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유성룡의 목소리가 갈라져 피가 토해질 것만 같았다. 권율은 조선의 권력가인 영의정 유성룡이 평소와는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성룡의 열변에 대하여 권율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조선의 장군으로 답변했다. 왕실을 수호하는 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고, 그 길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백성과 왕권, 나라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싶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서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권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장군 권율의 기개가 아직도 눈가 주변에 푸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도원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이제 다시 일본의 대대적인 공세가 예상되는 시점입니다. 특히 수군이 문제외다. 아시고 있지만 현재 삼도수군을 통제하는 장수는 원균수사요. 그가 이 나라 조선과 백성을 구명할 수 있는 장수로 여기고 계시오? 유성룡의 표적이 거기에 있었던가. 원균장군이 미덥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요. 난 그를 훌륭한 장수로 여기고 있소이다.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조선의 장군이지요. 하지만 이순신장군이 지키는 바다는 평화롭게 느껴지고, 원균장군의 바다는 종잡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도원수 권율도 인정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기자] 마침 명나라 원군이 도달해 있으니 병사들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나 그들과의 연합전략이 승패를 가르지 않을까 싶소이다. 명나라는 일본과의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지 않자 대규모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고 있었다. 권율의 미간에 엇박자가 나고 있었다. 불만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명군은 천군(天君)이라 하여 오만하고 무례하지요. 그들에게 당당한 조선의 기개를 확인시켜 주고 싶으나 우리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니 억울한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내 어찌 모르겠소이까. 서애 유성룡은 노기가 끓고 있는 권율을 다독여 주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들과 군사들의 행태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보고를 이미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특별한 묘안은 없었다. 다만 명나라 장수에게 명군의 패악(悖惡)에 대한 경종(警鐘)을 정중히 요구할 뿐이었다. 명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조선에 유람을 온 유람객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어떤 때에는 일본군보다도 더 극심한 만행을 양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권율의 하얀 수염이 형용할 수 없는 노기로 인해서 뻣뻣하게 굳어졌다. 조선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이 어인 행차시오? 서애 유성룡의 방문은 전혀 의외였다. 권율은 의관을 급히 살피면서 한 걸음에 달려 나갔다. 유성룡은 빙그레 말없이 웃으며 도원수 권율에게 수인사를 건넸다. 왜적의 준동이 심상치 않으니 도원수의 심기(心氣)가 얼마나 불편하시겠소. 유성룡의 형식적인 인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의정 신분의 유성룡이 사전 예고도 없이 도원수를 찾아 온 것은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그것이 무엇인지 권율은 궁금했고 또 불안했다. 일전에 탈영을 감행했던 부하 병사를 즉결처분하는 과정에서 탄핵(彈劾)을 받아 지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재차 기용되기는 하였지만 중앙의 정치라는 것이 탐욕(貪慾)과 간교(奸巧)함으로 무장되어 당파(黨派)의 대립 사이에 불꽃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얼음장처럼 냉각되어 파멸될 수도 있음을 체험한 터였다. 이 사람의 심사(心事)가 무엇 중요하겠소이까. 임진년의 실수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임진년의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불과 이십 여일 만에 한양을 적들에게 내주었던 일을 말 함이었다. 그때는 왕 선조와 대신들이 평양과 의주로 각기 도주하기가 바빴었다. 만일 의병과 명나라, 이순신의 함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위대한 목숨이란 단어에 누르하치는 힘을 주었다. 김충선의 생명을 가치 있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김충선의 목숨과 일패공주와의 혼사를 명국과 비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누르하치의 시각에서 발생하자 결코 우습지도 않았고, 가볍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소신의 생명을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이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대는 이제 짐의 사람인 것을! 황공하옵니다. 그런데 정작 너의 영혼은 조선의 이순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어떠하냐? 너의 답변을 듣고 싶구나. 누르하치는 집요한 구석이 존재했다. 일패공주가 김충선의 궁색한 모습을 대변하고 나섰다. 아바마마, 그 사람의 청혼을 수락하셨다면 이제 그를 자유롭게 하소서. 속박을 하시는 것은 칸답지 못하신 처사이옵니다. 누르하치는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와 이순신의 관계에 대하여 일패로부터 많은 보고를 받았다. 이제 조선의 이순신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때의 김충선은 여전히 그다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소신의 우상이옵니다. 누르하치의 표정이 급변했다. 우상이라고 했느냐? 이순신 장군은 소신의 양부(養父)이옵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대단한 물건이로구나. 단순 용맹한 무장이 아니다. 개똥같은 지략만 머릿속에 담고 있는 선비도 아 니고.......넌 대관절 누구냐? 일패공주를 아내로 삼기위해 천 리 멀리 달려 온 조일인 김충선이옵니다. 조일인, 김충선! 짐이 여진을 통합하여 만주(滿洲) 구룬(國家)이라 호칭 할 것이다. 이것은 짐이 숭상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님으로부터 점지 받은 새 국호인 것이다. 만주의 한자음이 바로 문수이다. 문수보살은 대지(大智) 보살로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신성하고 지혜로운 공덕의 신이시다. 너에게 기회를 주마. 아직 통일되지 않은 여진의 남아있는 부족을 문수지혜와 공덕의 무력으로 통합하여라. 짐의 만주를 우선 완성하라! 그리하면 너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주마. 김충선은 머리를 조아렸다.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일패공주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찔끔 흘렀다. 감사합니다. 칸이시여! 너의 안목에 찬사를 보내주마. 반드시 여진을 통일하여 위대한 만주국을 완성하겠나이다. 그리하여 명나라를 도모하는 날을 하루라도 앞당기겠나이다. 일패공주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누르하치는 그런 일패공주를 가만히 일으켰다. 너 또한 그에게 현혹된 것이냐?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누르하치는 스스로 반문하는 형국이 되었다. 