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제주의 삼별초 유적지들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제주도 전 지역이 삼별초 유적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항파두리성을 비롯하여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환해장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회에 소개한 화북의 송담천과 동제원도 빼 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역사의 현장과 유적들이 많이 훼손되어 살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처럼 소중한 유산은 없다. 또한 제주의 크고 작은 항포구들은 삼별초뿐만 아니라 역사시대 수많은 해양 세력들이 이용했던 중요한 관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옛 포구도 산업화에 밀려 옛 정취를 찾아보기에는 너무도 아쉬움들이 많다. 이러한 포구 유적들은 제주인의 삶 속에서 애환들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여기서 기록에 나타난 중요한 포구들을 열거 하면 화북포 조천포, 함덕포, 성산포, 조공포, 애월포, 명월포 군항포 등을 들 수 있다. 화북포(禾北浦) ▲ 삼별초 뱃길탐험을 위해 화북포를 출항한다. 제주시 화북동의 화북포는 별도 북쪽에 있는 포구로 베린냇개 또는 별도포라고 불렀다. 포구와 인접한 곳에는 화북진성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뭍(육지)과 뱃
[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삼별초의 유적과 유물들은 강화도, 진도, 제주에 이어 오키나와 까지 분포되어 있다. 몽골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삼별초,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삼별초는 강화를 포기하고 진도와 제주로 퇴각했는데 700년 전 고려의 보트 피플일 수 있다. 고려의 왕도를 지키려 했던 마지막 만월대는 폐허로 변했다. 해양제국의 후예들은 뿔뿔이 흩어져 최근에 발굴되는 유적과 유물에서 이들의 발자취를 찾는다는 것은 현실이 너무도 아쉽기만 하다. 고려의 뛰어난 건축예술들을 타임캡슐 속에서 겨우 만나는 듯하다. 현재 만월대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 가운데 한 부분이기도 하다. 남북이 힘을 모아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만월대와 고려 박물관을 2002년에 찾아 갈수 있었다. 성균관 자리에 있는 대성전 건물에 박물관을 열어서 고려의 숨결들을 한 눈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개경성 ▲ 개성 만월대 발굴 사진(문화재청 제공) ▲ 개성 만월대 발굴 전 사진(문화재청 제공) 삼별초의 태동을 가져왔던 궁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숨결을 만
[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1271년(원종 12년) 5월, 진도가 여몽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탐라로 이동한 김통정은 1년여 지난 1272년 3월부터 전라도 연안에 대한 군사 활동에 이어서 차츰 충청․경기 서해 연안으로 세를 확장하면서 개경까지 위협하는 본격적인 공략을 펴 나갔다. 또한 1273년에 들어서자 몽골군이 주둔해 있던 경상도 연안까지 세력을 확대할 정도로 전 국토로 세를 키워 나갔다. 삼별초는 이처럼 여러 섬과 고을들뿐만 아니라 군현 관아까지 공격하여 수령을 잡아가자 고려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별초의 세력 확산으로 개경정부는 위협을 느껴 곧바로 전함병량도감을 설치하여 삼별초 공격에 맞섰다.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항쟁결의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항파도성의 축성 1271년(원종12년) 11월, 고려정부는 이창경과 문선열을 원나라에 보내서 탐라에 들어간 삼별초들이 남해 여러 섬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 장차 이들은 육지로 상륙할 염려가 있으니 섬멸에 적극 나서달라.라고 요청할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처럼 삼별초는 탐라에서 벌이는 싸움과는 별도로 영호남 섬 뿐만
[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원종 12년(1271) 삼별초가 진도에 상륙하여 본격적인 왕국을 건설하기 전부터 탐라의 거점 확보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고려 관군과 삼별초 별동군 사이에 벌어진 동제원을 중심으로 한 송담천 전투가 잘 말해 주고 있다. 고려 관군도 삼별초의 기습 상륙에 대한 사전 정보들을 미리 알고 있어서 그 공방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배하기 전에 선발대의 제주 상륙은 이들의 해양력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속성이다. 삼별초는 동서 남해안 섬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서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상대의 허를 찔러서 거점을 선점 하는 것은 어느 전쟁에서도 만나는 상황들이다. 관군과 삼별초의 관건은 진지 구축에 있었다. 두 세력이 물러 설수 없는 방어 수단이다. 삼별초와 환해장성(環海長城) 환해장성은 말 그대로 해안선을 따라서 섬을 길게 두른 긴 성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정부가 삼별초의 상륙을 막기 위해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1270년 9월부터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다. 성의 길이가 120여 킬로미터로써 제주도 전체 해안선, 절반에 가깝다. 해안 절벽을 제외하고 배가 닿기 쉬운 곳이라면 장성을 쌓은 것이다. 제주의
[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1952m에 달하는 한라산을 망망한 바다에서 목격하는 것은 항해자에게 희망봉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대 항해자들은 이러한 크고 작은 지형지물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항해자에게 목표물이 시인거리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목표물은 항해자들에게 자신들의 위치 확인은 물론 항로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과 중국으로 왕래하는 선박들은 한라산을 중요한 항로 결정에 목표물로 삼았다. 이러한 항해는 연안 항해에서 먼 바다로 진출하는 대양 항해 시대로 연결 되고 있다. ▲ 고려의 호국투혼 700년 뱃길탐험 삼별초(삼별초)라고 쓰인 펼침막을 건 삼별초뱃길탐험선 한반도에서 세계로 뻗어 가려면 제주도는 항로상에서 중요한 길목이며 교두보가 되고 있다. 중국의 산동성강소성절강성과 대마도, 고토열도로 이어지는 고대 항로가 일찍부터 활발한 왕래가 있었던 것은 한라산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요소 때문이다. 제주도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주호는 마한 서쪽바다 한가운데 있다. 사람들은 키가 작고 언어는 한국어와 같지 않다. (중간 줄임) 옷은 위만 입고 아래
[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제주도는 항해학적으로 한반도와 중국․일본으로 이어지는 항로상에서 중요한 등대와 나침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에서 삼별초의 해상 활동은 해상 왕국, 탐라의 위상을 찾아 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삼별초의 마지막 활동 무대가 제주로 알려 졌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른 신세계를 꿈꾸며 오키나와 유구왕국(流球王國)의 탄생 주역일 가능성을 뒷받침 하는 증표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에 따른 연구와 관심들이 높아진다. ▲ 제주 항파두리항몽유적지 제공 ▲ 제주 항파두리항몽유적지 제공 2007년 제주 국립박물관에서 탐라와 유구(琉球) 왕국 해양문물교류특별전은 이러한 가능성을 점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 때 전시된 유물 가운데 연하문와당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 高麗瓦匠造)라고 새겨져 고려 장인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수막쇠와 깨어진 기와장은 주목 받기에 충분 하였다 고려 관군과 유라시아를 정복한 세계 최고의 몽골 제국에 맞서서 고려를 지키겠다는 삼별의 발자취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출발 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사라진 유일한 대형 집단으로 떠오른 해양 세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