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장소 조선 성종 임금이 다스리던 1485년(성종 16년)에 한글 관련 큰 사건이 벌어졌다. 종로 시장 상인들 가운데 한글을 아는 이들이 오늘날 장관격인 호조 판서 이덕량의 동생 집에 한글로 그들을 비판하는 투서를 몰래 전달했다. 영의정부터 판서까지 고위 관리들이 종로의 도로 정비 사업을 한다며 제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내용이었다. 이덕량은 그것을 읽고 곧바로 성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에 성종은 판내시부사 안중경과 한성부 평시서 제조 등을 보내 상인들의 요구 사항을 듣게 했지만 끝내 한글을 아는 자들을 처벌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하층민에 속한 상인들도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종로는 1호선인 종로 2가역, 3가역이 있는 서울의 중심지다. 종로 3가는 3호선과 5호선도 서는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조선 시대 때도 전국에서 가장 번화한 시장이 있었던 자리다. 서울시는 옛날 시장터에 시전행랑을 복원해 놓았다. 사건 연보 1485/07/17(성종 16) : 호조 판서 이덕량 등이 시장 사람들의 언문 투서(익명서) 두 장을 바치다 1485/08/02(성종 16)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한글날은 2013년 공휴일로 지정된 뒤 그야말로 큰잔치로 자리 잡았다.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은 하루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서울뿐만 아니라 여주시, 세종시, 울산시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관련 행사가 꼬리를 문다. 2013년부터 이러한 한글날을 기리면서 온 국민이 한글날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하는 소책자(14.9*20.9cm)를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에서 펴내 해마다 인기를 끌고 있다. 해마다 다른 방식으로 2016년까지 다음과 같이 네 번 펴냈다. 주요 특징과 더불어 필자가 대표 집필하게 된 배경을 밝혀 보고자 한다. 이 책자를 펴내기에는 이제는 고인이 된 김혜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장이 한글을 위해 몸 바쳐 일한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어 고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3). 10+9. 문화체육관광부. 66쪽.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4). 3+5(12단 접이형). 문화체육관광부. ◐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8단 접이형).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2015), 문화체육관광부. ◐ 누구나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 역사의 상상 18세기 후기 정조(재위 1776~1800) 시절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1815), 정약용(1762~1836) 등 많은 실학자들이 세검정에서 회합을 갖고 몇 가지 조정에 건의할 강령을 채택하고 정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정조의 개혁 정치가 더욱 힘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서인의 보수 정치에 주춤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행동에 난선 것이다. 실학의 진정한 학문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거대한 역사의 발걸음이었다. 일부 평민들도 동참했다.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중종 때 어숙권이 건의했다가 실패한 책방 설치를 전국 주요 도마다 최소 하나씩 설치한다. 둘. 지식과 정보를 쉬운 문자와 책으로 보급하고 나누고자 했던 세종 정신을 시대정신으로 삼는다. 셋. 한글을 주류 문자로 채택하고 단계적으로 실록도 한글로 적고 모든 공문서도 단계적으로 한글로 적는다. 넷. 공공 교육 기관에서 다루지 않은 한글 교육을 서당과 향교부터 단계적으로 정규 교과로 다룬다. 다섯. 한글 문학을 장려하고 기존 한문 문학을 한글로 번역한다. 정조도 익히 마음에 둔 정책들이라 이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책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세종 임금이 아무리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어도 1894년 고종이 국문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된 공식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훈민정음도 공식문자였다는 것이다. 한자 다음의 비주류문자였지만. 국어교과서처럼 공식 문자가 아니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공식문자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공식적이라는 것은 제도나 법으로 규정하거나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공식 제도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왕실에서 만들고 나라에서 펴낸 《사서언해》와 같은 책에서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 헌법과 같은 조선 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한글을 국가 공무원 시험이라 할 수 있는 과거 시험 과목으로 정했고 또한 삼강행실도와 같은 국가 윤리서를 한글로 옮겨 백성들에게 알리게 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라의 중심인 임금들은 모두 한글 문서를 나라 정책으로 활용했다. “《삼강행실》(예의범절 규범서)을 언문(훈민정음, 한글)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집안의 어른, 어르신, 또는 서당의 스승들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라. 만약 삼강행실 가르침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
▲ 《세종대의 음성학》, 한태동(2003), 연세대출판부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98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537돌 한글날 기념 학술 강연회에서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라는 당시 연세대 한태동 교수의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국어학자들이 규명하지 못했던 훈민정음의 음악 배경에 관한 발표였기 때문이다. 이 발표는 한태동(1985).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 나라글 사랑과 이해(국어순화 추진회 엮음). 종로서적. 214-266쪽.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98년에는 世宗代의 音聲學이란 단행본으로 출판(연세대출판부)되었고 2003년에는 한태동 선집 4권으로 다시 펴내면서 《세종대의 음성학》으로 거듭 출판되었다. 신학자의 발표라 더욱 흥미를 끌었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전반기는 암울한 시대였다. 캠퍼스는 늘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고 상아탑은 자주 술렁거렸다. 운동권이냐 비운동권이냐는 이분법의 아픔은 있었지만 서로가 시대의 고민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학생들의 학구열은 식지를 않았다. 그 가운데 명강의에 대한 열풍이 있었다. 역시 연세대에도 3대 명강의가 있었는데 그 중 으뜸이 한태동 선생의 기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시는 날로 팽창하고 있다. 2030년까지를 도시 건설 완공 목표로 착착 진행됨에 따라 실제 거주 인구가 2015년에는 전년대비 30%이상 증가하여 2016년 3월 현재 인구 227,025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는 양적 발전에 걸맞은 세종시의 위상을 세우는 일을 좀 더 고민할 때이다.