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문화재

아픈 역사를 간직한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

고종(高宗)이 1897년 10월 환구단에서 제사 지내고 황제 즉위

[우리문화신문=글, 사진 이영일 기자]  환구단(圜丘壇, 사적 제157호)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원구단(圜丘壇, 圓丘壇) 또는, 환단(皇壇, 圜壇), 원단(圓壇) 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제천행사는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高宗)이 1897년 10월 12일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

 

 

 

 

 

환구단을 건립한 2년 뒤인 1899년(광무 3)에는 환구단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세우고 환구제의 주요대상인 하늘 신[황천상제-皇天上帝], 땅 신[황지기-皇地祇], 그리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등의 신위판을 모셨다. 삼층의 목조건물인 황궁우는 언덕 위로 우뚝 솟아 있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의 장소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준다.

 

황궁우는 팔각 월대 위에 지어진 팔각 평면의 건축물로 기둥 또한 팔각이다. 외부에서는 3층 구조로 보이나 내부 중앙부는 통층으로 꾸며져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두 마리의 팔조룡(八爪龍)을 조각하였다. 팔면에 설치된 문과 창은 소슬꽃살로 장식하고, 바깥기둥 사이로 물결과 연꽃무늬[파련각-波蓮刻]를 새긴 낙양을 설치하여 건물에 화려함을 더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붉은색으로 ‘구(丘)’자 글씨가 새겨진 다양한 제기와 ‘환구축판(圜丘祝板)’이라고 새겨진 축판이 전해지고 있다.

 

삼층 팔각건물 황궁우(皇穹宇)는 현재 환구단이 조성된 2년 뒤인 1899년(광무 4년) 환구단 북쪽에 건립하여 원형제단과 하늘신위패를 모시는 신위판(神位版)을 모시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졌다.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통층으로 각 면에 3개씩 창을 냈으며 중앙 상부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칠한 원추형의 지붕을 설치하고 천장의 일곱 개 발톱이 달린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황궁우는 황천상제, 곧 천신을 비롯해 지신, 그리고 해신과 달신, 별신 등 여러 신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였다.

 

1903년에 마지막으로 완성되었는데, 환구단은 3층의 원형제단, 이를 둘러싼 사각형의 담장으로 구성된 환구단 영역, 아치형의 삼문을 통해 환구단과 접해 있으며 원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궁우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국 베이징의 천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석고(石鼓, 돌북)는 1903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3개의 기념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몸통에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당시의 으뜸 조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받침대와 함께 남아 있으나 시침 역활을 하는 부분이 사라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성립과 출발을 같이 한다. 1895년 일본에 의해 왕비 민씨(명성황후)가 피살된 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고종은 1년 만인 1897년 2월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는데 이제는 조선에서도 황제를 칭하자는 주장에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고 이를 반포하는 행사를 치렀다.

 

그런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시설을 만들자는 주장이 대두되어 환구단의 축조에 나섰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 사신들의 숙소가 있던 경운궁과 가까운 남별궁 터였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뜻 있는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자주독립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환구단은 1913년 일제에 의해 헐리고 그 터에 조선경성철도호텔(지금의 웨스턴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어 옛 환구단이 아니라 부속 건물인 황궁우만 남아 조선호텔 정원처럼 되어있는 실정이다. 환구단의 정문이자 조선 호텔의 정문으로 쓰던 문이 우이동의 그린파크 호텔에서 발견되어 제자리가 아닌 시청 광장 쪽에 복원되었다.

 

대한제국 제천의례 '환구대제'는 과거 조선의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국가적 행사로 고종 황제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부활시켰는데 일제강점기에 폐지됐지만 2008년 복원돼 해마다 열리며 2014년 10월 12일 재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