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 이 달 균 산청 둔철산 돌고 또 돌아봐도 자취 고사하고 들은 적도 없다하네 제 발로 걸어 나갔나 바람결에 사라졌나 서러운 역사는 비운의 탑을 낳았으니 일제 강점기 때 대구 어디로 옮겨져 이듬해 다시 서울로, 수장고에서 스물세 해 이토록 기구한 운명이 또 있을까 두어 평 세간 얻어 앉은 곳이 국립진주박물관 떠돌고 떠돈 세월이 77년이 되었다 그렇다. 이 탑은 비운의 탑이다. 탑 사진 찍기 위해 산청 범학리 경호강 내려다보는 둔철산 자락 찾았으나 아는 이 하나 없다. 기구한 운명은 일제 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1년 한 일본인이 매입하면서 산청을 떠났고 대구지역 공장 공터로 옮겨진 뒤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유물 실태조사 과정에서 확인돼 이듬해 서울로 옮겨진다. 해방 이후 미군 공병대가 1946년 5월 서울 경복궁 안에 세웠으나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으로 다시 해체돼 무려 23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지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이 문화재 재건과 전시를 위해 이관을 요청했고, 마침내 2018년 2월 고향인 산청과 인접한 진주로 돌아왔다. 그 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합천 영암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탑을 마주서면 황매산이 우뚝하다 삼층탑은 아들 탑 황매산은 아비 탑 아들이 잘났다 하나 어찌 아비를 넘을까 삼층탑 뒤엔 작은 석등, 석등 뒤엔 가지런한 송림, 그 뒤엔 병풍 같은 황매산. 이 탑은 황매산에 널브러진 돌을 깎아 만들었으리라. 그러니 아들 탑이 틀림없다. 황매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이다. 탑을 두고 허위허위 돌산 오르다 꼭대기에 닿으면 산꼭대기는 뜻밖에 평탄하다. 동남쪽 비탈을 흐르는 시냇물은 가회면에서 사정천에 흘러들며, 북쪽 비탈을 흐르는 시냇물은 황강의 물줄기인 옥계천을 이룬다. 북동쪽을 내려다보면 합천호가 보인다. 6월 합천호는 넘치듯 수량 가득하다. 배가 부르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석탑은 북두성 보고 하늘 길을 알고 중은 석탑을 보고 머물 곳을 안다 하늘에 무덤을 지은 한 선인(仙人)을 생각한다 청량사는 해인사의 명성에 밀려 그다지 많이 알려진 절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지정 보물이 세 개나 있다. 이 삼층석탑(보물 제266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65호), 석등(보물 제253호)이 그것이다. 이 절이 깃든 매화산은 가야산의 위용보다는 좀 밀리지만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자태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청량사는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자주 찾은 곳이라 한다. 선생이 마지막으로 지었다는 입산시(入山詩)를 보면 한 번 산에 든다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란 맹약을 읽을 수 있다. 서라벌을 떠나 지리산 청학동, 가야산 홍류동 계곡 등지에서 여생을 보낸 이유가 바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천불산 바위 아래 고즈넉한 도량을 걸어 나오다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한 선인을 생각한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 이 달 균 눈 내린 날 절집은 이리 고요하다 흩날리는 눈발에 독경소리 그치고 멀리서 장부를 닮은 탑이 하나 걸어온다 장터에서 해장술 서너 잔 걸쳤는지 옥개석에 쌓인 눈을 훌훌 털어내더니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이내 탑이 되었다 눈 오는 날엔 석탑도 술 한 잔 생각이 나지 않을까. 스님 몰래 절집을 나와 읍내 장터에서 뜨끈한 국물에 막걸리 몇 사발, 시큼한 총각김치 씹으며 쓰윽 입을 닦는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쌓인 절마당에서 수행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상상. 죽장리 오층석탑은 이런 사내를 닮았다. 키 크고 훤칠한데 약간은 치기 어린 모습의 탑신이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내 맘이 꼭 그래서인지 퍼뜩 절 구경 끝내고 뜨끈한 국물에 낮술 한잔 걸쳤다. (시인 이달균) ▶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키가 10m인 전탑형의 5층석탑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 바닥돌에서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짜여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리장식을 얹었다. 웅장하고 세련된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석탑으로 우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익산 미륵사터 석탑 - 이 달 균 미륵은 언제 오시나 이미 다녀가셨나 별이 명멸하듯 예언자는 떠났지만 백제의 푸른 하늘은 내가 받들고 있으리라 나를 중심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왕조를 지우기 전에 먼저 나를 지우고 가라 역사의 시작과 끝은 여기서 비롯되나니 굳건한 존재를 두고 멸망을 논하지 말라 하늘에 고하고 하늘에 묻는다면 이녁이 곧 부처임을 깨달을 날 있으리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인 미륵사터탑이 19년 동안의 해체보수 공사를 마치고 2019년 4월 30일 마침내 위용을 드러냈다. 일반에게 공식적으로 공개된 다음날 새벽, 이곳을 찾았다. 멀리서 여명이 오는 시각, 탑도 긴 꿈에서 깨어난다. 탑 위로 백제의 하늘이 열린다. 왕조는 역사와 함께 흘러갔으나 탑은 아직 백제의 건재함을 웅변한다. 