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화성성역의궤(華城城域儀軌)》는 정조(正祖)가 구상한 신도시인 화성(華城) 성역 조성 전 과정을 기록한 종합 보고서입니다. 화성은 정조가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관아와 민가를 팔달산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한 신도시로, 1794년(정조 18)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9월까지 32개월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공사 기간은 원래 10년을 계획했지만, 정조의 각별한 관심과 조정의 적극적인 역할, 막대한 자금 투입, 치밀한 설계, 근대적인 공법 등 당시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공사 기간이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이러한 공사의 계획, 운영 과정, 참여자, 소요 경비, 자재, 공법, 도면 등 화성 축성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설(圖說)」에는 건축 도면을 연상시킬 만큼 성곽과 부속 건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으로 훼손된 화성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일괄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화성성역의궤》,는 2016년 보물 제1901-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조의 뜻에 따라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널리 배포된 의궤 정조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두 번째 서울인 지안[集安]에 세워져 있습니다. 비는 높이 6.39m, 폭 1.35m~2m로, 채석(採石)하고 난 몸돌을 적당히 여기저기 다듬었을 뿐 네모반듯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글자를 새긴 비면조차 판판하게 다듬지 않았습니다. 비의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각 면에는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그 안에 다시 세로로 길게 선을 그어 각 행을 구분하였습니다. 4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碑)의 현재 상태는 원래 모습 그대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건립된 지 천수백 년이 지나면서 자연 마모된 것에 더하여, 19세기 말 재발견된 뒤 표면에 가득 낀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렀기 때문에 비면(碑面)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후 비면에 석회를 바른데다가, 탁본을 거듭하며 훼손이 계속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비면에 대한 화학적 보존처리는 비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때문에 현재는 비면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본래의 글자[字劃]를 알아보기 힘든 곳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비문의 본래 글자
[한국문화신문 = 정석현 기자]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500여 회에 걸쳐 중국에 파견 ▲ 《영대기관첩》 제목, 강세황, 조선 1784년, 종이에 먹, 23.3 × 54.8 cm 조선시대에 국경을 건너 남의 나라 땅을 밟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행(使行)은 타문화를 접하는 공식적인 통로로 거의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 사행단의 규모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역관(譯官), 의관(醫官), 화원(畫員) 등 정관(正官) 30여 명을 포함하여 3백 명 내외에 이르렀다고 하며,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500여 회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수백 명이 함께 중국으로 출발해서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조선에 돌아오기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리는 대장정의 길이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천자(天子)에게 조공 간다는 의미를 담아 ‘조천(朝天)’이라 하였고, 청나라 때는 연경(북경을 말함)에 가는 일이라 하여 ‘연행(燕行)’이라 하였습니다. 조천과 연행 모두 ‘중국 사행’을 뜻하는 말이지만, 연행에는 조공관계를 생략하고 좀 더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자 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