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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세심당(洗心堂) 백홍인 선생 《북유시집》에 감동하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37]

   
▲ 《북유시집(北遊詩集)》을 쓴 세심당 백홍인 선생(1874~1952)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중학 동창 백승천으로부터 시집을 하나 받았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세심당 백홍인 선생(1874~1952)이 쓰신 한시 원문과 번역시가 실린 시집입니다. ‘북유시(北遊詩)’라고 하니까, 세심당 선생이 북쪽 지방을 유람하며 쓴 시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세심당 선생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는, ‘경고서사(警告書社)를 써서 친지, 문하생들과 호남 각 군의 서사에 돌리며, 의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 최익현 선생을 뵙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자 1905. 11. 23. 고향 보성에서 길을 떠나 장흥, 곡성, 남원, 전주, 충주, 옥천, 공주, 청양 등의 유림과 친지를 순방하고, 면암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는 1905. 12. 30. 귀향합니다. 북유시는 이 순례 기간 동안 쓴 220여 편의 시로, 세심당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쓴 시를 정리, 편집하여 1906. 1. 12. 북유시집을 만듭니다. 그 동안 북유시집은 한시집으로만 남아있어 일반인들의 열람이 어렵다가, 1986년 번역시집이 나왔고, 이제 그 시집이 제 손에도 들어온 것입니다. 

세심당 선생은 26세 때 좀 더 학문을 구하고자 면암 최익현 선생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됩니다. 면암과의 만남으로 세심당은 위정척사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 할 수 있었고, 나라를 생각하는 큰 유학자로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세심당이라는 호도 면암이 지어준 것입니다. 이후 세심당은 고향 부춘동에 장춘재(長春齊)를 건립하고, 후진 양성에 힘을 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합니다. 그런 세심당이기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심당은 면암 선생을 만나 20일간 나랏일을 걱정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뜻을 나눈 후, 면암선생의 뜻을 받아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또 돌아와서도 호남 각지에 근고팔도사민서를 전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심당은 호남의 큰 섬들과 제주도에도 근고팔도사민서를 전하려다가 장흥 왜헌병청에 체포되어 7개월 여간 옥고를 치릅니다. 그 때문에 면암은 세심당의 협력은 받지 못하고 1906. 6. 4.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결국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됩니다. 그리고 왜놈들이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 끝에 1907. 1. 1. 순국합니다. 북유시집의 말미에는 면암을 애도하는 세심당의 절절한 심정이 담긴 글도 실려 있습니다. 

1910년 드디어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 먹힙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세심당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세심당은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는 고향의 부춘산에 올라 북쪽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앞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의논합니다. 이런 세심당을 일제가 가만히 두겠습니까? 일경은 세심당을 체포하였다가 풀어준 후에는 감시의 눈길을 풀지 않습니다.  

   
▲ 세심당이 제자를 가르쳤던 <장충재(장춘재)> 전경
세심당은 이런 상황에서 속으로 울분을 삭히며 오직 장춘재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고종이 붕어하였을 때는 상경하여 문상하고 내려와,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려다 계속 감시의 눈길을 펼치고 있는 일경에 사전 체포됩니다. 세심당은 울분에 자결하려고 하지만 이 또한 가족들의 저지로 실패하고,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心火)에 눈을 상하여 평생 빛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일제 암흑기를 눈을 감고 버텨냅니다. 

물론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일경을 꾸짖으며 일체 일제와의 타협은 없었지요. 제자들은 1938년 이러한 강직한 세심당의 인품에 감복하여 강학(講學) 유지비를 세웠지만, 세심당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 선비에게 무슨 비냐며 유지비를 땅에 묻게 합니다. 그 전에 환갑 때도 주위에서 환갑 행사를 하려는 것을 못하게 했었구요. 결국 유지비는 1952년 세심당이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서야 다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북유시집을 건네받기 전까지는 친구 승천에게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어쩐지 승천에게 뭔가 강직한 성품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지요. 

그럼 이제부터 북유시집에 실린 세심당의 시에 대해 볼까요? 220여 편의 북유시를 다 여기에 선 보일 수는 없고, 그 중 약간의 시만 읽어보겠습니다. 물론 제가 한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한시 미학적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습니다. 북유시집에는 대체로 세심당이 집을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따라서 시가 실려 있습니다.

......
책상에 앉았으면 요순 때냥 한가해도
시국을 대하면은 시끄럽기 초한(楚漢) 세상
슬프다 이 나라의 운이 이미 갔단말가
밤새도록 잠 못 들고 이내 가슴 다 태우네. 

회포를 적다라는 시입니다.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이미 국권이 기운 것에 밤새도록 잠 못 들고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그러다 결심하고 북행길을 나섭니다. 

산골에서 글을 읽는 이름 없는 선비지만
멀리멀리 스승 찾는 한 치 정성 가슴 뛰네
.....
달빛은 줄다 찼다 오는 일을 짐작하고
구름은 일다 졌다 내 갈 길을 인도하네
시골 술 두세 잔에 이렇게도 취하는가
해가 지면 가다 자고 자곤 다시 가고 가리 

서재의 생도들을 남겨두고 떠나면서라는 시로, 제자들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는 심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시의 서두에 면암을 찾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고 하고 있네요. 