그래서 탑은 “나를 중심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원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고 국제기준에 따라 보수과정을 이행해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층수는 9층과 6층의 논란 끝에 기존 탑의 자취에 따라 6층으로 준공되었는데, 오랜 역사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하동 탑리 삼층석탑 - 이 달 균 묻지 마라 내 설운 풍찬 노숙의 세월 탑신은 탑신대로 기단은 기단대로 고단한 장꾼의 역마살은 차라리 다행이다 지금 내 선 곳은 한 평 땅과 옹색한 하늘 그래도 난 알고 있다 부산했던 섬진나루 화개골 그 흥망의 사연을 누가 있어 들려주랴 화개장터가 있는 곳은 화개면 탑리이다. 탑리라 부른 것은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 초기 때부터 있던 삼층석탑 때문이리라.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봉상사라는 절터였는데, 절은 사라지고 탑 부재들 또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68년에 형체를 복원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연유야 어쨌든 간에 석탑이 선 자리는 옹색하기 짝이 없다. 왼편은 그나마 약간의 여백이 있으나 오른편은 벽 가까이 서 있어 측면 사진 한 장도 찍을 수도 없게 세워져 있다. 비록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 하나 그래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인데 이런 곳에 서 있다니,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고 나니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생각해 보면 하동에서 이 탑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유물이 얼마나 될까. 가뜩이나 완전한 복원이 아닌데 자리만큼은 번듯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령보천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절터에 흩어진 기와는 말한다 이름은 숭엄사(嵩嚴寺), 봉림산문(鳳林山門)의 말사(末寺) 해질녘 고려 노을이 산 그림자 끌고 온다 때로는 기와 하나가 역사책 한 권이 되기도 한다. 이 폐사지의 경우, 기왓장 하나로 단절된 역사를 이었다. 2018년 의령군에서는 석탑 사지를 조사했는데, 흩어져 있는 기와에서 축조연대와 절 이름을 알려주는 글씨를 발견한다. 그 내용은 ‘통화 29년 숭엄사(統和卄九年嵩嚴寺)’, ‘봉림하(鳳林下)’로 되어 있다. 통화는 요나라(거란) 성종(983~1011)때의 연호이며, 통화 29년은 고려 현종(1010~1031) 2년(1011)에 해당하기에 늦어도 고려 현종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단은 이때 비로소 보았으나 탑은 늘 고려의 별들과 놀고 있었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원주 흥법사터 삼층석탑 이 달 균 탑이 있는 곳에 절이 있었다 이윽고 산 그림자 인적 지우고 나면 오롯한 석탑 하나로 적멸의 밤을 건넌다 우리나라의 고탑 대부분은 사라진 절터에 있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흥법사터 3층 석탑 역시 예전의 절터를 지키고 있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는 진공대사탑비와 함께 있어 덜 외로운 것이 다행이다. 주변은 경작지로 변했으니 이 탑이 없었다면 나그네는 여기가 절터였음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전란은 모든 것을 소멸케 한다. 사람을 죽이고, 문화유산을 없애고, 지난 연대를 확인할 증거들마저 멸실케 한다. 영봉산 아래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운 것을 보면 진공대사의 법력이 높았으며, 흥법사 또한 매우 중요한 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창경궁 팔각 칠층석탑 - 이 달 균 네게선 외로운 타관의 냄새가 난다 코끼리 숨결 배인 낯익은 남방의 탑신 어디서 어떤 연류로 이곳까지 왔느냐? 아서라, 묻지 마라 퇴락한 이씨 왕가에 기꺼이 뼈를 묻는 문지기가 될 일이다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여도 벌써 백년이 지났다 낯익다. 우리 것이라서 낯익은 게 아니라 동남아 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본 탑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1470년대 중국에서 만들었는데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역력하다. 일제 강점기 때 어느 상인이 만주에서 가져온 것을 이곳 창경궁 후원 춘당지 연못가에 세웠다고 한다. 한때는 창경원이라 하여 동물원이 되었다가 다시 창경궁으로 궁 이름을 되찾았는데, 이래저래 사연 많은 궁궐과 탑이란 생각에 마음이 짠하다. / 이달균(시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월출산3층 석탑 - 이 달 균 기억해도 좋지만 잊혀지면 더 좋다네 호남정맥 여는 달은 어김없이 뜰 것이니 여럿이 봐도 좋지만 혼자서는 더 좋다네 영암 월출산은 호남의 소금강산이라 불린다. 그만큼 기암괴석이 많고, 봉우리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절경이 있다. 언젠가 이곳에서 서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을 보며 돌아올 시간을 놓친 적도 있다. 일행과 함께 보아도 좋고 혼자라면 더욱 좋았던 그때, 산안개의 일몰 속에서 잠깐 몰아를 경험했다. 특히 9개 단지 모양을 한 구정봉(九井峰)은 비경 중의 비경이라 할 만하다. 구정봉은 30m 이상의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신령암으로 불린다. 400평 정도의 절터에서 ‘용암사(龍巖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용암사터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석탑은 절터의 중심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있고, 북서쪽으로는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 이달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