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은 창극 <패왕별희>를 11월 11일(토)부터 11월 18일(토)까지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동명 경극을 원작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패왕 항우와 한나라 황제 유방의 대립, 전쟁에 패한 항우와 연인 우희의 이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19년 4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초연과 같은 해 11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재공연 모두 전 회차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4년 만에 돌아온 창극 <패왕별희>는 대극장인 해오름극장으로 무대를 옮겨와 한층 광대해진 규모와 촘촘해진 완성도로 관객과 만난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는 손끝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경극과 소리에 우주를 담아내는 창극의 결합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나라 안팎 으뜸 제작진과 국립창극단이 의기투합해 제작 초기부터 화제를 모았다. 작품의 연출은 대만의 배우이자 당대전기극장 대표로 경극의 현대화 작업에 천착해 온 우싱궈가 맡았다. 작창ㆍ작곡ㆍ음악감독에는 창극 <정년이>, <나무, 물고기, 달>, <흥보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두 물줄기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경기도 양평 들머리의 두물머리, 곧 양수리(兩水里)는 오래전부터 서울의 뚝섬이나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이름난 나루터였다. 그러나 팔당댐이 완공됨에 따라 고기잡이나 선박의 건조가 금지되고, 배가 오고 가지 못하게 되면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를 비롯하여, 강가에 늘어서 있는 수양버들, 나이 400년의 느티나무, 그리고 해넘이 모습 등은 너무도 아름답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리고 있어서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그 많은 문화행사 가운데 오는 10월 22일(일) 낮 12시부터 4시까지 두물머리 나루터에서 펼쳐지는 <황포돛배야, 두물머리 강변에 살자>라는 잔치가 있다. 이 잔치는 벌써 19번째가 되며, 전옥희 명창이 지회장으로 있는 (사)배뱅이굿보존회경기도지회가 주최하고, (사)배뱅이굿보존회가 주관하며, 양평군ㆍ양서면ㆍ양평문화재단ㆍ양평문화원ㆍ(사)향두계놀이보존회ㆍ(사)한국국악협회의 후원으로 펼쳐진다. 특히 이 잔치는 2023년 양평군 지역특성화 문화예술행사ㆍ축제 지원사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호패(戶牌ㆍ號牌)는 조선시대 16살 이상의 남성들이 차고 다니던 신분증입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호패 재질도 달랐습니다. 2품 이상의 관리는 상아로 만든 아패(牙牌)를, 3품관 이하 관리는 뿔로 만든 각패(角牌)를, 그 이하의 양민은 나무패를 착용했습니다. 재질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도 달랐습니다. 차는 사람의 이름, 출생 연도, 만든 때, 관(官)이 찍은 낙인(烙印)은 공통 요소지만, 상아ㆍ각패에는 나무 호패에 있는 신분과 거주지 정보가 없고 대신 과거 합격 시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호패를 보면 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정보는 관직으로는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오르고 품계로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받은 18세기 고위 관료여서 상아 호패가 있지만, 젊었을 때 차고 다니던 나무 호패도 있지요. 나무 호패에 새겨진 것을 보면 이정보가 계유년(1693)에 태어났고 20살인 임진년(1712)에는 동부학당(東部學堂)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한성 5부 가운데 동부의 숭교방 1계 6통 4가에 사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6세기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왜가 침략하여 조선과 명이 참전한 동아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 따위를 통해서 그 전쟁ᄋᆖᆯ 더듬어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는 그 책들 말고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련된 여러 책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된 오희문(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은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동안 쓴 개인 일기지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함, 피난민의 삶, 군대 징발과 군량 조달, 양반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상 따위가 담겨있지요. 오희문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그의 아들 오윤겸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그밖에 국립진주박물관에는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임진ㆍ정유재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 이로(李魯)가 김성일의 활동을 중심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2008년~2009년 남양주 별내 택지개발사업 터의 무연고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모두 52건 71점 가운데 사료적 값어치가 있는 10건을 국가민속문화유산 「남양주 16세기 여성 무덤 출토복식」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번에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복식 유물은 16세기 중기 복식 연구 자료로서 값어치가 높으며, 당시의 복식과 장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撚金絲)*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16세기 단령*이나 원삼* 등 남녀 예복용 포에 사용했던 옷감을 하의인 치마에 활용하였다는 사실이 처음 발견된 사례이자, 해당 치마의 겉감을 이루는 사운문(四雲紋)* 등을 통해 구름무늬의 특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지요. 이 밖에도 양반층 여성들이 예복으로 입은 ‘장삼(長衫)’ 역시, 그동안 출토된 형태가 젖힌 깃인데 견주어, 곧은 깃으로 제작한 여성용 습의*로 희소성이 있고, 장삼에 쓴 넓은 띠인 ‘대대(大帶)*’ 또한 상태가 양호하여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부 부 - 정낙추 온종일 별말 없이 풀 뽑는 손만 바쁘다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엔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릿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농사를 지으며 사랑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세월을 살고도 부끄러움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쓰는 부름말은 ‘임자’였다. 