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후기 한국의 불교는 화엄경을 위주로한 교종에서 금강경을 위주로한 선종으로 바뀌어 갔다. 교종(敎宗)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에 따른 경전화 된 교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수행하여 이땅에 부처님이 이룩하고자 한 화엄불국토를 이루고자 한 것이 목적이라면, 선종(禪宗)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궁극적 깨달음을 구하여 스스로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다시 말하면 선종은 팔만대장경 경전 속 가르침 보다는 앞서 깨달은 선사들 처럼 스승으로 부터 받은 화두를 추구하여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풀기 위하여 좌선수행을 위주로 하는 선수행 불교다. 이런 선수행 위주의 불교는 일찍이 부처님 당시부터 인도에 있어왔지만, 선종이 화려하게 꽃피운 때는 당나라시절(600년대) 경전을 통한 불교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던 한 나뭇꾼이 시장에 나무를 팔러왔다가 어떤 스님이 읊조린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서 바로 부처님의 깨침을 얻은 뒤의 일이다. 그 나뭇꾼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당대 수백명의 제자를 거느린 선종의 대가인 홍인대사의 문하에 들어 갔다. 그런데 행자시절 방앗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불교공부도 좌선수행도 하지도 못하던, 그는 홍인대사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량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부여에 있는데, 부여 읍내에서는 좀 떨어진 곳 외산면에 있다. 무량사는 말 그대로 무량수불(아미타불의 다른 명칭으로 수명이 한량없이 길다는 의미의 부처로,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절이다. 사람들은 이승에 살다가 죽어 저세상으로 갈때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보통 동쪽에서 뜬 태양이 서쪽으로 가듯, 사람의 생명도 어린시절은 이제 해가 막 떠오르는 동쪽을 의미하고, 살다가 늙게되면 해가 동 → 남 → 서로 가는 것처럼 죽은 뒤에는 서쪽으로 넘어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서쪽에는 극락세계가 있으며 그곳의 부처님을 아미타불이라고 생각했다. 부여 무량사의 창건은 신라말 범일국사(810~889)가 세웠다고 전한다. 범일국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 중에서 강원도 굴산산문을 일으킨 신라 선종의 대선사다. 범일국사가 창건한 뒤 무량사에는 당대 고승이었던 무염국사도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무량사는 조선시대 천재시인이면서 또한 의리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구데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였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고조선의 한 부족이었던 부여족으로,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고주몽)의 아들이었으나 동명성왕의 큰아들인 유리왕에게 왕위가 계승됨에 따라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내려와 한강이 흐르는 지금의 서울 풍납동, 몽촌동 주변에 터를 잡고 경기 충청 전라지역을 다스리면서 나라 밖으로도 그 영역을 넓혀 일본과 중국 동부해안 지방을 경영하였다. 그런데 훗날 고구려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21대 개로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에 패하여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옮긴 도읍은 금강이 흐르는 요새지인 공주였다. 공주는 곰나루가 있는 도읍이라는 뜻으로, 한문으로는 웅진(熊津)으로 썼다. 이때가 서기 475년이었다. 충남 공주는 방어하기에는 좋은 곳이었으나, 산세로 둘러쌓인 지형상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도읍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성왕 때에 이르러 다시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이 부여다. 부여는 공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면서 평야지대와 가깝고, 방어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부여는 금강이 흐르는 곳이며,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도 가까운 교통의 요지다. 성왕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나라의 이름도 백제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 후기인 9세기 무렵 처음 지어진 뒤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원주 거돈사는 신라시대 완성된 탑인 불국사 석가탑과 거의 같은 규모의 석탑과 석탑의 뒷편에 자리한 정면 5칸의 통층(2층처럼 보이나 내부는 1층인 건물)금당이 화려한 모습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 절의 중심은 탑과 금당이 앞뒤로 축을 이루고 주변으로 부속전각과 승방 요사채들이 들어서있는 구조였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의 주변에 지면에서 약 70cm 정도 위에 긴 장대석의 기단석이 사방으로 배치되었고, 그 안쪽으로는 건물의 기둥을 받치고 있던 둥근 주춧돌과 맨 중심에는 거대한 부처님을 안치했던 석련대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금당과 탑의 주변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석재파편들과 기와 파편들 그리고 절에서 쓰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바 있다. 거돈사에는 고려초 국사로 추앙되었던 원공국가 지조(930 ~ 1018) 스님의 사리탑이 있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가 있는데, 원공국사의 탑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최충이 글을 짓고, 명필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원공국사의 탑비만 이곳에 남아있고 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원주의 명산인 치악산은 본래 적악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꿩과 구렁이의 설화에 따라 산의 이름이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곳곳에는 많은 전설과 설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이 보기에는 사소한 동물이지만, 생명의 존귀함을 알고 이를 도와준 덕에 큰 보은을 받은 이야기도 많이 있다. 이곳 치악산 상원사에는 죽을 위기에 처한 하찮은 날짐승이지만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기 새끼를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한 꿩과 구렁이와 선비의 이야기가 전한다. 상원사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옛날 먼 옛날에 한 젊은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적악산(현 치악산) 험한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깊은 산중에서 꿩이 울부짖는 소리가 있어 귀를 기울이고 소리나는 곳을 찾아보니, 큰 나무 위에서 꿩 두마리가 뱀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울어대는 것이었다. 