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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한국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6] 650년 선비정신과 베풂 실천

순창 양사보(楊思輔) 집안을 찾아서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순창의 양사보 집안을 찾아가던 날은 제법 무더위가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완주순천간 고속도로 완주에서 순천 방향으로 가다가 오수나들목(I.C)에서 빠져나간다. 완주에서 오수나들목까지 무려 10여 개의 굴(터널)이 이어지며 두메(깊은 산골)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 되어 서울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이어서 전북 순창의 동쪽 지역을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줄기를 따라 동계면 구미리에 이르면, 고려 공민왕 4년(1355년) 무렵부터 이어져 온 650여 년 내력의 한 명문가 남원 양(楊) 씨 집안이 터를 잡고 있다. 이 집안은 대대로 욕심을 버리고 베풀며 살았던 아름다운 선비 정신의 산실로 알려졌다. 

(사)옥천향토문화연구소(예전 순창은 옥천현이었다.) 양완욱 사무국장의 소개로 거북이마을 농촌체험학습 추진위원장인 양 씨 가문의 29대 후손 양병완 선생을 회관으로 찾았다.  

손말틀(휴대폰)에서 판소리 춘향가 한 대목이 울려나왔던 양 선생은 기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다. 알고 보니 양 선생은 얼마 전까지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분이다. 전공과는 무관하게 판소리와 풍물을 좋아했던 선생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한다. 심지어는 독일에까지 학생들의 연주솜씨가 알려져 초청을 받았고, 교육청의 협조를 받아 독일 연주여행을 인솔했던 것이 교사시절 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판소리 한 대목을 거침없이 부르는 선생의 손말틀에서 괜히 판소리가 울린 것은 아니었다.
 

이 집안은 양사보 종택으로 알려졌다. 과연 양사보는 어떤 인물인가? 

   
▲ 귀미리 들머리에 세워진 양사보 어머니 이씨 부인 정려비(1774년 세움)

하마터면 절손(絶孫)될 뻔했던 남원 양씨를 오늘날 명문(名門)으로 남게 한 개성 출신인 이씨 부인이 있었다. 이 씨 부인은 우왕 3년 부자(父子)가 급제한 집안으로 출가했지만 시아버지와 남편을 한 해 사이에 사별하는 불행을 당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친정에서는 임신한 그녀에게 개가를 권했다.  

고려시절만 해도 남편을 사별한 여인은 얼마든지 재혼을 할 수가 있었을 때다. 이 씨 부인은 아이를 낳고 나면 개가를 하겠다고 식구들을 안심시키고는 아이를 낳자마자 어린 유복자 양사보(楊思輔)를 품에 안고 천리 길을 걸어 남편이 살았던 남원 옛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남원이 왜구 때문에 살 수 없게 되자 일점혈육 양사보를 품에 안고 남원을 떠나 순창으로 피난했다.  

순창으로 온 이 씨 부인은 살만한 터를 찾기 위해서 나무로 만든 기러기 세 마리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한 마리가 동계면 구미리(龜尾里)로 날아갔는데 부인은 나무 기러기가 떨어진 집으로 갔다. 그곳에 있던 주인은 자기가 진짜 주인이 아니고 집주인이 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집주인이 양씨라는 것만 압니다. 바로 부인과 아드님이 집주인입니다."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곳에 정착한 이 씨 부인은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어린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는데 그 아이는 자라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벼슬길에 나가 함평 현감을 지내는 등 가문을 일으켰다. 이 아이가 바로 양사보인 것이다. 지금도 남원에서 순창으로 가는 24번 국도변의 비홍치(飛鴻峙)는 이 씨 부인이 나무 기러기를 날렸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후 양사보(楊思輔)의 8세 후손인 양여균(楊汝筠)에 이르러 많은 재산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여균(楊汝筠)은 가솔 300명을 의병으로 거느리고 도성으로 출정하기도 했다. 그 아들 양운거는 더욱 큰 부(富)를 쌓았는데 헌종실록 2년(1661) 1월 5일 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순창인(淳昌人) 양운거(楊雲擧)는 일찍이 몇 백 석의 쌀을 관에 냈으며, 또 흉년이 들자 자기 개인 재산을 풀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자못 많습니다. 지금 만약 재물을 희사하여 빈민을 구제한 사람에게 상을 주던 옛날의 제도를 시행하기로 한다면 운거에게 상을 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상당한 관직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또 같은 기록에는 양운거가 대대로 호남에 살았는데, 재산이 넉넉하여 백만장자로 이름이 났는데 선왕조에도 일찍이 운거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고, 이때에 와서 사옹원 참봉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양운거가 가난한 사람을 도왔음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고, 또 벼슬을 사양하는 미덕이 있었음이 드러나니 참 선비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양석승・양석우 형제의 베풂실천
 

