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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배’ 유감


각종 행사 때나 친목의 모임 때마다 건배를 하는데 그 구호가 너무 다양하여 오늘은 무어라고 구호를 붙여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건배, 위하여,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다리이가(경상도 사투리), 조통세평(조국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노털카(놓지도 말고 털지도 말고 ‘카~’하지도 말자) 등등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종류가 많다.(중략) 필자는 이런 구호들의 선악에 대한 시비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건배의 구호를 ‘건배’ 하나로 통일하자고 제안한다. 우리의 다양함도 좋지만 만세삼창이나 건배 같은 구호는 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미국은 ‘치어스’, 중국은 ‘간패이’, 일본은 ‘간빠이’ 한 가지로만 변함없이 쓰듯 우리도 ‘건배’ 하나만으로 통일하자. ‘위하여!’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끝에 ‘건배’를 한 번 더 쓰자! - 이재윤 건배유감(乾杯有感)-

건배할 때 쓰는 구호에 대한 의견들은 전부터 많이 나왔다. 위 예문처럼 ‘건배’ 구호를 하나로 통일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으며 설사 하나로 통일하자 해서 그것이 통일될는지는 미지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에서 부딪치는 술잔과 함께 묻어 나오는 건배 구호는 그야말로 천차만별 그 자체라 파악조차 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흔한 건배 구호 몇 개를 보자.

사우나 : 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변사또 : 변함없는 사랑으로 또다시 만나자
당신멋져 : 당당하게 살자, 신나게 살자, 멋지게 살자, (때로는) 져주며 살자
진달래 :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개나리 : ‘계(개)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Relax & Refresh 하자’(회식용)
지화자 : 지금부터 화목한 자리를 위하여

끝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또 만들어지는 건배 구호를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이자 세태풍경이기도 하다. ‘건배’라는 멋없는 말로 통일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말로 건배 구호를 하는 것이 어쩜 더 좋을 일인지 모른다.

곰곰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온 ‘감빠이(건배)’ 문화는 썩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위아래도 없이 술잔을 부딪치는 이런 문화는 결코 유쾌한 문화는 아니다. 아비와 자식 사이에, 사제지간에, 선후배 사이에 딱딱한 격식을 갖추라는 말은 아니지만 요즈음 술자리에 가면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버릇없는 장면이 눈에 자주 띈다.

‘감빠이’로 통일해서 쓰는 일본 사람들은 사제지간에 술자리에서 맥주잔을 부딪쳤을 때도 서로 마주 보며 술을 마신다. 한국인이 동석하여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느라고 술잔을 옆으로 해서 마시는 것을 보면 곧잘 의아해한다. 이런 일본인들에게 ‘한국인들은 스승이나 선배 등 웃어른 앞에서는 몸을 약간 돌리고 술잔 역시 정면을 피해 마신다.’고 답하면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좋은 문화’라고 부러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점잖은 유교문화의 틀 속에서 술잔을 마주한채 쨍하고 소리 나도록 부딪치는 정서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문장에 이의무(李宜茂, 1449-1507) 문집인 <연헌잡고, 蓮軒雜稿,1696년>에 보면, ‘건배(乾杯)’라는 말이 보인다.

秋盡遙天碧 가을이 다해가니 아득히 먼 하늘은 푸르고
霜深落木多 서리가 깊어지니 잎이 진 나무가 많다
乾杯上淥 말린 차를 마시려고 찻잔에다 (차를) 거르고
梳短鬢邊皤 짧아진 머리 빗질하니 귀밑털이 희도다
鹿仆狂馳險 사슴은 엎드려 있다가 미친 듯이 험난한 곳으로 달려가고
禽飛誤觸羅 새는 날다가 잘못 그물에 부딪힌다
謀身今若此 몸을 꾀함이 지금 이와 같고
浩浩一長歌 호탕하게 한바탕 장가(장편의 노래)를 부른다
                            -네이버 지식-

여기서 건배는 요즈음 술 마실 때 쓰는 일본말 감빠이(건배)가 아니다. 한시에서 5언시는 2,3자(字)로 나누어 해석을 해야 함으로 ‘飮乾 /杯上淥’으로 보아야한다. 곧, ‘乾’은 차로 마시기 위해 만든 말린 차 종류이며 ‘杯’는 찻잔의 뜻이라고 봐야한다. 위 예에서 보듯이 우리겨레는 ‘건배’라는 말은 썼지만 구호용 말로는 쓰지 않았다. 값싼 말 대신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며 품위 있게 마셨던 것이다.

‘건배’를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1. 술잔의 술을 다 마셔 비움. 2. 술좌석에서 서로 잔을 들어 축하하거나 건강 또는 행운을 비는 일.’이라는 말로만 되어 있을 뿐 ‘일본말’이라는 말은 없다. 일본국어대사전<大辞泉>에서는 ‘杯の酒を飲み干すこと。特に、喜びや祝福の気持ちを込め、杯を差し上げたり触れ合わせたりして、酒を飲むこと。’ 번역하면, ‘술잔의 술을 다 마심. 특히 기쁨이나 축복의 마음으로 술잔을 건네거나 술잔을 마주치며 술을 마시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어느 사전이 어느 사전을 베낀 것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좋은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환영할 일이지만 위아래도 없는 ‘감빠이’ 문화는 어딘지 씁쓸하다. 과장이나 사원이 함께 술잔을 부딪치고 선후배도 알 수 없는 술 문화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상당히 평등하고 화목한 분위기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지금부터라도 술 마시는 자리에서 ‘감빠이(건배)’ 대신 “지화자 / 좋다” 같은 말로 서로 흥을 돋아보는 것은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