선비는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구렁이가 오르려는 큰 나무 위에는 꿩의 보금자리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막 깨어난 꿩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벌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그런데 꿩 부부는 꿩새끼들을 잡아먹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은 들어봤어도 '마애종(磨崖鐘)'이란 말은 처음 듣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는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유일하게 바위에 새긴 종(鐘)이 있는 데 그것이 '마애종(磨崖鐘)'이다. 이 종의 형상은 역사적으로 한국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양식의 종모양으로 이를 바위 절벽에 그대로 새겨놓았다. 본래 근처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중초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현재 마애종이 있는 자리는 중초사의 경내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초사가 폐사되고 이 마애종만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암벽에 남아 있게 되었다. 지금은 안양시내 유치원생들의 역사유적 탐방장소로 많은 어린이들이 찾는 명소가 된 이곳은 안양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도시확장으로 커진 안양시는 특히 관악산 남쪽 기슭인 이곳까지 개발됨에 따라 현재는 시민공원이 되었고 절의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종' 앞에는 안양시예술공원의 시민주차장이 되어 버려 이제는 절이 있던 옛 자취는 전혀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마애종 근처에 있는 안양시립박물관에는 옛 중초사의 석조유물들로 '당간지주', '삼층석탑'이 있으며, 계곡을 가로지르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강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는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으로 몰아쳐 들어오는 서양의 문명에 대항하여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에 근본을 둔 학자들이 따르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이 있었다. 그는 1792년(정조 16)에 태어나 1868년(고종 5)에 세상을 떴는데, 학문에 천재적인 소양이 있었는지 3살에 천자문을 떼고, 6살 때에는 중국의 전체역사를 축약한 《19사략》을 읽고 이를 독후감처럼 쓴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또 12세에는 '신기령'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우는 등 학문과 역사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16세인 1806년(순조 8) 한성에서 열린 초시에 합격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서려 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고관대작들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친근을 종용하자 사사로운 정분을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이 학자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항로는 이후 한양에서 학문이 높기로 수문난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을 찾아가 학우가 되었고 25~26살 때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30살이 되어서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그의 거처로 모여들었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오신날(5월 8일)을 1주일 앞두고 지난 4월 30일(토), 도심에서는 형형색색의 대규모 연등행렬이 어둠을 밝혔다. 올해 연등회의 주제는 '다시 희망이 꽃피는 일상으로의 복귀'로 특히 지난 2020년 12월 연등회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이후 이뤄진 첫 대규모 행사여서 더욱 뜻깊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대규모 행사를 치룰 수 없다가 이번에 3년 만에 재개된 연등행사는 저녁 7시에 흥인지문을 출발해 종로 일대와 조계사에 이르는 2.9km 구간에서 진행되었다. 연등행렬에는 부처님 형상과 코끼리, 사자, 사천왕 등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연등이 앞장서고 그 뒤를 장엄등과 개인등을 든 스님과 불자들이 따랐다. 이번 연등행사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동안 일상생활의 제약을 받았던 시민들은 화려한 연등행렬을 바라보며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한편, 불기 2566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행렬, 전통등전시회, 연등법회, 회향한마당, 전통문화마당·공연마당, 연등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아울러 청계천 전통등전시회(4월26일~5월10일), 조계사 앞 등간 및 인사동 행렬등 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66년을 맞이하여 전국의 불교사진가들이 봉축기념으로 해마다 시행하는 사진전으로 올해는 '사찰의 아름다운 꽃문살'과 '사찰의 벽화'를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지난 번 기사에는 '사찰의 아름다운 꽃문살'을 기사로 올렸는데, 오늘은 '사찰의 벽화'를 올린다. 한국의 절에 들어가면 각각의 전각에 많은 불상, 보살 등 입체조각상들이 있지만 건물의 내부와 외부에는 부처님, 보살, 나한, 천신, 스님 등 그림들이 가득하다. 사찰의 전각 벽면에 그려진 모든 그림이 뜻하는 바가 다 다르지만, 아무런 뜻이 없이 그려진 그림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언뜻 보면 아름다운 산천을 그린 풍경화 같지만, 알고보면 이 또한 불교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한 장면이다. 이번 전시작으로 나온 벽화 외에도 다양하고 많은 그림들이 있으니, 사찰에 가면 다양한 벽화의 의미도 찾아보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일정: 서울전시: 인사동 일조원갤러리 4월 27일 ~ 5월 3일 대구전시: 대구문화예술회관 5월 17일 ~ 5월 22일 광주전시: 학생교육문화회관 6월 8일 ~ 6월 15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을 중심으로 조성된 조선왕릉 가운데 한강을 건넌 김포에는 장릉(章陵)이 있다. 김포장릉은 '정원군'으로 선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배다른 형인 광해군에 밀려 자신은 왕이 되지는 못하였고, 그의 아들(능양군)이 큰아버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등극하는 바람에 왕의 아버지(대원군) '원종'으로 추존하였으며 그의 무덤 이름도 홍경원이었으나 한참 뒤에 왕릉으로 격상되어 '장릉'이 되었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대원군)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 구씨가 묻힌 곳이나 함께 묻힌 합장릉이 아니고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이다. 정자각에서 올려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정원군)의 왕릉이고 오른쪽이 인헌왕후 구씨의 왕비릉이다. '왼쪽에 남자, 오른쪽에는 여자의 자리'로 정해진 유교시대의 위계질서에 따른 봉분의 배치댜. 원종은 1619년 광해군 11년 일찍 세상을 떠나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무덤을 썼고 그 무덤 이름을 '홍경원'으로 불렀다가, 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1623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연주부부인 구씨가 1626년 세상을 뜨자, 풍수적으로 명당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 정원대원군의 무덤과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