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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목숨을 걸고 동해를 지킨 안용복 장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4]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부산 출장 갔다가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안용복 장군 사당에 들렀습니다. 사당 옆 관리실에는 안용복 장군에 대해 약간의 전시를 해놓았는데, 제가 자료를 관심 있게 보면서 질문을 하니까, 관리인이 저에게 책자를 하나 주더군요. 사단법인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안용복 장군 其功不滅이라는 책자였습니다. “其功不滅그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뜻이지요. 책자를 보면서 제 머리 속에 흐릿하게만 떠돌던 안용복 장군의 위용이 확실하게 잡혀갑니다 

   
▲ (사)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안용복 장군 其功不滅》 책 표지

안용복 장군은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경상좌수영의 함선에서 노를 젓던 수병이었습니다. 일개 수병을 장군이라 부르니 엄청난 진급이겠는데, 물론 이는 안용복의 행적을 흠모하고 그의 공적을 높이 산 후손들이 존경의 의미로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안용복 장군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4년 부산 대동문교회에서 안용복을 독전왕(獨戰王) 안용복 장군이라 부르며 추존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안 장군은 1693(숙종 19) 봄에 동래 어부 40여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갑니다. 아마 수군이라고 하여도 요즘 같이 1365일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생업을 이어가다가 1년에 일정 기간 필요할 때만 수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안 장군이 탄 배는 울릉도 근해에서 일본 어부들의 배를 만납니다. 당시 조선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를 지키기가 힘들다고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강제로 육지로 소환하여 섬을 비워두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이지요.  

조선은 왜구들이 연근해의 섬들을 자꾸 노략질하니까, 국방력을 강화하여 섬 주민들을 보호해줄 생각은 안하고, 거꾸로 섬 주민들을 육지로 소개시키는 소극적인 공도정책을 펼친 것이지요. 공도정책으로 비워둔 섬은 울릉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한심한... 조선은 눈을 크게 뜨고 대양으로 뻗어나갈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오로지 대륙에만 빌붙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자신만이 중화를 이어갈 수 있는 소중화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더욱 대륙만 쳐다보고 있었구요. 

이런 조선의 공도정책을 틈 타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 근해를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고기를 잡아갔습니다. 그러니 안 장군이 항의를 하여도 적반하장으로 안 장군과 박어둔을 납치하여 호오키주(지금의 도토리현)로 돌아간 것이지요. 그러나 안장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호오키주 성주에게 일본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져, 결국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냅니다.  

당시 울릉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은 일본에서도 대마도와 호오키주의 어민 정도였고, 에도 막부는 동해의 작은 섬 때문에 조선과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서계를 내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부가 서계를 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 대마도주는 안 장군이 나가사끼를 거쳐 귀국하려고 할 때에, 안 장군을 강제로 대마도로 끌고 가 50일간 억류하였고, 안 장군을 부산으로 데리고 와서도 부산 왜관에 40일간이나 묶어두었다가 풀어줍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안 장군으로부터 빼앗은 서계를 금후 조선 어민이 일본 영토 다케시마(竹島)에 나와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으로 위조하여 차왜(差倭) 다치바나로 하여금 우리 정부에 제출하게 합니다.  

, 다케시마라고 하면 독도가 생각나실 텐데, 원래 일본인들은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다고 당시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습니다. 대마도주의 속셈은 이렇게 항의서한을 내면 공도정책을 펴는 조선으로서는 다케시마가 어떤 섬인지는 관심을 두지 않고 조선 백성이 공도정책을 어기고 울릉도에 가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들의 술책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대마도주의 이런 요청에 조선은 안 장군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2년 동안 감옥에 가둬놓았으니 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대마도주의 요청대로 금지시키겠다고 하면서도, 예조복서에 우리나라는 연해 어민이 먼 바다에 나가는 것을 엄금하여 우리나라의 울릉도라 할지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임의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다른 나라의 땅에 있어서랴...”로 기재하여 다치바나에게 건네줍니다.  