들리는 말 서울에는 다섯 귀신 나타나서
임금 팔고 나라 팔고 제멋대로 날뛴다네
마을 안 아녀자는 내 마음을 모르고서
겨울에 또 길 뜬다고 입을 모아 수군수군 

   
▲ 세심당(洗心堂) 백홍인 선생이 쓴 《북유시집(北遊詩集)》
마을 문을 나서면서라는 시입니다. 다섯 귀신이란 을사5적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녀자는 수군수군한다? 흐음~ 어찌 아녀자가 장부의 뜻을 알리오. ^^

...
두어 걸음 가다가는 다시 돌아 당부한 말
부모님 조석 봉양 네가 부디 힘써다오 

율리 모퉁이에서 아우와 헤어지며라는 시입니다. 형이 장도를 떠나는데 아우가 마을 모퉁이까지 전송을 나왔겠지요. 그리고 형은 부모님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동생에게 부모님 봉양을 재차 부탁합니다. 

십년 동안 서울살이 벼슬 맛이 씁쓸하여
시골에 와 술을 파니 텅 빈방에 벽뿐이야
웃으며 아내에게 그릇 씻어 주는 모습
한나라 때 사마상여 그 모습과 서로 같네 

세심당은 여행길에 어느 주막에 들렀는데, 마침 그 주막이 몰락한 양반이 운영하던 주막이었나보네요. 주막 주인은 전참봉이라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양반도 돈이 없으니 술집을 할 수 밖에요. 시에 나오는 사마상여(BC 179~117)는 전한의 관리로 그는 한 때 사랑하는 여인 탁문군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는데, 선술집을 차려 아내는 술을 팔고 사마상여는 접시닦이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심당은 전참봉의 모습을 보면서 사마상여를 생각한 것이지요. 

한 고을 마흔 여덟 마을마다 한가지군
걸음걸음 간 곳마다 잘 수 없다 거절하네
알 수 없지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게 될지
푸른 산은 높고 높고 저녁 해는 새빨갛고 

나라가 망하게 되니까 사람 인심도 고약해졌군요. 예전 조선이라면 길 가는 과객에게 잠자리 빌려주는 것이 예삿일이었을 텐데, 세심당이 마흔 여덟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한 집도 세심당을 자기 집에 받아주지 않네요.  

두 발꿈치 피가 서려 슬금슬금 걸어갈 때
마른 날씨 짚서기는 칼날처럼 날카롭다
조심 않고 걸었다고 말하지는 아니하고
다만 그저 나그네는 어매()아배() 불러보네 

세심당의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발로 걷기입니다. 이제 세심당도 오래 걸어 발꿈치에 피가 서리는데, 그런 발로 짚신을 신고 가려니 짚서기가 칼날처럼 발을 찌르는군요. 이 시 뿐만 아니라 방와치를 떠나자 신이 미어져 맨발로 걷다라는 시에서는 신발이 떨어져 아예 맨발로 겨울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진흙길이 괴롭다라는 시에서는 떨어진 버선 위론 진흙 솟아 올라오네라며 진흙길 걷기의 괴로움도 호소합니다. 자동차에 익숙한 현대인이 세심당과 같은 복장으로 세심당의 여정을 따라 걷는다면 과연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요? 저도 장차 부산까지 걸어보려고 생각중인데, 저 또한 세심당 선생과 같은 차림이라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북풍은 힘이 없고 비구름은 디룽디룽
가도 가도 산속 길은 오직 한 줄 가리마길
땅 거죽을 밟을 제면 얼음기둥 바삭바삭
쓸쓸하다 괴나리짐 길벗 없이 혼자 간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 대치 지름길을 넘다라는 시입니다. 주위엔 오가는 사람도 없이 오직 혼자서 발밑으로 바삭바삭 거리는 얼음기둥 소리를 들으며 길을 가는 세심당의 모습에 저의 가슴도 아려옵니다. 

천한 자가 제가 먼저 반말 걸어 벗을 하고
돈 많은 큰 장사를 웃손으로 인도하네...
온 세상이 흙탕물에 모두가 다 이런 무리
바라보니 한 나절을 어리둥절 방황했네 

으음~ 나라가 망하려니 상놈들도 세심당에게 반말로 말을 걸어오고, 돈 있는 자를 우선으로 치는군요.  

