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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무료 변론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츠지

[맛있는 일본이야기 236]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4월 16일 “변호사 후세 다츠지 영화 상영”이라는 큼지막한 전단지를 만든 곳은 양심 있는 일본 시민들이 꾸려가는 고려박물관이다. 고려박물관은 1회 90분짜리 영화를 4월 16일부터 4일간 상영 할뿐 아니라 4월 2일부터 6월 1일까지 일본의 양심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츠지 (布施辰治 1880 ~ 1953)에 대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1월 29일부터 3월 30일 까지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 전시 중. 시 이윤옥, 한국화 이무성) 



후세 다츠지 변호사는 한평생을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법률 변호를 맡아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땅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부르짖었을 때 이들의 변론을 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때는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할 정도로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공로를 높이 사서 한국정부에서는 2004년 후세 변호사에게 일본인 최초의 한국건국훈장 애족장(2004)을 추서했다.


후세변호사는 1923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의 조선총독부 요인 암살 기도사건, 제1·2차 조선공산당사건 등에 대해 무료 변론을 맡았다. 이로 인해 1930년대에만 3회에 걸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두 번이나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한결같이 조선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신인(新人)의 조선인상(朝鮮印象)>에서 후세 변호사는 그렇게 조선의 인상을 묘사했다. 그 무렵 한다하는 일본인들의 조선방문기에는 경치가 좋으니 평양기생이 예쁘다느니 하고 변죽을 울리는데 반해 후세 변호사의 조선 첫인상은 이렇게 남달랐다. 그리고 그는 경성행 열차 안에서 까닭 없이 조선인을 얕잡아 보던 일본인을 목격하면서 식민지 지배국 사람들의 거친 횡포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조선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농업의 개선과 발전을 질적, 양적으로 향상시키더라도 그것이 모두 식민지 본국으로 유출된다면,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기름진 쌀과 보리 같은 생산물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못하고 전부 유출되는 것을 보고 슬픔과 애달픔만이 늘어갈 것이다. 더욱이 수출된 쌀이 돈이 되어 조선 무산계급 농민에게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일본인 대지주의 소작지이기 때문이다.”


《어느 변호사의 생애, 후세다츠지, 이와나미출판, 1963》 속에서 후세 변호사는 자신의 조국 일본의 포악성에 신음하는 조선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가 조선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지금도 일본에는 입만 열면 일제가 조선의 농업생산성을 높여주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으며 부끄럽게도 그를 신봉하는 앵무새 한국인 학자들이 있는 것에 견주면 후세변호사의 조선인식은 시대를 초월한 균형 잡힌 감각이다.


모쪼록 4월부터 고려박물관에서 열릴 인권변호사 후세다츠지의 삶을 통해 일본인들이 과거 식민지시대에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사회적 약자편에 섰던 고귀한 영혼과의 만남의 장을 성황리에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