   
▲ 구림면 자양리 양석우 무덤 옆에 한 쪽 모서리가 깨진 채 쓸쓸히 서 있는 유혜비

   
▲ 양석우 유혜비를 설명하는 양병완 선생

   
▲ 유혜비 옆의 양석우 무덤

특히 양사보의 16대 후손인 양석승은 재산이 천석에 이르자 돈 벌기를 그만 두고 교육과 독립운동에 거의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나 쓸 수 있는 디딜방아를 설치해 두고 이웃 사람들이 언제라도 쌓아놓은 볏가마에서 나락을 꺼내 쌀을 찧어 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어서, 사람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벼를 찧어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공짜로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도 양심이 있어서 3되 이상은 가져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구례 류이주 집안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 쌀뒤주와 비슷한 장치이다.  

그는 일제가 만든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상당한 돈을 들여 한학 서당을 세웠다. 순창의 유명한 학자이자 우국지사였던 설진영(薛鎭永)을 초빙, 이 서당을 이끌어 가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울분을 참지 못한 설진영이 우물에 투신하여 순절해 버리자, 그 가족들의 생계를 보살폈으며, 기미 독립 선언 33인 중 하나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주도하던 독립자금 모집에 남모르게 참여한 정황도 있다. 

또 그의 동생 양석우(楊錫愚)는 적성강(적성면 체계산 옆을 흐르는 섬진강)가에 있는 모든 땅을 침략한 일제가 공유지로 강제로 편입시키려 하자 자신이 사서 그 땅의 소작인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모두 나누어 주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나눔이 아니었다. 훗날 그에게 땅을 받은 경작인들이 1912년에 가로 40㎝, 세로 1m20㎝의 “양석우포전시혜유허비(楊錫愚浦田施惠遺墟碑)”를 세웠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 이 유혜비가 구림면 자양리 산 속 양석우 무덤 옆에 한 쪽 모서리가 깨진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양병완 선생의 안내로 어렵사리 찾아간 유혜비는 그래서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세월에나 무덤가가 아닌 제자리 적성강가에 옮겨져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 
 

고려시대 보물 홍패 3점 가운데 2점이 있는 자존심의 종택 

그런데 이 양 씨 집안은 단순한 명문가가 아니었다. 구미리 종택에는 대한민국 보물 제725호가 있다. 그것도 온 나라에 3점뿐이라는 고려시대에 발행한 홍패(과거시험합격증)가 이곳에 2점이나 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니던가? 그것도 발행한지 658년이나 되지만 약간 좀이 슨 것 말고는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었으니 후손의 정성이나 한지의 우수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 온 나라에 3장뿐인 고려시대 보물 홍패가 이 종택엔 2장이나 있다.

   
▲ 홍패 영인본이 전시중인 귀문각

여기에는 고려시대 홍패 말고도 조선시대에 발행된 홍패와 백패도 5점이나 있다. 다만, 이곳 종택에 장비를 가진 도둑이 들어와 금고에 구멍을 내다가 달아난 적이 있어 현재는 모두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중이고, 이곳에는 영인본을 전시중이다. 양씨 집안은 자존심과 나눔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들의 자존심이 홍패였다고 한다면, 그 자존심을 이어가도록 뒷받침한 도덕적 장치는 이웃에 대한 나눔이었다.  

우리는 가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말하면서 미국의 빌게이츠나 워런 버핏의 예를 든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도덕성을 지니고 이웃이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분들이 있다. 안동 임청각의 이상룡 선생이 그렇고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 선생이 그랬다. 그리고 여기 순창의 양석승, 양석우 형제의 베풂이 있는 것이다. 

종가 취재를 더해 가면서 점점 나는 나눔의 철학에 심취해간다. 취재 중 우연히 본 어떤 이의 블로그는 내게 따뜻함을 안겨준다. 사업이 망해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던 때 거래처 사람과 계약을 위해 가던 길에 그녀에게 한 청년이 간곡하게 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한다.  

주머니에 만 오천 원만 있던 그녀는 만 원을 주곤나면 거래처 사람과 차 한 잔 마실 돈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심 끝에 만원을 주었다. 은혜를 갚겠다고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그 청년에게 그녀는 “은혜라고 할 것 까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른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분들께 그 마음을 갚아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런 베풂이 양 씨 집안의 베풂이고 또 진정 아름다움이 아닐까? 모두가 그런 마음을 지닐 때 세상은 정말 환하게 밝아 올 것이다.  

 

   
▲ 양사보 종택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