적성산 아침 해가 반쯤 산에 가렸더니
짙은 구름 열리면서 하얀 안개 땅을 덮네
그렇지 스승의 댁 이젠 얼마 안 남았지
나그네 길 쓰던 맛이 문득 변해 즐거웁네 

   
▲ 제자들이 1938년 세우려 했던 세심당의 강학(講學) 유지비. 이때 세심당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 선비에게 무슨 비냐며 유지비를 땅에 묻게 해 결국 유지비는 1952년 세심당이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서야 다시 세워질 수 있었다.
안성으로부터 억역재를 오르다라는 시에서 왔던 길 얼마이며 갈 길 또한 얼마인고 / 지팽이 괴고 서서 중도에서 한 숨 쉬네라던 세심당은, 이제 스승의 댁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쓰던 맛도 즐겁게 변합니다. 그리고 선돌 뒤 고개에서 스승님의 집을 바라보며에서는 한 지경 산과 물이 유난히도 아름다워 / 바로 우리 스승 즐겨 사신 곳이라네며 즐거워합니다. 희망이 세심당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란 중에 늦게 뵈어 부끄럽기 그지없네하며 송구스러움을 표시하면서, “[]>라는 시에서 임금은 욕이 되고 신하들은 망한 오늘 / 돌아가지 못하옵고 가르침을 청합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세심당은 면암을 만나고 20일간을 스승과 함께 하며,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굳센 다짐을 하며 다시 고향길로 떠납니다. 고향길로 향하는 세심당의 품에는 면암의 지시로 작성한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가 들어 있습니다. 세심당은 만약에 이 글 읽고 눈물 아니 흐른다면 / 임금도 애비도 없는 사람 아닌 짐승일레라고 합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세심당의 시는 계속 이어집니다. “장화로부터 옥곤에 이르다에선 양복 입고 왜말 하며 앞뒤 서서 가는 모습 / 개화란 게 옛것만을 허무는 게 이 아니냐라면서 이항로-최익현으로 이어지는 보수적인 화서학파의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백성의 노역으로 생긴 철로를 바라보며 어리석은 백성들이 돈을 탐내 울역하니 / 반년도 채 못 되어 차가 왕래 하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보수적인 유학자의 세상 인식의 한계를 보이기도 합니다.  

세심당의 시가 다 시국과 관련된 시는 아닙니다. 게 중에는 자연 그 자체를 노래한 것도 있습니다. 다음은 금강의 상류를 지나며라는 시입니다. 

금강수 맑은 물빛 마음 비춰 차가운데
푸른 벽에 지팡이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본다
한 쌍의 해오라비 훨훨 돌아 날아간 뒤
물결은 흔들흔들 해 그림자 둥글둥글 

시를 읽으면서 그 모습이 수채화처럼 그려집니다. 귀향길은 집 떠난 지 오래 되면서 몸은 지쳐가지만, 북상할 때 본 뱃사공을 다시 보게도 됩니다. “노점진에서라는 시입니다. 

객지 밥이 한 달이라 다리 힘도 후들후들
추운 하늘 물은 맑아 비 지나간 뒤로구나
배를 불러 타고 보니 뱃사람도 낯이 익고
편안하기 방에 앉아 글 읽는 것 같으구먼

 그리고 향수병도 도지고, 발이 아파 걷기도 힘들어집니다. “새벽에 덕은을 떠나는 길에서라는 시입니다. 

나그네 길 한 달이라 집 가고파 미치겠다
새벽 같이 길을 가니 몸이 한가하겠는가
진흙 뿔에 서리 내려 칼날처럼 날카로와
짚신 끊고 발에 닿니 정말 아파 못 견딜레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정담을 나누고, 웃음을 나누다보면 먼길도 힘들지 않게 지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세심당의 시는 단지 시국만 생각하고 기울어지는 나라에 울분만 토로하는 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섬세함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망해가는 나라에 세심(洗心)이 되었지만, 평온한 세상이었다면 세심(細心)한 시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고향집이 멀지 않습니다. “관호 도중에서 짓다라는 시입니다. 

우리 집은 다가오고 내 마음은 설레이네
해지기 전 어서 저기 저 고개를 넘어가서
위로는 양친 부모 아들 걱정 위로하고
아래로는 세 아우의 형 기다림 달래야지

 그리고 마을 문에 들어서며에서는 오솔길 솔숲에선 솔바람 피리 소리 / 세상인심 좋다 해도 내 마을만 못하였네라고 읊습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여행지가 좋다 해도 집보다는 못하지요. 그래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는 것 아닌가요? ^^ 드디어 세심당은 집에 도착하고, 부모님께 다녀온 인사를 합니다.  

마을 앞서 기다린 지 열흘도 넘었는데
어찌하여 오늘 밤 밤중에야
오는 거냐
지나는 길 병날까봐 다만 근심 이랬지만
스승을 저버리고 어디 갔나 걱정했다 

북당의 어버이를 뵙다입니다. 한겨울에 떠난 아들이 어버이는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속으로는 말리고 싶었겠지만, 대의를 위해 떠나는 아들이라 건강하게 다녀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돌아오지 않을까 하며 동구 밖까지 나와 찬바람을 맞아가며 열흘도 넘게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버이는 아들이 도중에 병은 나지 않았을까, 도적에 당하지는 않았을까 마음 졸이고, 한편으론 이놈이 스승을 뵈러 간다면서 딴 데로 샌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하! 어버이의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이런 것이지요.  

승천이 덕분에 오래간만에 한시집을 읽었습니다. 북유시의 세상을 따라가는 동안 세심당 선생의 뜻에 감복하기도 하고, 시의 정경에 미소 짓기도 하였습니다. 세심당은 큰 뜻을 안고 떠나간 북행길이었지만, 저에게는 또 한편으로 북유(北遊) 글자 그대로 시의 세상에 빠져 놀아본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