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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순임금의 업(業)을 잘 이어가지요

문경 천한봉 선생의 ‘도자미술관’ 방문기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04]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경북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 당포 초등학교 입구에서 '문경요'라는 표지판을 보고 성주봉 쪽으로 차를 몰고 한참을 가도 가마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내려와 다시 올라가 보니 길옆에 큰 장작더미가 보인다. 틀림없이 여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차를 세우는 순간 나무판자 같은 것으로 건물 전면을 감싼 창고 같은 건물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문경요의 새로운 주인이 된 천경희 씨임에 틀림이 없다.

 

 

 

밖으로 창이 없어 투박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이곳이 도천(陶泉) 천한봉(千漢鳳) 선생의 도자미술관이다. 따님의 안내로 실내로 들어가니 선생의 숨결이 담긴 작품들이 멋지게 서고 앉아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하나같이 단아하고 깔끔하고 차분하고 정숙한 모습이다. 소문으로 들던 천한봉 선생의 성품 그대로다.

 

 

전시장 전면 높은 곳에 편액이 하나 걸려 있다. 행서 혹은 초서 같은데 꼿꼿하게 쓴 필치가 예사롭지 않다. 한자를 읽지 못하고 우선 누가 썼는가를 보니 76살 노인 효당(曉堂) 화상이라고 되어 있다. 효당이라면 스님으로서 불교와 다도(茶道)를 일으킨 최범술(崔凡述) 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따님 천경희 씨는 효당을 알아본다고 좋아한다. 그럼 글씨는 무엇일까? 우리 일행 가운데 당대 으뜸 유학자이시며 퇴계연구가인 연세대 이광호(李光虎) 명예교수님이 바로 읽어주신다.

'繼踪舜業(계종순업)'이란다.

 

 

계(繼)는 잇는다는 뜻이고 종(踪)은 자취라는 뜻이니 이 글귀는 순(舜)의 업(業)을 잘 따라 이어가라는 뜻일 거다. 순(舜)은 중국 전설의 순임금이니 순의 업이란 것은 곧 질그릇을 굽는 일이라는 뜻이란다. 과연. 순임금은 천자가 되기 전에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고기 잡고 하며 지냈는데 항상 남에게서 선(善)을 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곧 남의 좋은 점만 보았다고 한다. 결국 순임금이 했던 질그릇 굽는 일, 곧 도자기 만드는 일을 잘 이어가라는 엄중한 당부다. 자세히 보니 기미년 76살이 되시던 때에 효당이 문경에서 온 30년 후배인 천한봉 선생을 만나서 써주신 것인데, 그때는 효당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이란다.

 

 

효당 최범술은 근현대 우리 불교사의 중요인물이다. 1904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만 12살인 1916년에 출가하였는데 3년 뒤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지역에 배포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통받았다. 불교계에서 아까운 인재를 키워야 한다며 일본에 유학을 보내 10년 만인 1933년 도쿄의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도쿄에 건너간 다음 해에 박열(朴烈)ㆍ박흥곤(朴興坤) 등과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일제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들의 모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박열의 일본천황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하여 폭탄을 운반하였으며,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연루되어 8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박열은 문경 출신으로 최근 문경에 그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효당은 천한봉 선생이 태어나던 1933년에 귀국해서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 요직을 맡으며 활동하였는데 주요한 활동으로는 해인사 주지, 국민대학 설립, 제헌 국회의원, 해인대학 설립 등을 이끌었으며 1960년부터는 다도(茶道) 연구에 전념하여 1973년에 《한국의 다도(茶道)》라는 책을 펴내 우리나라 생활문화로서의 다도를 처음 확립했다. 이처럼 다도에 전념하시다가 1979년에 입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액 글씨는 다도를 일으켜 세운 효당이 천한봉 선생에게 좋은 다구, 다기를 만들어 다도 부흥의 기수가 되라는 사실상의 유훈이자 유촉인 셈이다.

 

우리 일행이 이렇게 효당을 알아보고, 또 글귀까지 자세히 밝히자 따님 천경희 씨는 자신도 그 뜻을 정확히 몰랐는데 이제 알게 되었다고 엄청나게 좋아한다. 사실 우리처럼 점잖게 생긴 늙수룩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차탁에 잔을 펼쳐놓고 맑은 가루차(말차)를 정성껏 타 준다. 우리는 문경이 고향인 진성 이씨 일가들인데 본의 아니게 유식한 턱을 좀 받은 것이 아닐까 했다.