방금 전만 하여도 김충선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여진을 방문한 목적을 사적인 행위로 규정하였다. 그것은 얼마나 졸렬한 짓이며 비겁한 짓인가?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 변절하는 것은 군자답지 못한 행위로 소인배나 하는 일로 여기는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직감을 확신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이번에는 오히려 김충선이 누르하치의 견해를 반발하고 나서지 않는가. 이 작자는 당연히 누르하치의 생각에 백 번이고 동조해야 마땅한 노릇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든지 교활하게 간이고 쓸개고, 어디든지 달라붙을 위인으로만 생각 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번에는 누르하치를 상대로 배짱을 부린다. 분명히 대답 올릴 수 있습니다. 조선은 정복하기가 진정 불가능한 나라이옵니다. 여진이 조선을 주적으로 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옵니다. 굽어 살피옵소서. 감히 여진의 칸에게 맞서려는 것이냐? 칸이시지요. 암요, 당연히 칸이 되어야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한 행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고약한 위인이었다. 어설프게 측정 할 수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누르하치는 물론이고 일패공주의 안면에 가득 의혹이 떠올랐다. 틀렸다고? 황송하옵니다만 그것은 칸의 속단이었다고 감히 말씀 올리겠나이다. 누르하치의 조그마한 눈빛에서 섬광이 일렁거렸다. 좋다. 너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들어 보겠다. 목숨을 연장하고자 거짓을 발설한다면 단순히 수급을 베는 것이 아니라 팽형(烹刑)을 집행하여 그 육신을 새들의 먹이로 뿌리게 될 것이다. 팽형이란 형벌은 글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을 끓는 물에 삶아 죽인다는 것이니 극단의 극형이라 할 수 있었다. 일패공주는 일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누르하치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번복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칸의 절대적인 권위였다. 아, 부디......! 일패공주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김충선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지 않은가. 그러나 김충선은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누르하치를 향해 말했다. 소신은 감히 엎드려 칸에게 용서를 빌고자 달려왔습니다. 용서라니? 김충선이 그 자리에 부복하였다. 소신이 목숨을 걸고 아뢰옵니다. 소신이 조선 땅에 들어와 일패공주마마를 뵙고 사모와 흠모의 마음이 하늘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그 순간에 일패공주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손끝에서 파르르 경기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간절한 눈빛으로 누르하치를 올려다보았다. 그 어인 명령이시옵니까? 살려둘 수 없다고 말하였다. 아바마마? 조선을 모르느냐? 네가,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느냐? 금방이라도 망할 듯 망할듯하면서도 다시 불꽃처럼 파랗게, 놀랍도록 시퍼렇게 살아나는 것이 저들이다. 그들 민족의 뿌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도록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내분으로 다툼이 왕성하다가도 외부의 세력이 준동하게 되면 또 다시 하나가 되어 무서운 저항을 벌리는 것이 저들이다. 소녀가 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저 자는 이제 조선인이다. 누르하치는 김충선을 손가락질 하였다. 그렇지만 김충선은 어떤 변명도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묵하였고, 이것이 유일한 방도라고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누르하치의 목적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김충선을 거부하는 것은 분명했다. 정확히 아뢴다면 그는 조일인이지요. 조선과 일본을 조국으로 둔 위인이란 말이지. 그렇사옵니다. 난 사전에 우리의 가장 막강한 적으로 남을 조선 장수를 응징하고자 하는 것이다. 날 가로막을 생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그가 성공하였습니다. 일패공주는 흥분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칸을 향해 말했다. 누르하치는 단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라 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패륵이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환하게 웃었다. 대단한 감동이었소. 김충선은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행이옵니다. 만족을 드려서. 그러자 불쑥 누르하치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가늘게 찢어진 눈이 더 사납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짐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김충선이 황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소신이 불민하여 칸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니 널리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량을 베푸시어 어리석은 소신에게 혜안을 내려주소서. 일패공주는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절대 김충선이 잘못한 것이 없지 않은가. 칸의 노여움은 대관절 어디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애가 탔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누르하치의 피를 이어받은 여진의 공주다웠다. 당신은 여전히 아둔하군요. 아버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소. 난 나의 실수를 모르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나의 실수를 지적해 주시오. 일패공주는 살짝 부친의 눈치를 살피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앞
[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누르하치를 비롯한 김충선과 일패공주, 패륵왕자의 시선이 깜찍하면서도 도발적인 홍타이시에게 집중 되었다. 홍타이시는 입을 삐죽거렸다. 이러다가 깜깜한 밤중이 되겠어. 그럼, 정말로 독수리 사냥 구경을 할 수 없는 것이잖아. 난 강궁으로 독수리를 사냥하는 광경을 보고 싶단 말이야. 그건 정말 흥미 있는 구경거리니까 난 꼭 보고 말테야. 후금의 칸이 될 누르하치는 어린 왕자에 대하여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래, 무릇 장부란 뜻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는 법이지. 우리 멀리 조선에서 오신 귀하신 손님의 재간을 감상 하도록 하자꾸나. 일이 커진 느낌이었다. 이제는 누르하치가 참관하게 되니 김충선으로서는 더 이상의 궁색한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성공 했다면 나 역시 성공할 것이다! 김충선은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충선의 손에 들려있는 칸의 강궁으로 모아졌다. 특히 누르하치를 졸라서 이 자리에 데려 온 홍타이시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 거리면서 김충선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흡! 김충선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황금색 화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