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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모두가 반대하던 건설업, 정주영이 하면 성공한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⑥ 현대건설의 시작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쩌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은 건설이었는지도 모른다. 중동건설 붐을 타면서 봇물 터지듯 했던 해외건설 수주는 당시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2014년에도 여전히 건설회사 도급순위 1위를 달리는 현대건설은 직원들이 한국에는 경쟁자가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미 중동 건설 붐 때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현대’, 그런 정주영도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흔히 정주영은 롤러코스트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만큼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런 롤러코스트 삶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건설사업은 자동차 수리비를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시작되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을 목격했다.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고작 몇 백 원을 받아 가는데, 건설업자들은 건설 공사비로 몇 만원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정주영은 분야가 다르지만 우리도 일을 죽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안 되겠다. 이왕이면 나도 큰돈을 받는 일을 해야지.”라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함께 사업을 하는 친구는 물론 식구들도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건설업을 하려면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럴 만 한 돈도 없고, 더구나 경험도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동안 어렵게 일구어놓은 것마저 무너집니다.” 

건설공사나 토목공사는 자동차 수리처럼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사는 일 년도 걸리고 삼년도 걸리는데다가 요즘은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섣불리 공사를 맡았다간 단박에 망해요.” 

그러나 주위가 모두 반대해도 자신의 뜻을 굽힐 정주영이 아니었다. 

해보지도 않고 왜 지레 겁먹고 그래? 그런 생각으로 사업을 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긍정적으로. 그렇게 해도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안 된다고 생각하면 절대 망하지. 그리고 자네 말처럼 경험이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나? 그냥 이 작은 자동차수리업으로 만족하고 말 거야? 큰 성공은 겁 없이 도전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야. , 자신감을 가지면 우리도 분명히 성공할 수 있어 걱정 말아.” 

정주영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안암동 고려대학 본관을 짓는 공사판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또 토건업에는 그리 큰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견적 넣어 계약하고 수리해주고 돈 받는 자동차사업이나 역시 견적 넣고 계약하고 건축하고 하는 것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공사판에서 잡부 노릇을 한 정도와 건축의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무모함이 오늘의 현대건설을 이룩한 건 아닐까? 

정주영은 고집대로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안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하나 더 걸고 야심차게 건설업을 시작했다. 1947525일이었다. 하지만 건설업이 현대자동차공업사 같이 만만치는 않았다. 그동안 해왔던 사업들과는 달리 초반 2년 남짓 그저 남의 공사 하청을 받아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당시 우리나라 건설업계는 십여 곳의 상위 건설업체를 빼고는 3000여 개가 넘는 중소업체들이 피 말리는 수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정주영의 현대토건사도 그 3000개 하청업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게 연명하기에 급급했던 현대토건사는 1950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합쳐 <현대건설>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얼굴을 내민다. 두 회사를 하나로 합침으로써 몸집 불리기도 하고, 체계적인 기업으로서 새롭게 발돋움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은 광화문으로 본사를 옮기고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 한국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정인영은 그때 미군 공병대 중위의 통역을 맡고 있었는데 마침 공병대는 미군 숙소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625 전쟁 때문에 수십만 명의 미군이 부산에 들어왔지만 이들을 수용할 만한 숙박시설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학교교실을 임시 숙박시설로 썼는데 그것만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정인영은 무릎을 쳤다. 정주영을 미군에게 건설업자로 소개했던 것이다. 625 때문에 피난길에 나섰던 형제는 오히려 625 덕분에 미군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공사를 할 수 있었다. 무모했던 건설업으로의 진출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서울을 수복했을 때 그들은 미군 지프를 타고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돈을 한 가방 가득 가져다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주영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다가왔다. 195212월 미국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그가 묵을 곳은 운현궁이었다. 하지만 운현궁은 전통한옥으로 수세식 화장실은커녕 보일러시설도 안 돼 있었다.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미국대통령이 머물 곳으로 깔끔하게 내부 단장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5일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미군은 고심하던 끝에 그동안 많은 공사로 믿음을 쌓은 정주영을 불렀다. 이때 미군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정주영은 뚝심 있는 제안을 내놓는다. 공사를 기일 안에 마치면 공사비의 배를 상여금로 주고, 반대로 제때 못 마치면 공사비를 받지 않음은 물론 공사비의 갑절을 손해배상으로 물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공사를 맡길 수밖에 없는 미군의 절박한 사정을 역이용한 셈이었고, 배짱이 두둑한 정주영만이 할 수 있는 역제안이었다. 

계약을 하자 정주영은 일꾼들을 데리고 피난을 나가 비어있는 집을 뒤져 보일러통, 세면대, 욕조, 양변기는 물론 심지어 파이프까지 모조리 실어 왔다. 그러나 도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개가 급해서 무엇을 갖고 갔으니 어디어디로 오면 그 값을 쳐주겠다.”는 소위 인출증 비슷한 것을 벽에다 붙여 놓은 것이다.

그리고 빈집에서 뜯어온 중고자재를 활용하여 하루 24시간을 쉬지 않고 일꾼들을 독려하여 열흘 만에 공사를 끝냈다. 정주영다운 공사 완공이었다. 마감 사흘 전에 공사를 끝내고 공사비를 받으러 간 정주영에게 미군들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현다이, 넘버원!”이라며 소리를 질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미군들의 고민을 일시에 해결해준 해결사였으니 당연히 그럴만한 일이 아니던가? 
 

   
▲ 정주영 보리밭은 옮겨와 유엔묘지를 푸른빛 세상으로 만들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여기서 그친 게 아니고 미군의 감탄을 받는 일을 정주영은 한 번 더 해냈다. 미군은 어이없는 주문을 했다. 내한한 아이젠하워가 부산 광안리 유엔군 묘지를 참배해야 하는데 주위가 너무 황량하다며 푸른 잔디를 심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한겨울에 푸른 잔디라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이런 주문을 받아 놓고 정주영은 이 공사 역시 역으로 실제 공사비의 세배를 달라고 했고 그렇게 계약을 맺었다. 그 길로 화물트럭 30대를 사방에서 끌어 모은 뒤 낙동강 일대 보리밭을 통째로 사서 파란 보리 포기들을 떠다 묘지로 옮겨 심었다.

살벌했던 묘역이 갑자기 푸른빛의 세상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이모작으로 겨울보리를 심는 나라에서 건설공사를 하는 한국의 정주영만이 해낼 수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미군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라며 감탄에 침이 마를 줄 몰랐다. 이후 정주영은 미8군 공병대로부터 전폭적인 믿음을 얻었고 결국 <현대건설>이 미 8군 발주공사를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는 한국전쟁이란 위기에서 빛나는 기회를 잡고 결실을 맺어 현대건설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주영은 남들처럼 미국에 유학하거나 대학에서 마케팅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무모하다할 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 8군과의 건설 계약에서도 알 수 있듯 거침없이 뛰어 들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 뚝심이야말로 그가 천재적인 경영 능력의 소유자임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천하의 정주영도 늘 승승장구할 수만은 없었다. 현대건설에 닥쳐온 한 차례의 위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누가 알았으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