그런데 다치바나가 이를 그대로 받으면 자기네 속셈을 이룰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여 다치바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계에서 울릉도부분을 빼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접위관 홍중하가 이를 거절하고 다치바나를 꾸짖으니, 다치바나는 할 수 없이 예조복서를 그대로 받아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대마도주의 울릉도에 대한 욕심은 한 번 좌절되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1694(숙종 20) 8월에 대마도주 무네는 다치바나를 우리에게 보내어 다시 서계에서 울릉을 빼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 거절한 것을 일본이 계속 보챈다고 들어주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일본놈들 참 끈질기네요. 이때는 1695(숙종 21) 6월까지 다치바나는 부산에 계속 머물면서 요구하다 안 되니까 4개조의 항의서를 제출하고 돌아갑니다.  

안 장군이 두 번째로 일본에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 장군은 에도 막부가 저번에 안 장군에게 서계를 써주었음에도 대마도주가 계속 울릉도에 욕심을 내는 것에 분개하여, 자신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순천 송광사의 중 뇌헌 등이 어선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이들에게 울릉도 근해에서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같이 가자고 제의하여 두 번째 울릉도행이 이루어졌습니다 

   
▲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안용복 장군 동상

안 장군은 울릉도에 가면 틀림없이 일본 어선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일본 어선의 불법 조업을 따지면서 일본으로 갈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런 확실한 목적이 있었기에 안 장군은 떠날 때부터 감세관(監稅官)으로 위장할 관복과 감세관의 배임을 나타내는 깃발까지 준비하였지요.  

울릉도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일본 어선들이 와 있습니다. 안 장군이 호통을 치면서 이들을 추격하여 우산도(현 독도)에 이르니, 왜인들은 우산도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해먹고 있었습니다. 분기탱천한 안 장군이 이들의 솥을 마구 두들겨 부수니 일본 어부들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안 장군의 목적이 원래 일본 가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안 장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옥기도까지 갔고, 다시 일본 본토의 호오키주까지 가서 감세관으로 위장하고 성주와 담판을 벌입니다. 

안 장군은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서계를 빼앗고 위조하는 등으로 농간을 부리는 것을 따지면서 이를 막부에 올리겠다고 하며, 같이 간 이인성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짓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를 안 대마도주가 호오키주 성주에게 이를 올리지 못하게 합니다. 상소문이 그대로 막부에 올라갔다가는 그동안 중간에서 장난친 자신의 농간이 탄로날까봐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가만히 있을 안 장군입니까? 그리하여 호오키주 성주는 안 장군을 회유하기 위하여, 울릉도에 침범한 왜인 15명을 처벌하면서 안 장군에게 이후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국서와 역관을 보내라, 그러면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안 장군도 자기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성주로부터 확실한 다짐을 받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저번처럼 대마도주의 농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이번에는 차왜를 붙여주겠다는 성주의 제의도 거절하고, 동해를 횡단하여 직접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옵니다.  

~~~ 이 정도면 안 장군이 나라를 위해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강원감사 심평은 안 장군이 국경을 넘은 죄인이라고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합니다. 당연히 안 장군에 대해 국문(鞠問)이 이루어졌겠지요? 고문도 있었을 테고요. 안 장군의 처리 문제를 놓고 노론은 안 장군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다고 사형에 처하자고 합니다.  

사형?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남구만, 윤지완 등의 소론이 반대하여 다행히 이런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이후 안 장군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더 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디 안 장군이 유배형이 끝난 후에는 같은 조선의 민중들에게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울릉도에 대한 문제는 호오키주 성주의 구두 약속만으로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대마도주는 그 동안 조선 정부에게 울릉을 문서에서 빼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였음에도 조선이 강경하게 나오는데다가, 안 장군이 목숨을 걸고 일본에 다시 들어가 대마도주의 불법을 폭로하면서 강력히 항의를 하자, 대마도주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에도 막부에 그 동안의 전후 사정을 보고합니다. 

보고를 받은 막부는 다케시마가 이나바로부터는 160리이나 조선으로부터는 40리이니 조선땅이 명백하다며, 작은 섬을 두고 이웃 나라와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된다고, 앞으로 일본인의 다케시마 통행을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를 조선에 통보하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대마도주는 내심 불만이 많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1696(숙종 22) 우리나라 도해역관에 그 뜻을 전하고, 1697(숙종 23) 2월에 정식으로 동래부사 이세재에게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출입을 금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서 울릉도 문제를 종결짓습니다. 

안 장군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일본이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를 두고도 생떼를 부리지 않았을까요? 안용복 장군! 안용복은 진정 장군으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