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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한강물은 밤낮으로 도도히 흘러가는데

퇴계를 떠나보내는 고봉과 명사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3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江漢滔滔日夜流(강한도도일야류) 한강물은 밤낮으로 도도히 흘러가는데

先生此去若爲留(선생차거약위유) 선생의 이번 걸음 멈추게 하고파라.

沙邊拽纜遲徊處(사변예람지회처) 모래밭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서성이는데

不盡離腸萬斛愁(부진이장만곡수) 애간장 녹는 이별과 무거운 슬픔 가눌 길이 없구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계(1501~1570) 선생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쓴 시입니다. 퇴계는 젊은 임금 선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왔다가, 1569년 3월 4일 선조의 만류에도 다시 고향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번에 낙향하면 다시는 상경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도 퇴계는 그다음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에 대유학자를 볼 수 있을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조정의 관리들과 유학자들이 퇴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였습니다. 퇴계는 길을 떠나 한강을 건너기 전 몽뢰정(夢賚亭)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이때 평소 퇴계를 존경해오던 고봉도 몽뢰정으로 퇴계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몽뢰정은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조선 전기의 문신) 선생이 동호(東湖)변 지금의 옥수역 근처에 지은 정자입니다. ‘동호’라고 하니, ‘서울에 그런 호수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동호대교가 가로지른 한강 유역을 특히 동호라고 부릅니다. 한강 물길에서도 특히 이 유역은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하여 동호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동호대교가 강북으로 건너간 곳에 있는 동네가 옥수동인데, 옥수동에는 독서당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젊은 문신들이 업무를 떠나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하였는데, 중종 때는 옥수동에 독서당을 지어 사가독서를 허가받은 문신들이 아예 이곳에서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사가독서제라면 요즘 같으면 안식년이라고 하겠네요. 옥수동이 옥같이 맑은 물이 나온다고 하여 옥수동(玉水洞)이라 하는데, 독서당도 그런 옥수 근처에 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봉은 몽뢰정에서 퇴계와 작별하는 것이 못내 아쉬워 같이 배를 탑니다. 물론 단둘만 탄 것은 아니고, 배에는 고봉처럼 퇴계의 귀향을 아쉬워하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셋째 연에서 고봉은 모래밭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서성인다고 합니다. 퇴계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고봉의 마음이 시구에 녹아 들어가 있네요. 그러나 결국 닻줄은 풀렸고, 그러자 고봉도 퇴계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넷째 연에서 고봉은 애간장 녹는 이별과 무거운 슬픔 가눌 길이 없다고 하였지요. 좀 과장된 표현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만큼 고봉은 퇴계를 존경하였습니다.

 

‘퇴계와 고봉’ 하면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까? 퇴계는 자신의 학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새까만 후배의 도발에 건방지다고 여기지 않고 진심을 갖고 자기 의견을 고봉에게 보내지요. 그러면서 둘 사이에 8년 동안 논쟁을 이어온 것이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입니다. 고봉은 이러한 퇴계를 진심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러한 고봉의 마음이 위 시에 녹아있는 것이지요. 고봉의 이러한 시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합니다.

 

列坐方舟盡勝流 (열좌방주진승류) 배에 나란히 앉은 이 모두가 명사들

歸心終日爲牽留 (귀심종일위견류) 돌아가려는 마음 종일 붙들려 머물렀네

願將漢水添行硯 (원장한수첨행연) 바라건대 한강 물 떠서 벼루에 담아 갈아서

寫出臨分無限愁 (사출임분무한수) 이별의 무한한 시름 써내고 싶어라

 

고봉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짓기는 하였지만, ‘배에 나란히 앉은 이 모두가 명사들’이라고 하여 자신을 전송하려고 일부러 배에까지 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군요. 한강 물 떠서 벼루에 담아 갈아서 이별의 무한한 시름 써내고 싶다는 시구에서 퇴계는 단순히 학문에만 매진한 게 아니라 시인의 마음도 품고 계셨네요.

 

고봉뿐만 아니라 배에 탄 다른 사람들도 퇴계를 전송하는 시를 썼는데, 그러는 사이 배는 봉은사 쪽 강 건너 나루에 닿았습니다. 퇴계가 고향 안동으로 가려면 계속하여 한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충주에서 내려, 죽령을 넘어 영남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고개 남쪽 지방이라고 하여 영남(嶺南)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퇴계는 계속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었으나, 봉은사에서 하룻밤 더 머무릅니다. 이때 고봉은 이대로 퇴계와 헤어지기 싫어 봉은사에서도 하룻밤 더 머뭅니다. 대유학자 퇴계와 고봉, 그들이 나이를 잊은 교분을 나누며 지냈던 봉은사의 하룻밤은 진정 아름다운 말로 넘쳐났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