요즘에는 ‘주인’이라는 한자말에 밀려서 자리를 많이 빼앗겼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임자’는 본디 ‘물건이나 짐승 따위를 제 것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여느 이름씨 낱말이다. 아내는 남편을 “임자!” 이렇게 부르고, 남편도 아내를 “임자!” 이렇게 불렀다.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임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에게 매인 사람으로 여기고 상대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조금도 높낮이를 서로 달리하는 부름말을 쓰지는 않았다. 토박이말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김수업 선생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은 가리킴말(지칭어)로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아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씨구나 절씨구야 돈 봐라 돈 봐라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 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돈 봐라” 이는 판소리 흥부가 가운데 <돈타령> 대목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흥보가 우선 배고픔을 면하려고 박을 타다가 돈이 쏟아지자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라며 정신 없이 반기고 있습니다. 흥부만이 아닙니다. 요즘도 날마다 신문에는 ‘돈, 돈, 돈’ 하며 돈 얘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 없으면 못살 세상이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고 한다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그런데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많은 돈에 욕심냅니다. 재벌 그룹이 탈세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예를 종종 봅니다. 여기 <돈타령>에도 그런 대목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고 좋아 죽겠네. 일년 삼백육십일을 그저 꾸역꾸역 나오너라.”라고 소리합니다. 그러나 뒷부분을 보면 흥보는 돈 욕심만 부리지 않습니다. 흥보는 “부자라고 자세를 말고 가난타고 한을 마소. 엊그저께까지 박흥보가 문전걸식을 일삼터니 오늘날 부자가 되었으니 이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옥션은 오는 10월 24일 저녁 4시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제175회 미술품 경매’를 연다. 출품작은 모두 98점, 총액 약 92억 원이다. 특히 이번 경매에서는 조선시대 달항아리, 희소성 높은 고서화와 고지도, 고려청자, 근대 공예품 등을 선보여 주목받는다. 이번 ‘제175회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조선시대 백자대호 곧 <달항아리>다.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만한 양감과 꾸밈없는 형태, 담백한 유백색의 피부가 돋보이는 출품작은 47.5cm에 이르는 큰 크기에도 전체적인 비례가 적당해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달항아리 가운데 40cm 이상의 크기는 주로 왕실행사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값어치가 높음에도 그 수는 국보, 보물을 포함해 20여 점에 불과할 정도로 적다. 지구촌 시장에서도 이러한 <달항아리>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와 9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출품작과 비슷한 시기 제작된 달항아리가 출품돼 각각 약 60억 원, 47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크리스티 출품작의 높이는 45.1cm, 소더비 출품작의 높이는 45.2c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부여씨(夫餘氏)가 서남 지역을 차지하여 백제(百濟)라 하고, 박(朴)⋅석(昔)⋅김(金) 씨가 동남 지역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三國)이다.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펴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하고 발해(渤海)라 했으니,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한다. 마땅히 남북국(南北國)의 역사책이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펴내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는 영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책 《발해고(渤海考)》 서문 일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삼국시대를 잇는 역사로 통일신라시대가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유득공은 김씨가 남쪽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했고 그 북쪽은 고구려 사람 대씨(대조영)가 차지하여 ‘발해(渤海)’라 하였으니 당연히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후 대 씨가 망하자, 대 씨가 차지했던 북쪽 땅은 여진족이 들어가고, 또는 거란족이 들어갔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날 어느 마을에 문자 쓰기를 몹시 좋아하는 선비가 살았다. 어느 날 처가에 가서 자는데 밤중에 범이 와서 장인을 물어 갔다. 집안에 사람이라고는 장모와 내외뿐인 터라, 어쩔 수 없이 선비가 지붕에 올라가 소리쳐 마을 사람을 불러 모았다. ‘원산대호가 근산 래하야 오지장인을 칙거 남산 식하니 지총지자는 지총 래하고 지창지자는 지창 래하소! 속래 속래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먼 산 큰 범이 와서 우리 장인을 앞산으로 물고 갔으니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들고 나오고 창을 가진 사람은 창을 들고 나오십시오! 어서요. 어서!> 뜻인즉 이렇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누가 총이며 창을 들고 뛰어나올 것인가?“ 윗글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과 우리말대학원장을 지낸 고 김수업 선생의 《우리말 사랑 이야기 “말꽃타령”》에 나오는 글입니다. 글깨나 배웠다고 어려운 한자말로 소리쳤는데, 아무도 뛰어오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지요.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77년이 되는 한글날입니다. 그때 세종대왕은 한문에 능통하여 다른 글자가 필요 없었지만, 한문이란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백성사랑으로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