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승병일 애국지사가 27일(수) 낮 1시 12분, 향년 96살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1926년 평북 정주(定州) 출생의 승병일 지사는 만주에서 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순국한 조부(승치현, 1991년 애국장)의 뜻을 이어 평북 정주 오산학교 학우들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 1943년 3월 비밀결사인 혈맹단을 결성하여 조국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혈맹단의 행동강령은 중국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과 접선, 뜻있는 청년과 학생들을 망명시켜 광복군에 참여토록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던 중, 1945년 조직이 그러나 체포됐으며, 승병일 지사는 3달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정부는 지사의 공훈을 기려 200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또한, 승병일 지사는 6․25전쟁 시 통역 장교로 자원입대하여 창녕군 박진지구 전투 등에 참전하기도 했다. 승병일 지사는 노환으로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중앙보훈병원에서 임종을 맞았으며,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됐다. 고인은 30일(토) 아침 7시 30분 발인 뒤
[우리문화신문=김유 작가] 1931년 연말을 보름 앞둔 12월 16일이었다. 일본 관동군이 동북3성을 침략하고 그로부터 꼭 석 달이 지났으니 투쟁의 방향과 목표를 다시 짜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민족진영인사들이 모인 서세명의 집은 무순 교외 흥경현에 있었다. 여기에서 행정부와 같은 <국민부> 그리고 정치의 중심인 <조선혁명당>, 군 대표인 <조선혁명군> 그러니까 당ㆍ정ㆍ군의 대표들이 모여 앞일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사람들 가운데는 밀정이 있었으며 그들로 인하여 회의 사실이 누출되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참석하였던 중요 간부 모두는 봉천에 있는 일본 헌병대에 잡혀갔다. 그러나 대표들은 굴하지 아니하고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공석이 된 <국민부>의 위원장으로 양기하를,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양세봉을 다시 뽑았다. 이것은 '흥경사건'이라고 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것은 먼저 서세명이라는 애국자가 있었으며, 1930년대 무장운동이 <봉오동>이나 <청산리 전투>처럼 일회성 투쟁이 아니고 면면히 내려오는 독립운동의 하나였다는 것, 그리고 양세봉은 전투에 승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 지사를 비롯해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156명에게 대한민국의 적(籍)이 부여된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11일 “윤동주 지사, 장인환 의사, 홍범도 장군, 송몽규 지사 등 무호적 독립유공자 156명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추진, 민족정신이 살아 숨 쉬는 ‘독립기념관로 1’로 등록기준지*를 부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등록기준지(구 호적법에서 본적)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2009.02.06.)한 뒤 직계후손이 있는 경우*에 한해 후손의 신청을 받아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지원한 적은 있지만, 정부가 직권으로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신채호, 이상설 등 모두 73명의 독립유공자. 특히 신채호 선생 등은 1912년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 호적이 없었으나 2009년 법 개정 이후 후손 신청에 따라 가족관계등록 창설 이번에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이 추진되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156명은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1912년) 제정 이전 나라 밖으로 이주하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갑ㆍ한흥교ㆍ민제호 선생을 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라고 밝혔다. 동제사는 1912년 신규식 선생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에서 조직된 첫 독립운동 단체로, 상하이 한인들의 단결과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부산 동래에서 출생(1889년)한 김갑 선생은 1909년 영남지역 첫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했으며, 1917년 5월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했다. 동제사의 박달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동제사 중견간부로 활동한 선생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임시정부에서는 교통부 위원, 군무위원회 이사, 법제위원회 위원으로서 초기 임시정부 안정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24년 4월부터 임시정부 법무총장대리차장, 노동총판에 이어 재무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1933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광제의원에서 44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수원박물관 누리집에서 수원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는 온라인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다. 수원박물관은 올해 말까지 경기도여성비전센터와 온라인 교류전 ‘경기여성인물전 경기 여성, 과거에서 미래의 빛을 찾다’를 연다. 경기도여성비전센터에서 열리는 ‘경기여성 인물전’을 수원박물관 누리집(https://swmuseum.suwon.go.kr) 배너를 눌러 VR(가상현실) 콘텐츠로 볼 수 있다. 전시관을 누리집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번 전시에는 ‘수원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이선경과 차인재, 김향화, 이현경, 최문순 등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이선경(1902~1921)은 수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인 ‘구국민단’에 가입해 상해판 ‘독립신문’을 시내에 배포하며 시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떠나려다 일제에 발각돼 옥고를 치르며 고문을 당했고, 석방된 지 9일 만에 순국했다. 19살 되던 해였다. 