일제시대,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 요로에 전달했다고 하는 문인, 임규(林圭)의 서문을 통해 당시의 창극조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글을 통해 당시 창극조의 상황을 엿보기로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인 이광수(1892~1950)는 평안북도 정주의 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최남선 등과 함께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글은 섬세하고 속 깊은 서사 기술의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인간의 본성(本性), 그리고 욕망을 깊이 파헤치며 독자의 감정을 다양하게 불러일으키는, 곧 풍부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감정을 몰입하게 만들어 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던 《무정》은 자유연애 사상과 민족의식을 강하게 담고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이 한국 근대소설의 시발점이라는 펑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조선창극사》를 펴내기 전이니까 1939년 말 무렵이 아닐까, 한다. 서문을 청하기 위해 저자, 정노식이 원고 뭉치를 들고 춘원 이광수와 마주 앉았다. 창극사를 쓰게 된 그간의 상황 설명을 듣고 난, 춘원 이광수의 반응이다.

 

“상곡(창극사를 쓴 정노식의 아호)이 말하기를, ‘광대소리야말로 조선인의 흉금을 울리는 것이라고, 광대소리야말로 조선인의 기상이 드러났느니 라고, 또 상곡은 말하기를, 광대는 당당한 예술가이거늘 그릇되게 천대를 받아왔으니 이제야말로 그 관념을 시정하여서 광대의 예술가적 가치와 사회적 지위를 바로 인식할 때라고,’

 

 

동시에 상곡은 한탄하여 가로되,

 

사회는 광대 예술의 진가를 모르고, 또 광대는 자기의 품격을 보전하려는 자각과 수양이 부족하다고, 나는 상곡의 탁견에 절절히 탄복하였다, 그리고 전혀 아무 문헌도 없는 80여명 광대의 예술과 생활을 광수박채(廣蒐搏採)하여 이 초유의 전적을 세상에 보내는 노(努)를 감탄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아래 줄임>

 

위의 광수박채란 널리 수집하고 캐낸다는 말, 정노식이 노력해 온 그간의 설명을 듣고 그의 노력이나 의견에 절절히 수긍하고 감탄하면서 이광수는 그가 평소, 간직해 왔던 미술과 음악에 관한 사고의 일단을 토로하는 것이다.

 

다음은 아래는 이광수가 바라본 미술과 음악에 관한 견해의 일부다.

 

“미술과 음악은 고래로 조선인의 자랑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삼국(三國) 성시(盛時)의 음악이 당시, 제(諸) 인접국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적(史籍)에 소소하거니와 금일에 잔존한 악곡(樂曲), 가무(歌舞)는 오히려 세계적인 특수한 가치를 가진 존재임은 내외가 공인하는 바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유산이라고 할 만한 이 음악을 금일까지 전하여 온 자가 누구냐 하면, 궁정 악공(樂工)과 민간의 광대(廣大)다. 그중에서 민중의 음악을 전하여 온 것은 오직 광대뿐이다. 이만 보아도 광대의 공적이 사(思) 과반(過半)할 것이 아니냐,! 이제 상곡으로 말미암아 이 귀중한 문화 공로자들의 업적이 후세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상곡은 악인(樂人)이 아니라 선비요, 지사임에도 자기를 희생해 가며 조선의 문화를 애석(사랑하고 아깝게 여김)하는 경경(耿耿, 염려하는) 일념으로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고로(古老, 경험이 많은 노인)를 만나고, 생존한 광대를 만나는 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력(성실한 노력)과 노심으로 자료를 수집, 《조선창극사》를 집필했다는 점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