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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남효온의 시비를 찾아서

[고양문화통신 1] 행주나루터에서 만난 추강 선생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비단옷 입고 고기반찬에 포만한 자들이여/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날짐승 길짐승이 보금자리 달리하듯/ 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이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선생의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라는 시의 일부이다. 평생 술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벼슬에 기웃거리지 않고 산수를 즐겨 유랑생활을 했던 그는 한때 술을 너무 밝혀 어머니의 근심거리였는데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술을 끊는 시(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을 만큼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남효온 선생은 조선 단종 때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수학했다. 영의정 남재의 5대손으로 고양(행주)에 살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풍자하는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추강냉화》와《추강집》에 그의 대쪽 같은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특히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목숨을 건 6명의 충절을 담아 쓴 사육신(死六臣) 이야기인《육신전 ‘六臣傳’》은 남효온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정신의 소유자임을 잘 나타내는 책이다.

 

   
▲ 행주나루터에 있는 남효온 시비

사육신이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선생을 가리키며 《육신전 ‘六臣傳’》머리말에서 남효온 선생은 “누가 신하가 아니겠는가만 지극하도다. 육신(六臣)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겠느냐만 크도다. 육신(六臣)의 죽음이여!”라고 읊었다. 선조는 추강의 《육신전》을 읽고 분개하여, “지금 육신전이란 글을 보니 매우 해괴하여 춥지도 않은데 소름이 끼친다.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를 놀려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 무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중략) 이들은 나라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적고 있다. (선조실록 1576년 6월 24일)

25살 되던 해 남효온 선생은 소릉복위를 포함한 8개 조항의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는데 사치스런 혼인을 금할 것, 수령을 잘 고를 것, 인재 등용을 공평하게 할 것, 백성의 고혈을 빠는 내수사를 혁파 할 것, 무당과 부처를 물리 칠 것, 인재양성을 꾀할 것, 풍속을 바르게 할 것 등이 그것이다. 소릉상소문을 올린 뒤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소릉복원이 이뤄지지 않는 것을 보고 29살 때부터 벼슬을 멀리하고 이정은, 홍유손 등과 죽림칠현을 결성하여 정의가 통하지 않는 불의의 시대를 통탄했으며 세상에 대한 분노의 항거로 소요건을 쓰고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

성종 23년(1492) 39살로 세상을 떴으나 남효온이 죽고 6년 뒤인 무오사화 때 외아들이 국문을 받다 죽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소릉복위 상소가 다시 거론되어 고양에 있던 그의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의 변을 당했다. 시체는 한강나룻가에 버려졌지만 1987년 문중에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후평리 산 4번지에 남효온 선생 무덤을 조성하였다.

   
▲ 남효온 시비


남효온 선생의 성품은 온화하고 담백하였으며, 영욕을 초탈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아 스승인 김종직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이라 부르며 아꼈다고 한다. 중종 8년(1513)에 소릉복위가 이뤄지자 신원(伸寃)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양시 행주산성 아래 행주강(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행주나루터에는 영원한 자유인 추강 남효온 선생을 기리는 시비가 우뚝 서있다. 2007년 11월 11일 추강 남효온선생 시비건립위원회(위원장 이은만)가 자랑스런 고양인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였던 추강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추강 남효온은 행촌 민순, 사제 김정국, 복제 기준, 추만 정지운, 모당 홍리상, 석탄 이신의, 만회 이유겸 선생과 함께 고양8현(高陽八賢)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문봉서원에 배향되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2013년은 “고양 600년”의 해이다. 고양시는 최영 장군 등 역대로 무수한 영웅호걸이 나온 고장이지만 조선시대 서릿발 같은 선비정신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준엄하게 질타한 추강 남효온 선생이 있어 더욱 그 가치가 빛나는 고장이다. 5월의 은빛물결 출렁이는 행주강가에 서서 선생의 높은 기개를 그리며 그 삶을 더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