 

 

도천(陶泉) 천한봉(千漢鳳) 선생은 우리나라 도자기의 전설이다.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그의 부친(千用石)은 비행장 활주로 건설기술자로서 군사기지에서 노역하였다. 도쿄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천한봉은 부모님을 따라 귀국했지만, 곧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에 동생들과 홀로된 어머님을 부양해야 했다. 이때 아버님의 친구의 도움으로 1947년 관음리 중점가마에서 양근택 물레대장을 스승으로 도예에 입문하여 도자기 굽는 일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만들던 도자기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생활도자기였다. 기법을 익히고 기술이 늘었으나 곧이어 6ㆍ25전쟁으로 그의 생활은 크게 흔들려 도자기 밖에서 있다가 간신히 되돌아왔다. 주로 생활자기를 만들며 1972년에는 문경요라는 이름도 붙여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에게 일본 교토 대각사 주지이며 고고미술학자인 사꾸라가와(樓川) 스님이 찾아왔다. 1973년의 일이었다.

 

 

 

그 스님은 “당신의 조상들이 빚은 도자기가 일본에서 국보가 되었는데 자네는 화분이나 요강을 만들어서 되겠는가”라고 하시면서 가방에서 《고려 다완》이라는 한 권의 책을 꺼내 보여 주었다. 도천은 이때 전율 같은 감동을 했다고 하며, 이날 이후 옛 선인들의 작품을 재현하기 위해 흙을 찾아 진주, 하동, 합천 등을 답사하였고 각고 끝에 1974년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열린 한국전통공예전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는다. 이듬해인 1975년 우리 정부는 일본의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에서 ‘한국문화 5,000년전’을 열었는데 여기에 출품한 것이 일본인들의 찬사를 받아냈다.

 

“한국에는 지금도 고려 다완을 만들어 낸다. 400년 동안 이어온 고려 다완을 천한봉이 재현하고 있다”라고 소개됐다. 고려 다완이 일본의 차인들에게는 얼마나 값어치 있고 귀한 것인가? 평생 한 번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는 신의 그릇이 아닌가. 곧 일본에서의 작품전이 열렸고 출품한 작품이 다 팔렸다. 일본에서 고려 다완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하는 도공으로 알려지면서 일본에서의 전시는 줄을 이었다. 드디어는 1995년 9월 5일 공예분야 도자기 공예 직종 명장으로 선정되어 노동부장관으로부터 제95-19호 명장 인증서를 받고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사실 문경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예의 고장이다. 조선시대에 여주 이천에서 왕실용 그릇들을 굽는 관요가 성했고 각 지방에는 지역 주민들에게 소요되는 그릇들을 민요에서 많이 구워왔으며 그중에서도 문경이 유명했지만 조선시대 말기 이후 일본으로부터 대량으로 값싼 그릇들이 들어오면서 전통 가마들이 다 명맥을 잊지 못하고 거의 문을 닫았다. 그런 상황에서 1970년대 천한봉 선생의 성공은 문경의 도자기 가마를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기능보유자인 김정옥의 영남요를 비롯하여 김억주의 황담요, 이정환의 주흘도요, 김성기의 뇌암요, 김복만의 관음요, 김영식의 조선요, 이학천의 묵심도요, 서선길의 진안요, 오순택의 현암요 등이 문경의 대표적인 가마로 이들은 옛 전통 방식 그대로 나무의 재를 이용하여 유약을 생산하고 재래식 전통 가마에 장작불을 지펴서 구워내고 있다. 문경 새재에서는 이 같은 전통을 살려 해마다 5월 초에 찻사발 축제가 열리고 있다.

 

 

필자가 KBS부산방송총국장으로 근무하던 2008년 11월 20일 부산시 남천동 일본총영사관 관저 정원에서 천한봉 선생은 일본정부가 주는 문화훈장 욱일쌍광장(旭日雙光章)을 전달받았다. 이 훈장은 일본과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한 외국인에게 주는 훈장이다. 400년 전 고려다완이라는, 일본이 귀중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옛 도자기들을 재현해 이를 일본인들이 다시 즐기도록 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필자는 그 행사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도천 천한봉 선생은 그의 호인 도천(陶泉) 곧 도자기의 샘이란 뜻처럼 문경의 전통 도자기 문화의 샘물이 되어 문경을 유명하게 한 뒤 2021년 10월에 세상을 뜬다. 지금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운 딸 경희씨가 유업을 이으면서 도천도자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중국의 순임금으로부터 비롯된 질그릇, 도자기 만드는 업(業)이 도천에 의해 확산하고 이제 딸 경희씨에게도 이어지면서 그 자취를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평소 이름을 들었으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천 천한봉 선생의 가마와 작품들을 보면서 전시장 높이 걸려 있는 순임금의 업을 잘 이어가라는 효당 최범술 스님의 유훈이 소중히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한 소중한 기회였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