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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왕비를 알아야 조선시대를 이해한다

왕비 제대로 알기

 [그린경제=양훈 기자]  한국 전통시대의 여성은 철저히 남편 그늘에 가려진 존재다. 다만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임금은 최고의 지존이자 최고의 권력자였으며 왕비는 조선 여성 가운데 절대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성으로, 이 시대의 다른 여성들처럼 단순하게 이해해선 곤란하다. 

조선시대 유교지식인들은 과거 시험을 위해서도 유교 교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사서오경을 읽어야 했다. 그 오경 중 예절과 의례에 관한 책인 예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개인과 가정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예기에 천자는 6(六宮), 3부인(三夫人), 9(九嬪), 27세부(二十七世婦), 81어처(八十一御妻)를 세워 천하의 내치를 듣는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황후는 정궁인 6궁에 살았고, 부인(夫人) 3, () 9, 세부(世婦) 27, 여어(女御) 81명 등은 후궁에 살았다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 

조선 왕실에서는 예기등을 근거로 임금의 처첩과 후궁을 당연시 했다. 고려시대에는 처와 첩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았다. 임금의 후비가 여러 명 존재하는 다처(多妻)의 형태였으며, 적실과 첩이 엄격히 구별하는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도입되면서 왕실의 가족 질서도 새롭게 재편되었다.  

첫째, 일부일처의 관념에 의해 오직 한 명의 정실부인만을 왕비로 책봉할 수 있었다.
둘째, 후궁과 상궁 이하의 궁인 등 궁궐 안의 여성들을 내명부에 편입시킴으로써 왕비를 정점으로 한 위계의 체계를 갖추었다.  

조선시대 왕비는 임금의 정실부인이며 나라의 최고 어머니인 국모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므로 이에 합당한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왕실 내명부는 궁궐 내 여성들의 서열을 나타내는 것인데 왕비는 내명부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왕이 품계가 없듯이 왕비도 품계를 초월한 위치에 있었다. 왕실 여성들은 문무 관리의 품계와 같이 18등급으로 편제되었는데, 이들 여성들은 크게 둘로 왕의 후궁인 내관(內官)과 일반 궁인인 궁관(宮官)으로 구분되었다. 

내관은 왕비 외에 후궁으로 임금이 거느리는 첩을 통칭한다. 내명부 가장 상위인 정1품 빈()외에도 종1품 귀인(貴人), 2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3품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4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은 내관에 속한다. 궁관은 정5품 상궁과 상의부터 종9품 주변징과 주변궁까지를 말한다.  

왕비의 간택과 궁중생활 

   
▲ 현종가례도병(보물 제733호), 조선시대 헌종(재위 1834~1849)과 효정황후가 혼인할 때 모습을 그린 병풍

사대부가의 여성에서 왕실 여성으로 편입되는 시작은 간택이다. 원래 간택은 왕실에서 혼례를 치르기 위해 후보자들을 궐내에 불러 모아 배우자를 뽑는 제도다. 조선 태종 때 시작되어 세종 때 정착되었다. 왕비의 간택은 대부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초간택 후보는 서른 명 내외, 재간택 후보는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삼간택 후보는 세 명을 뽑고 그들 중에 한 명이 최종 선발된다.  

그럼 후궁은 어떻게 맞이했을까? 조선시대 후궁이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먼저 사대부 집안 출신의 규수로 정식 혼인 절차를 거치는 경우와 한미한 출신으로 궁녀로 있다가 임금의 승은(承恩)을 입어 하루아침에 후궁이 되는 경우다. 전자는 간택후궁’, 후자는 승은후궁이라 한다. 

왕비나 세자빈은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고 민간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린 후 여러 차례의 절차를 통해 혼례를 치른다. 간택후궁도 마찬가지다.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은 신분상 차이가 있어 간택후궁은 대부분 처음 받는 품계가 종2품 숙의다. 승은후궁은 이보다 낮은 종4품 숙원의 품계를 받는다. 

임금과 왕비의 혼인은 보통 가례(嘉禮)라고 한다. 가례는 아름다운 예라는 좋은 뜻으로 본래 혼인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의 용어로 쓰였다. 가례는 인간이 사회관계 속에서 누려야 하는 삶의 본질과 욕망을 의례질서로 형상화한 철학적 ·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왕비의 간택 조건은 보통 덕행과 문벌, 가훈을 내세웠다. 그러나 왕비의 간택은 조정의 안정과 밀접히 관련되어 정치세력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임금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이 오히려 드문 일이였다.

 
처녀는 혼인을 금하라

   
▲ 활옷, 조선시대 궁중 가례(嘉禮) 때 입던 조선시대의 여자 예복, 복원작품(김경옥 궁중한복 제공)

간택은 먼저 길일을 정해 종묘와 사직에 고유하고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경국대전에는 왕실의 혼인 대상이 되는 신분을 양반사대부에 국한했다. 금혼 대상은 보통 15~20세의 처녀들이였다. 이 연령의 상하한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처녀 단자는 예조에서 양식을 만들어 각 관에 하달했다. 단자 규식에는 성씨, 본관, 사주(四柱), 사조(, , 증조, 외조의 직역과 이름)를 기록하도록 했다. 

