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화용도 좁은 길에서 만난 조조와 관우의 “살려 달라.”와 “칼 받으라.”의 싸움이 처절하게 펼쳐졌다는 이야기, 조조와 그의 모든 장졸들이 모두 다 꿇어 엎어져, 앙천(仰天) 통곡을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관공의 어진 마음, 조조를 쾌히 놓아주고, 돌아와 공명께 법대로 처벌하기를 요청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공명이 내려와 관우의 손을 잡고 회답하기를 “조조는 죽일 사람이 아닌 고로 장군을 보냈으니 그 일을 뉘 알리요.”라고 답을 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판소리 <적벽가>의 주요 대목은 이제까지 소개한 바와 같이 조조와 관우가 만나게 된 화용도 대목을 비롯하여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군사 설움타령’, 적벽강 싸움‘ 등으로 구분이 되는데, 유파에 따라서는 조금씩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 않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은 글자 그대로 풀밭 속의 오두막집을 세 번째 돌아본다는 뜻으로 숨어 사는 현명한 사람을 임금이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 만난다는 말이다. 임금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만들 위인을 얻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는 말이다. 이 대목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건안12년(20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그의 초막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지요. 그때 제갈량은 유비보다 21살이나 어렸으니 아들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관우와 20년, 장비와는 15년의 격차를 보입니다.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지요. 그런 제갈량의 집에 유비는 묵묵히 세 차례나 찾아갑니다.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유비가 삼국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것도 제갈량이라는 지혜로운 자에게 전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제갈량의 의견과 판단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는 유비의 삼고초려의 영향이 큽니다. 유비ㆍ관우ㆍ장비는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된 사이입니다. 두 아우 관우와 장비는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제갈량의 지시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겠지만 형이 삼고초려로 해서 어렵게 얻은 인재니 그 말을 따라주는 데 주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유비의 삼고초려가 없었다면 관우ㆍ장비와의 불화로 인하여 제갈량은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겸손하게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고 믿어준 자의 편입니다. 지도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