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도시다운 세종 정신으로 내실을 다지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세종과는 아무 관계없이 ‘세종’이 들어간 수많은 상호들과는 격이 다른 ‘세종’의 이름값을 해야 할 의무가 세종시에 있다. 사실 세종시는 처음부터 한글 디자인과 우리식 건물명 등을 통해 세종 정신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세종 정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침 이춘희 세종시장과 이충재 행복건설청장 모두 세종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물론 이 문제는 지도자 의지만으로 이뤄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세종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여 세종시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종시에 세종학 대학원대학교 설립을 제안한다. 세종학은 세종대왕에 대한 인물론부터 그가 남긴 업적과 계승 문제를 연구하는 일종의 융합학문으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위인들의 태몽은 위인전의 첫머리를 장식하곤 한다. 필자도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고 위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태몽을 어머니께 여쭈었다가 기억이 안 난다는 어머니 말씀에 낙담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위인 중의 위인 세종의 태몽이 궁금했다. 이러 저리 찾아보니 여럿 기록들에 세종의 어머니인 민씨(훗날 원경왕후)가 햇무리 한가운데 세종이 앉아 있는 꿈을 꾸고 세종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 조사해 보니 사실 이 꿈 이야기는 태몽이 아니라 세종이 네 살 때인 1400년 2차 왕자의 난 때 어머니 민씨가 꾼 꿈이었다. ▲ 이방원의 비 민씨(뒷날 원경왕후)가 꿈을 꾸니 햇무리가 있었고, 그 안에 막동(세종)이 앉아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세종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5년째 되던 1397년에 태어났지만 곧바로 정치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자라난다. 두 살 때인 1398년에 아버지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 방번’ 두 이복동생과 정도전 쪽 사람들을 없애는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는 물러나고 1398년에 정종이 즉위하고 1400년에 이방원이 친형인 이방간 파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월 15일은 북한의 한글날인 조선글날로 훈민정음기념일이라고도 한다. 북한이 이 날짜로 삼은 것은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자에 이 달에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어 12월 가운데인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월 15일이다. 남한은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1446년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기념일을 기리는 것이 분단의 상처일 수는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일, 반포일 모두 소중하니 남북이 서로의 기념일을 존중해 준다면 오히려 통일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창제일을 언제로 정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창제일이 소중한 것만은 분명하다. 창제가 있었기에 반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는 인류 문화사에서 가장 큰 혁명이며 기적이었다. 더욱이 세종이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 담긴 역사적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세종대왕 어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아직도 많은 국민은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창
[한국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전 세계에서 제나라 말과 글로 이름을 짓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식 한자는 분명 우리 것이지만 지금 국어기본법에서 정한 우리글은 아니다. 한자 없이는 언어생활을 할 수 없는 일본도 일본말을 중심으로 이름을 짓되 한자를 빌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예 한자 옥편에서 무슨 자 무슨 자 따다가 짓는다. 이런 방식을 비판하면 사람들은 내게 어이없다고 하거나 국수주의자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래서 한글 이름 짓기 혁명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주장하는 한글이름짓기는 기존의 순우리말로만 짓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지금 우리나라 이름짓기 방식은 한자 옥편에서 따다 짓는 방식과 순우리말로 짓는 한글이름 방식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 당연히 두 방식을 따르되 한자 옥편에서 따온 이름도 한글로만 표기하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상어로 짓거나 한자어, 고유어 가리지 말고 융합식으로도 짓되 한글로만 표기하자는 것이 한글 이름 혁명의 주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방식을 수용하여 이름짓기 방식을 다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분류] 어원과 글말 표기로 본 한국의 사람이름 짓기 분류 (1) 한
[한국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계에서 문자 기념일을 갖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다만 남한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려 10월 9일을 한글날로, 북한은 창제한 날을 기념일로 삼아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기리고 있다. 이렇게 남북의 한글 기념일이 다르다 보니 마치 분단의 상처처럼 보이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살릴 필요가 있다. 한글날은 10월 9일로 가되 창제일은 문자 기념일로 삼아 기린다면 여러 가지 유용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글은 세종이 비밀 연구 끝에 1443년 음력 12월에 공표하고 그 뒤에 일부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문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하다 보니 창제한 날과 반포한 날이 확연히 다르게 되었고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15세기는 음력을 사용하고 지금은 양력을 사용하니 날짜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포한 날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날인데 세종실록에서 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 책이 완성되었다고 했고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9월 상순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확한 특정 날짜는 아니지만 세종실록 기록과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이 일치한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