삼간택 길일이 정해지면 통보받은 간택인 처녀들은 초간택하는 날 이전에 서울로 올라와서 기다려야 했다. 입궁하는 날 처녀들은 고운 옷을 차려입고 지정된 궐문을 거쳐 가마를 타고 들어갔다. 맞선 장소로 지정된 전각에 도착한 처녀들은 문짝을 떼어 내고 임시로 마루의 폭을 넓힌 보계(補階)’에 한 줄로 섰다. 그 앞에 발이 쳐져 있었고 대비를 위시한 가족과 종친, 외척 및 궁녀들이 대청과 방을 차지하고서 발 너머로 처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았다. 

간택인 처녀는 간택 때마다 간단한 식사 대접과 후한 선물을 받았다. 간택 처녀들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했다. 궁궐에 도착하면 먼저 다담상으로 대접을 받았으면서 정신적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선보이기가 끝나면 점심 진지상으로 각자 독상을 받았다, 국수장국을 주식으로 신선로와 감치, 화채 등이 차려졌다. 

삼간택에서 낙점된 처자는 비씨(妃氏)’라 칭했으며 간택일 당일 별궁으로 갔다.
당연하지만 간택에서 탈락한 처자는 혼인을 허락했다
 

육례를 행하다

임금의 가례는 사대부와 달리 고례의 형식을 따랐다. 고례는 육례(六禮)예기에 규정한 여섯 절차의 혼례를 말한다. 조선에서는 육례 중 일부를 거행하지 않거나 변형하여 임금의 육례는 점차 납채, 납징, 고기, 친영, 동뢰연, 조현례로 정형화되었다. 

이중 동뢰연이 신혼의 여정으로 이때 임금과 왕비는 술과 음식을 함께 먹는데 임금이 먹고 남은 음식은 왕비의 종자가 먹고, 왕비가 남긴 음식은 왕의 종자가 먹었다

조정과 왕실은 임금의 자손 번성을 위해 왕비의 임신을 기원했고 임신한 왕비는 몸관리에 정성을 다했으며 태교에 힘썼다. 하지만 일단 아이가 태어나면 왕비의 역할과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맏아들인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아이를 기르는 것에는 왕비 자신보다 조정과 왕실의 몫이 더 컸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왕비는 궁중의 중심부인 중전에서 생활하였는데 후궁은 중전의 뒤편에 소재하는 독립 건물에 살았다. 대비는 중전의 왼쪽 건물, 세자빈은 궁중의 동쪽 구역에 위치한 동궁에서 세자와 생활하였다. 또한 왕비와 후궁들의 거처, 명칭, 신분, 자녀 등 모든 것을 차별하는 기준이 있었다. 예컨대 왕비의 딸은 공주, 후궁의 소생은 옹주, 세자빈의 소생은 군주, 세자의 후궁 소생은 현주라고 하였다. 이들 후손은 이름뿐 아니라 예우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 왕비는 보통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혼인하고 입궁하였다. 입궁할 때에는 유모와 몸종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들을 본방나인이라 했다. 왕비가 사는 중전에는 본방나인 외에도 수많은 궁녀가 있었다. 그 수는 일정치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아졌다. 조선 전기에는 50명 이내, 후기에는 100명 이내였을 듯하다.
 

왕실 여성의 독서를 통한 교육 

밖에서 편입된 왕실여성은 공적으로는 지위와 역할의 차이가 있었지만 필요한 교육을 누구나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교육에는 여사()를 두었다. 왕실 여성의 교육은 교술적(敎述的) 교육 곧 소학, 내훈 등 여성으로서 생각과 행동, 대처 방법 등의 교과서적인 교육과 감계적(鑑戒的) 교육 곧 과거 훌륭한 행적을 보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을 중시하였다. 

교육 자료들은 한문으로 이루어 진 것을 한글로 옮겨 여성들이 읽는 데 편의를 주었다. 한문은 전문적인 교육과 오랜 기간 학습을 통해 익혀야 했기 때문에 여성들의 독서는 한글을 통해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글 창제 이래 대비(大妃)의 수렴청정에서도 조정의 의견은 한문으로 취합되어 다시 한글로 옮겨져 대비에게 전달되었고, 대비의 지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전달되었다.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한글로 언해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국정의 좌우한 왕비와 외척의 폐해와 수렴청정 등 부정적 이미지도 있지만 조선시대 왕비는 궁궐 안의 다른 여성들과 숱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왕실의 어른을 모시며 후궁, 세자빈, 궁녀 등 아랫사람들도 거느려야 했다. 왕비와 궁중의 여성들을 모르고서는 조선시대를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참고 :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재우임민혁이순구한형주박용만이왕무,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