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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던 공양왕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고양 갔다가 원당동에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보았습니다. 공양왕릉은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무덤이었습니다. 아무리 쓰러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의 무덤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고관대작의 무덤보다 못하다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요? 

무덤 앞 안내문의 제목은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입니다.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하도에서 회군한 이후 고려의 실권은 이미 이성계에게 넘어와 있었지요. 그리하여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 손자로 몰아 쫒아내고는 다시 만만한 인물을 찾다가 제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에 앉히니, 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입니다. 공양왕은 임금이 될 때에 이미 나이가 45살이었답니다.  

안내문에는 왕요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적어놓았군요.나는 평생 동안 먹는 것, 입는 것이 풍족했고 시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왜 내가 이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 경기도 고양시의 고양왕릉

결국 공양왕은 2년 8개월 만에 이성계에게 임금 자리를 넘깁니다. 그리고 아내 노씨와 세자였던 아들 석(奭)과 세 딸, 그리고 아끼던 삽살개를 데리고 궁궐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내달립니다. 왕위를 넘겨주었지만 이성계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가 당도한 것이 고양의 견달산이었습니다. 견달산 밑에 오니 날은 어두워지고 배는 고프고... 한 나라의 임금이 참 신세 처량하게 되었군요. 그때 산 저쪽에 불빛이 하나 보입니다. 다가가보니 절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온 스님은 임금의 행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립니다.  

안내문에는 그때 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는군요. “어찌하여 천하의 주인이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셨는지요.” 스님은 공양왕 일행을 절에 모시고 밥을 해줍니다. 그래서 밥을 해준 절이라 하여 식사(食寺)라 불렀고, 이게 오늘날 일산 동구 식사동의 유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하! ‘식사동’이란 동네 이름을 들을 때에, 무슨 밥 먹는 것과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제 생각이 맞았군요. 

그러나 공양왕이 사라졌다고 이를 그대로 보고 있을 이성계 일파가 아닙니다. 어느 날 드디어 공양왕을 찾는 무리들이 다가옵니다. 스님은 견달산의 한 고개 아래에 가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암자가 있다고 공양왕 보고 그리로 피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급하게 도망가던 공양왕은 미처 삽살개를 챙기지 못했는데, 결국 이 삽살개 때문에 발각되어 압송되어 간다는 것이지요. 삽살개는 자기 때문에 압송되어간 공양왕을 생각하며 연못으로 뛰어들어 자살합니다. 그리고 그곳엔 임금을 보살펴주던 스님이 밥그릇을 품에 안은 채 죽어 있었구요.  

무덤 앞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습니다. 이 웅덩이가 바로 그 삽살개가 뛰어들었다는 웅덩이이군요.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공양왕은 압송되어 갔는데, 어떻게 여기에 무덤이 있지요? 공양왕이 죽자 이리로 옮겨 장사지냈나요? 글쎄요... 그래서 그런지 옆에 또 다른 안내문에 적혀 있는 얘기는 약간 다르군요.  

공양왕이 절에 머문 것은 아니고, 스님들이 공양왕을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시키고 날마다 밥을 날라 드렸다고 하네요. 또 어느 날 임금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온 산을 뒤지며 찾았는데, 삽살개가 어느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어대고 있었고, 사람들이 오자 연못 속으로 뛰어 들었답니다.  

연못 속을 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여 물을 퍼내고 보니 임금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구요. 공양왕은 이성계 일행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루기 전에 자살을 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공양왕의 무덤을 만들어주었고, 무덤을 지키게 하기 위해 삽살개 모양의 석물(石物)을 무덤 앞에 세웠답니다. 이 얘기를 보면서 무덤을 보니 실제로 임금과 왕비 무덤 앞에서 돌개[石狗]가 앞을 바라보고 있군요. 

   
▲ 공양왕 무덤 앞의 웅덩이, 설화에 따라서는 삽살이가 자살을 한 곳이라고도 하고, 공양왕과 왕비가 죽은 곳이라고도 한다.

이 전설에 의하면 공양왕의 무덤이 여기 있는 것이 말이 되는데, 정사(正史)를 보면 공양왕은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삼척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1394년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그럼 이 전설 또한 이상합니다. 삼척에서 죽은 공양왕을 일부러 이 먼 곳에까지 옮겨와 장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실제로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가면 공양왕의 무덤이 있고, 강원도에선 이 무덤을 강원도 기념물 71호로 지정하였답니다. 그러나 이곳 고양의 공양왕릉도 사적 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양시에서는 매년 공양왕릉 봉행제도 올리고 있다고 하고, - 물론 삼척도 이에 질세라 봉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 또 능 앞에는 조선 고종 때 세웠다는 ‘고려 공양왕 고릉(高陵)’이란 비석도 있으니, 그것 참... 공양왕의 시신을 둘러 나누어 장사지냈나? 

기회가 되면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도 찾아봐야겠습니다. 사진을 보니 삼척의 공양왕릉도 초라하기는 고양의 공양왕릉과 별 차이가 없는데, 어찌 되었건 조선이 고려를 짓밟고 일어선 나라라고 하더라도 전 왕조의 임금의 무덤을 이렇게 초라하게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편집자 덧붙임)
    글쓴이도 월가운데 얘기를했습니다만 공양왕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와 강원도 삼척시에 있습니다. 둘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공양왕 무덤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군데 공양왕 무덤에 대해 기록한 문화재청의 설명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1. 고려 공양왕릉 ( 高麗 恭讓王陵 ) 지정일 : 1970-02-28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임금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임금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은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삼척공양왕릉 ( 三陟恭讓王陵 ) 지정일 : 1995-09-18

 
   
▲ 삼척공양왕릉 (三陟恭讓王陵)

고려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재위 13891392)의 묘로 전하는 곳이다. 공양왕은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폐위되었고, 태조 3(1394)에 왕자 석(), ()와 함께 삼척으로 간 뒤 교살되었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헌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양시의 능은 조선 왕조가 인정하고, 삼척시의 능은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나 둘 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삼척시 왕릉에 대한 기록은 현종 3(1662) 삼척부사 허목의척주지와 철종 6(1855) 김구혁의척주선생안이 있다. 그리고 3년마다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는데 임금이 유배된 곳이라 하여 궁촌, 마을 뒷길 고돌산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살해재, 왕자 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 등이 그것이다. 삼척의 공양왕릉은 봉분이 모두 4기인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 2기는 두 왕자, 나머지 하나는 시녀 또는 말의 무덤이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