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길 떠나기야 봄날이 좋지 세포마다 꽃눈이 피어 온몸이 근질근질할 때 경산 지나 청도 운문사쯤으로 길 떠나 보라 ... 변준석 '봄길1' 복잡한 서울을 떠날 수 있다면 운문사 가는 길이 좋겠지만 우리네 서울에 매인 사람들은 거기까지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시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이 걷기 좋은 봄날에 어디 가까운 데가 없을까? 그렇구나! 봄바람이 잘 부는 강변으로 가보자. 한강 변 꽃바람이 가장 좋은 곳이 어디랴? 약간의 산이 있어야 바람을 느끼기 쉬울 것이다. 너무 낮은 바람은 일상에 피곤한 우리를 스르르 잠재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 바람은 머리를 식히고 가슴을 열어주어야 제격이지... 그런 만큼, 가슴으로 불어와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내 발길을 한 강변으로 끌고 왔을 것이다. 찻길 옆이라 자동차가 달리고 매연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찻길 넘어 푸른 물에 가 있고 꽃바람을 맞으니 마침내 우리 가슴에 봄날이 왔음을 알겠다. 드디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목소리도 깨어난다. "야! 봄이구나." "야! 너희들 다시 왔구나!" "다들 어디 갔다 왔는가? 다들 잘 계셨는가?" 길옆에 돌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말과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사고(思考) 또한 말 곧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언어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확한 언어의 사용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끔 글을 씁니다. 생각이 문장으로 정리되는 것이지요. 문장은 사회적 약속입니다. 약속이 틀어지면 뜻도 어긋나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린 아침에 인사할 때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하루는 될 수 있는 주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가 맞는 표현이겠지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린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유(幽)’와 ‘명(明)’을 달리했다.”라는 말은 생(生)과 사(死)를 달리했다는 말로서 ‘幽’는 어둠ㆍ밤ㆍ죽음ㆍ저승ㆍ악ㆍ무형ㆍ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고 ‘明’은 밝음ㆍ낮ㆍ삶ㆍ이승ㆍ선ㆍ유형ㆍ지혜로움 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은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난다는 의미의 좋은 사자성어지만 물리적으로 일곱 번 넘어지면 일곱 번밖에는 일어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에 나온 노래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입니다. 이희철 어르신의 회고록 《못다 이룬 귀향의 꿈》에 나온 노래들을 음미하다가, ‘목포의 눈물’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1999년과 2000년에 목포지원에서 근무할 때 이 노래를 많이 들었거든요.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인지라, 유달산에 오르다 보면 이난영 노래비가 있고, 그 노래비에서는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지요. 그 당시 저는 아침 운동으로 노적봉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유달산 일등바위까지 뛰어오르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어 뛰다 서다 하였는데, 나중에는 한 번도 안 쉬고 일등바위까지 오를 수 있더군요. 그때마다 이난영 노래비 앞을 지나쳤고, 오래되어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국가무형문화재 거문고 산조 예능 보유자 이재화 선생님을 처음 뵈러 갔던 날이 생생하다. 온화한 미소와 꿰뚫어 보시는 듯한 눈빛, 단호하나 정 있는 말씀 속에서 거문고와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여러 사정으로 거문고 실기 전공에서 이론 전공으로 노선을 바꾼 나였지만 지금까지도 나의 첫사랑, 거문고를 손에 놓고 있지 않은 까닭은 거문고가 주는 깊은 울림과 멋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호기심은 석ㆍ박사 학위논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거문고를 미취학 아동에게 가르쳐 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하여 어린이용 거문고를 제작하고 아동들에게 적용을 해보면서 개량 거문고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더욱 깊어져 갔었다. 그러나, 아무 지식 없이 악기의 길이만 줄여서 어린이용 거문고를 제작했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후 이러한 아쉬움을 박사논문에서 개량 거문고 “화현금(6현 거문고에서 줄을 늘린 것)”에 대한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의지로 현재 거문고 앙상블 더 거문고의 대표이자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에 계시는 이선희 선생님의 소개로 이재화 선생님을 처음 찾아뵙게 되었다. 거문고 개량에 대한 역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 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풍기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짝지어 줌이라. 은근한 마음으로 사랑의 노래를 보내니 신랑 각시가 되어 신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만생 장필성 근정 (p.26) 그대에게 권하노니 선녀를 만나는 꿈은 생각지 말고 힘써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소서. 채봉 이런 ‘단호박 거절’을 당한 선비의 운명은? 결론을 말하자면, 잘 풀렸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단,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채봉이 기생이 될 정도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말이다. 우연한 만남, 운명 같은 사랑, 갑작스러운 시련, 재회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사랑 이야기는 무수한 이들이 밤을 새워 읽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요즘같이 로맨스 소설이 넘치는 시대에, 그래봤자 옛날 사랑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을까 싶지만 《채봉감별곡》은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다. 박진감 넘치고, 반전도 있으며, 생각보다 재밌다. 이 재미의 상당 부분은 여주인공의 당찬 성격에서 나온다. 운명에 순응하는 지고지순한 양갓집 규수가 아닌, 기생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옛 정인을 찾는 적극적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초 채봉은 평양성에 사는 김 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세계 제1의 갑부는 누구일까? 