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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건설서 쪽박' 비싼 수업료 내고 펑펑 울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⑦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모두가 반대하던 건설업, 정주영이 하면 성공한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던 정주영의 건설사업은 어려움 속에서도 착착 성공에의 길로 한발자국씩 접어드는 듯했다. 처음 얼마간은 미군의 절대적인 믿음 속에 미군 건설 공사를 독점해가면서 승승장구 하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정주영 앞에 또 하나의 시련의 강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36월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미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주영은 미군 공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부의 전후 복구공사에 뛰어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현대건설은 조폐공사가 발주한 고령교 공사를 수주했다. 물깊이가 무려 10m나 되는 곳에 열세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60m짜리 다리 몸체를 놓아야 하는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공사였다. 2년의 공사기간에 계약금액 5457만환이었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로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정부가 시급하게 놓아야만 했으며, 그때까지 정부 발주 공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기에 정주영은 복구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무작정 공사를 시작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 전 시미즈(淸水)건설 조선지점에서 풍부한 교량공사시공 경험을 갖고 있던 김영필을 상무로 초빙하여 현장소장으로 앉히고, 와세다공고(早稻田工高) 토목과 출신 이연술을 기술주임으로 영입해와 탄탄한 인적구조도 마련했다.  

그런데 공사는 처음부터 난관을 만난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상판까지 부서진 채 물 속에 잠겨 있었기에 복구공사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축공사라고 해야 할만 했다. 어려움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낙동강의 겨울은 수심이 얕았지만, 여름에는 물이 불어 겨울철의 몇 배만큼이나 깊어 공사하기가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장비 부족이었다.

이때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로 복구할 자재가 거의 없었음은 물론 장비라고 해봐야 20톤짜리 크레인 한 대, 믹서 한 대, 컴프레서 한 대가 전부였다. 이렇게 영세한 장비 탓에 공사의 대부분을 사람 손에 의지하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힘들게 세워놓은 다리는 홍수가 나자 허무하게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공사를 착공한 지 1년이 지나도록 교각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었으니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려움은 공사 자체만이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긴급통화조치령을 발표했는데, 화폐가치가 100원에서 1환으로 평가절하 되면서 1년 사이에 물가가 거의 120배 치솟으며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착공 당시 700환이었던 기름은 무려 2300환까지 뛰었으며, 40환이던 쌀 한가마 값도 2년 만에 4000환이나 될 정도였다. 덩달아 자재 값도 날마다 뛰고 일꾼들의 품삯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니 원래 영세한 자본으로 시작한 현대건설은 공사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다가 자금난까지 겹쳐 쩔쩔 맸고 공사장 인부들은 임금을 달라고 일손을 놓았다. 정주영은 아무 정신이 없었다. 일단 불을 끄고 보아야만 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날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 견주어 자금줄은 더욱 죄어져 갔다. 회사 직원들의 월급이 한두 달씩 밀린 것은 물론 사무실에는 매일 빚쟁이들이 몰려와 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니 맘먹고 유학 보냈던 동생 정세영에게 몇 달째 돈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주영 스스로도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로 세상을 헤쳐 나갔지만 당시는 앞이 깜깜해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고 털어 놓을 정도로 현대건설은 완전히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고로 공사하던 인부 하나가 죽었다. 현장에서 일을 돕던 매제 김영주는 죽은 시체와 함께 잠도 자야했다. 품삯은 밀린 데다가 사람이 죽었기에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일꾼들의 신경을 건드렸다간 언제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고 공사는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사업은 한때 망할 수도 있고, 또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신용은 한번 잃으면 모든 게 끝장이다.”라는 정주영의 신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 교령교 복구공사 현장

정주영은 동생들과 매제 김영주, 부사장인 최기호를 불러 놓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각자의 집을 팔기로 뜻을 모았다. 조상에게 차례를 지낼 집 한 칸은 있어야 한다는 동생들 주장에 정주영은 집을 내놓지 않고 대신 자동차 수리 공장을 내놓았다. 아우 정순영은 물론 매제와 부사장의 집도 팔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긴급자금 9970만환으로 설립당시 30만환이었던 현대건설 자본금을 모두 1억환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고령교 공사를 끌어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집을 팔아 끌어모은 자본금도 살인적인 통화팽창으로 곧 한계에 다다랐다. 끌어들일 수 있는 빚이라는 빚은 다 끌어 모았는데 이자가 한 달에 18퍼센트나 되었으니 1년이면 쓴 돈의 배를 이자로 내야 했다.  

그러자 현대건설이 미군공사에서 돈 버는 것을 배 아파하던 경쟁 업체들은 이러한 현대건설의 어려움에 빈정대는 소리를 쏟아 놓았다. 

뭘 알아야 하지. 무식한데 공기가 2년이나 되는 장기공사가 얼마나 어려운줄 알 리가 있겠어?” 

무식한 정주영이 하는 계약이 그렇지. 일괄계약에 리스크를 계산에 넣을 리가 없었지.” 

그동안 미군공사에서 잘해 먹었는데 손해 좀 봐도 괜찮지 않아 

심지어는 직원들 가운데서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견디다 못한 아우와 부사장 등이 조심스럽게 이젠 공사를 접자고 말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불 같이 화를 냈다. 

아니 공사를 접자고? 정신이 있는 소리야?” 

손해가 눈덩이처럼 자꾸 불어나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어려운 줄은 나도 알아. 하지만 공사를 중단하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거고, 약속을 어기면 우리의 신용은 끝장나는 거야. 그럼 모든 걸 잃게 된다는 것도 몰라?”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하는 말이지요.” 

다시는 공사를 안 하고 끝낼 작정이라면 모르지만, 그만두는 건 말도 안 돼. 아니, 설령 건설업을 접더라도 일단 약속한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끝내야 돼. 중간에 그만두고 믿음을 잃으면 이제 그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가 없어.” 

결국 정주영의 고집에 고령교 공사는 계속 됐다. 19555월 마침내 악몽 같았던 공사가 끝났다. 애초 계약보다 2달이 늦었다. 총수주액의 반이나 되는 6500여만 환의 엄청난 적자를 보고야 말았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현장 장비를 철수시킬 기력도 없을 지경이었다. 빚쟁이들은 여전히 그의 사무실과 집으로 몰려 들어와 아우성이었다. 고령교 공사에서 생긴 빚을 갚는데 20여 년이나 걸렸다고 할 정도로 정주영은 엄청나게 비싼 수업료를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게 손해는 아니라 생각했다. 건설업은 장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것이 이때에 얻었던 가장 큰 공부였다. 또 덕분에 내무부가 현대건설에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현대건설은 믿을 수 있다.”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천성이 낙천적이었던 그는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 정주영은 동생과 매제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어렵사리 고령교 공사가 끝난 어느 날 아침 정주영은 매제와 아우의 집을 찾았다. 매제와 정순영은 초동 다리 옆에다 말 그대로 판잣집을 짓고 들어가 살고 있었다. 세를 얻을 돈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본 정주영의 가슴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부자 되면 큰 집 사줄게.” 

정주영의 말에 아우와 매제가 울고, 정주영도 따라 울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