이선경의 언니인 이현경(1899~?)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1921년 3월 1일, 3.1운동 2주기를 맞아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체포됐다. 김향화(1897~?)는 수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는 22일 오전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지부장 이길호)에서 ‘서울출신 3·1독립만세의거 미포상자(학생) 발굴, 포상신청 현황 보고회’를 열었다. 이날 보고회는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가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에 의뢰한 연구용역 보고회로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서울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미포상자(당시 학생)를 발굴하여 포상을 신청하는 연구였다. 이번에 발굴해 포상 신청한 미포상 독립운동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3년생 강학룡(姜學龍)·백인제(白麟濟) 등 61명으로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부(서울) 탑골공원·광화문 등지에서 수만 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돼 1919년 8월 4일 예심을 거쳐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8월 실형이나 집행유예 3년이 선고돼 학업이 중단되고,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고초를 겪은 학생 출신 독립유공자들이다. 보고회에서는 먼저 61인의 발굴 과정에 참여한 이윤옥·전영복 박사, 임동한 연구원의 설명에 이어 공적 개요를 이태룡 소장이 보고했다.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 이길호 지부장은 “일제의 강탈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는 어여쁜 꽃말을 지닌 연보랏빛 비비추꽃이 병원 뜰에 활짝 피어있는 어제(20일) 낮 3시, 여성독립운동가로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오희옥 지사를 뵈러 서울중앙보훈병원에 다녀왔다. 지난 4월 18일의 면회일로부터 두 달 만에 찾아뵌 오희옥 지사는 그때보다 건강이 다소 안 좋아 보여 가슴이 철렁했다. 함께 한 아드님의 이야기는 그동안 오희옥 지사께서 무릎 통증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맞은 근육통증 완화 주사 이후 상황이 안 좋아서 근 한 달여간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러는 바람에 날마다 받던 물리치료를 지난 6주 동안 받지 못했으며, 그 영향인지 오희옥 지사께서는 평소 면회 때와는 달리 휠체어가 아닌 침대에 누운 채로 면회 장소인 병원 로비로 나오셨다. 간병인의 말에 따르면 과거, 기자가 찾아뵙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들떠 계시며 기다리다가 휠체어를 타고 병원 로비에서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는데 어제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직 병실 면회가 재개 되지 않아 병원 로비에서 면회를 해야하는 실정이다. 오희옥 지사께서는 병원 로비에 나오셔서도 한참동안 눈을 감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을 했던 단체의 활약상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이 처음 공개됐다. 특히, 이 문건에는 그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은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발굴은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8일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최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인 국민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북간도로 파견했던 모연대(模捐隊)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국내에 처음 공개한다”라고 밝혔다. 간도지역은 당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독립군은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무장투쟁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등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1920년 간도지역 한인을 대거 학살한 간도참변을 일으키면서 독립군은 지지기반을 잃고 무장투쟁 자금을 직접 마련해야만 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당시 남만주를 일대로 무장투쟁을 수행하던 국민부*는 설립 직후인 1929년 5월에 북간도에서 친일 부호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할 별동대로 모연대를 조직했다. 모연대를 통해 모집된 군자금은 국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이끈 안경근ㆍ이덕주ㆍ최흥식 선생을‘6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라고 밝혔다. * 한인애국단 :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려고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국내에 가족 모두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다. 선생은 1926~27년(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황포군관학교 전신)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가운데 한 분으로,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를 19일(목) 아침 9시부터 서울 봉황각(강북구)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에서 연다. 이번 추도제는 천도교(교령 박상종)와 (사)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옥) 주관으로 진행되며, 이남우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천도교 회원, 기념사업회원, 관련 유족, 일반 시민 등 400여 명이 행사에 참여한다. 손병희 선생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ㆍ구금되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1922년 5월 19일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하다가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부로 나눠 진행되는 추도제는 오전에는 의암성사 묘소 참례와 추모제(제1부)를, 오후에는 2022년 동학학회 춘계 학술대회와 공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