전기자동차 회사인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1971년 생)는 마이크로 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와 아마존을 창업한 제프 베조스를 제치고 2022년에 세계 1위의 갑부가 되었다. 2022년 8월 기준으로 그의 재산은 2,600억 달러에 달했다. 머스크는 1971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교육받고 성공한 기업인이다. 일론 머스크는 2016년 멕시코 국제 우주 회의에서 깜짝 놀랄만한 계획을 발표했다. 2026년까지 화성에 사람을 보내고 (이 목표는 2029년으로 연기되었다) 이어서 2050년까지 화성에 100만 명을 이주시켜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화성에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머스크의 이러한 화성 이주 계획은 그저 무모하다고 웃어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다. 화성에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하겠다는 머스크의 꿈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다. 2002년 6월, 머스크는 민간 우주항공 기업인 스페이스X를 설립하였다. 머스크가 스페이스X를 설립하면서 세운 목표 가운데 하나는 우주선 발사 비용을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이었다. 우주 산업 개발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지만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일본 큐슈의 무사들이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국제사회에 문을 연 뒤 먼저 추진한 사업이 북해도를 농업기지로 바꾸는 계획이다. 유신 8년만인 1876년에 삿포로 농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것도 그 하나인데 이때 2기생으로 입학해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을 열심히 받은 2명의 동급생이 있었으니, 바로 우치무라 간조(內村監三 1961~1930)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5년 만에 이 학교를 졸업한 뒤 3년 뒤 자비를 들여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신학공부를 하다가 귀국해 고등학교 영어 선생을 거쳐 1897년에는 한 신문의 영어판 주필이 되어 일하면서 잇달아 영어로 된 글들을 발표한다. 1900년에는 《성서연구》지(誌)를 창간하고 1901년에는 《무교회(無敎會)》라는 잡지를 펴내면서 무교회주의 사상을 전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이미 영어로 자기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고도 남을 수준이 된 우치무라는 1894년에 《Japan and The Japanese》(日本及び日本人)란 제목으로 책을 쓰고는 이 책을 1908년에 《Representative Men of Japan》(代表的日本人)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봄은 섬진강으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섬진강 강가에 매화 농원이 죽 이어져 있어 길 이름도 매화로이고 봄이 되면 활짝 핀 매화가 봄을 재촉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섬진강에는 두꺼비 석상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섬’자가 두꺼비 ‘섬(蟾)’을 쓰기 때문인데요. 고려 1385년에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그 뒤로 섬진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매화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백제 왕인의 시에 매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매화나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설중매(雪中梅)’라고 하며 이른 봄 눈을 뚫고 피어나는 지조와 품격을 지닌 꽃이기에 사군자의 으뜸 위치에 놓여 있는 꽃이기도 하지요. 아직 쌀쌀하고 추운데 죽은 듯 한 가지 사이로 예쁜 꽃이 핀 것을 보면 생명의 신비에 경이감이 느껴집니다. 매화는 꽃의 색에 따라 홍매화ㆍ분홍매화ㆍ청매화ㆍ백매화로 분류하는데 매실을 얻기 위해서는 백매화를 심어야 합니다. 약 열흘 상간에 벚꽃이 피기도 하여 많은 사람이 벚꽃과 매화를 혼동하기도 하는데 벚나무는 키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제대로 된 한옥 사진집을 발견했다.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의 사진기자였던 이동춘과 경희대 주거환경학과 교수였던 홍형옥이 합작한 사진집, 《한옥ㆍ보다ㆍ읽다》가 그 책이다. 한옥의 멋과 매력을 한껏 담은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에 담긴 한옥을 설명하는 글 또한 으뜸이다. 모르고 보면 ‘한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알고 보면 한옥만큼 다채롭고 개성이 살아 있는 우리 문화도 없다. 월간지 기자로 일하며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글쓴이는 자유기고가로 독립한 뒤, ‘내 것’을 찍기 위해 고심하다가 마침내 전통문화를 화두로 삼았다. 그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한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월간지 시절 찍었던 한옥 사진과 자유기고가 시절 찍은 사진, 그리고 홍형옥 교수의 설명에 어울리는 한옥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 찍은 사진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공들여 찍은 사진이 많은 만큼,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풍부한 사진과 자세한 해설이다. 내용이 알차면서도 편집을 공들여 한 덕분인지 잘 보이고, 잘 읽힌다. 한옥이란 어떤 집이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오늘날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빨간색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빨갈 수가 없다. 보통 빨간색 꽃은 햇빛에 비쳐서 분홍으로 보이기에 십상인데 이 꽃은 빨강이 너무 진해서 오히려 검은색이 섞여 있는 듯하다. 해마다 이맘때쯤 봄소식을 겸해 자주 소개되는 구례 화엄사의 홍매이야기다. 그래 이 매화는 홍매가 아니라 흑매란다. 그래도 사람들은 홍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게 잘못되었다고 누가 시비를 할 것인가? 보통 우리가 매화의 덕을 찬양하고 가까이하려는 것은, 매서운 겨울 추위를 뚫고 홀로 꽃피는 것으로 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는 고매한 인격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인데, 이때는 맑은 흰색, 우유빛의 매화를 생각한다. 그러다가 제법 봄기운이 우리 몸에도 느낄 때가 지나면 이 지리산의 귀한 여배우는 그 농염한 자태를 자랑하며 우리에게 정말로 봄, 그것도 화려한 잔치로서의 봄이 왔음을 알려주지 않던가? 흔히 우리나라의 4대 매화라고 하면 순천 선암사 선암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구례 화엄사 들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 등 네 군데 매화를 일컫고 그것들이 2007년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각각 지정되었기 때문인데, 이때 지정된 매화나무는 들에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