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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이말산’을 함께 걷다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궁녀들의 이야기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0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말산을 아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구파발이나 연신내 쪽 사시는 분들에게는 그게 무슨 질문이냐고 하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질문이 된다. 답은 구파발역 1번과 2번 출구 앞에 있는 높이 132.7m의 나지막한 야산이다. 산 이름이 특이한데 ‘이말산’이라는 이름은 "이 산에 ‘이말(莉茉)’ 곧 ‘말리(茉莉)’라는 흔히 ‘자스민’이라고 하는 꽃식물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라는 것이 은평구청이 설치한 안내판의 설명이다.

 

그런데 말리화면 말리화지 그것을 거꾸로 만들어 이름을 붙일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는데, 누구는 '이말(莉茉)'이란 이름이 18세기 근간에 등장했고 그보다 먼저는 ‘이말산’(李末山)으로도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는 점을 들어 '이밀산'은 사람들이 그냥 입에서 입으로 불려오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붙였다는 말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동네 끝(里末)이라는 뜻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에서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고 여기서부터는 가능했다. 그러므로 이말은 한양도성에서 10리(里) 끝(末)에 있는 산이란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 산을 필자가 참여하는 동아시아 고대학회 회원들과 함께 답사하게 되었다. 회장을 역임하신 안영훈 경희대 교수님이 필자가 10여 전에 낸 "이동식의 걷기"라는 책 제목을 다시 소환하면서 회원들이 같이 걸어보며 공부하자는 뜻으로 제안해서 이뤄진 답사길이다.

 

이말산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무덤 수백 기가 남아 있었다. 도성에서 10리가 지나는 지점인 만큼 왕실과 관련된 사대부나 중인, 내시, 궁녀들의 무덤이 이말산과 북한산 자락, 지금의 북한산 둘레길 8구간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뉴타운을 개발하면서 많이 정리되었다. 그래도 이말산에는 아직도 무덤이 많이 있다.

 

구파발역 2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이어지는 좀 가파른 계단을 통해 이말산을 올라서니 여기가 궁녀를 주제로 여성테마길로 조성해 놓았다는 설명문이 있다. 그리고 길목마다에는 궁녀에 대한 소개 글이 입간판으로 자세히 쓰여있다. 은평구는 2015년 12월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돼 다양한 분야에서 양성평등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로 조선시대 왕실의 의식주를 책임졌던 ‘전문직 여성’인 궁녀의 이야기를 담아 여성테마길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곳에도 은평구청에서 운영하는 해설사들이 계시는데, 이들은 토요일에만 활동하기에 우리는 해설사의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하는 분들이 많아 이들의 지식과 정보를 서로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맨 처음 ‘우봉 김씨’ 김의정의 묘가 모여 있는 묘역을 지났다. 제일 눈에 띄는 묘역은 선조 때 충청도관찰사, 의주목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린(李䢯 1517~1589)과 그 가족의 묘역이다. 멀리 북한산의 백운대 등 주봉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에 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궁녀는 보통 10살 전후로 궁궐에 들어왔다. 한글과 한문, 바느질, 요리 등 체계적인 전문교육을 받고, 각 처소에 배치됐다. 이들은 여관(女官)이라 해서 여성 관리를 뜻했고, 나인(內人)이라고도 불리면서 궁궐(宮闕)의 잡다한 일들을 맡아서 했다. 임금과 왕실 가족들의 의식주를 도맡으며, 함께 생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말로 하면 일종의 ‘여성공무원’이자, 한 분야에 수십 년 동안 종사했던 ‘전문직 여성’들이었다고 안내판은 알려준다.

 

 

입궁(入宮)한 뒤 15년이 지나면 관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며, 다시 15년 뒤에는 궁녀로서는 최고 직급인 정오품 상궁(尙宮)이 됐다고 한다. 대우는 소속 부서에 따라 다른데, 임금과 왕비의 침실인 지밀(至密)이 가장 높고, 이어 수방(흉배, 치마 등의 옷이나 베갯모 등의 장식물에 수놓는 일을 맡아보던 곳)과 침방(針房, 바느질하는 곳)이 다음이며, 세수간과 세답방(빨래, 다듬이질, 다리미질을 하는 곳), 소주방(음식을 만들던 곳)과 생과방(다식이나 간식거리의 만드는 곳)은 낮았다.

 

8시간 일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 근무’였고, 임금과 왕비 그리고 후궁을 직접 모시는 지밀은 주간과 야간 2교대였다. 최고위직은 어명을 받드는 제조상궁(提調尙宮)이고, ‘출궁’ 직전의 보모(保姆)상궁은 왕자와 공주의 ‘육아’를 담당했다고 한다. 궁녀들은 궁궐에서 의식주를 모두 제공받았고, 월급으로는 쌀, 콩, 북어 등 현물이 지급됐다. 명절이나 왕실 잔치, 능(陵) 행차 등 특별한 날에는 보너스까지 받는, 당시엔 고소득자였다. 내시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궁 밖에 집이나 땅을 사면서, 재산을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고갯마루에서 왼쪽 길로 가면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무덤이 있다.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를 모셨던 최씨는 왕후가 쫓겨나고 장희빈(張禧嬪)이 왕비가 되자, 민씨를 위해 기도를 올리던 중 숙종의 눈에 들었다. 이후 후궁이 되어 ‘숙원’, ‘숙의’, ‘귀인’으로 품계가 높아졌고,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아들 연잉군(延礽君)을 낳으니, 바로 훗날의 영조임금이다. 이어 후궁 으뜸 품계인 숙빈에 봉해졌다.

 

 

 

산길은 매장문화재의 보고라는 평가에 걸맞게, 비석과 상석(床石) 같은 석물을 갖춘 무덤들이 즐비하다. 안내판 같은 것이 없어서, 아직 제대로 조사ㆍ정비되지 않은 것도 있다.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나뒹구는 모습, 반쯤 쓰러진 망주석(望柱石), ‘목이 잘린’ 문인석(文人石), 아들 낳기를 비는 주술적 의미로 코를 갈아 가루를 가져간 동자석(童子石)도 있다.

 

 

이 산의 묘역들 가운데 비석이나 상석에 관직이 기록된 14기 중에는 종1품 ‘숭록대부’ 2기, 종2품 상선의 묘 5기를 비롯해 ‘정경부인’ 반열에 오른 내시부부 합장묘도 7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심하게 훼손된 상태고 앞에서 본 호조판서 이린의 묘역이 가장 잘 남아있다. 명종 때 상선(尙膳) 노윤천의 묘는 봉분(封墳)도, 석물도 없이 남았다.

 

 

이리저리 돌아보다 보니 2시간이  지날 정도가 됐다. 안영훈 교수는 나보고 동네 주민으로서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시지만 사실 설명판이 곳곳에 서 있어 굳이 더 말할 것이 없다. 다만 아직도 제대로 발굴하고 조사할 것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 은평역사한목박물관이 생기면서 이 일대를 조사한 보고서가 나오긴 했지만, 그 뒤에 변화가 많고 새로 노출된 유적 유물이 많이 있으므로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데 우리 회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우리 회원들은 뉴타운 5단지, 하나고등학교를 끼고 돌아 큰길로 내려가 진관사 입구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단 이말산 답사 걷기를 끝냈다. 한옥마을을 지나면 진관사다. 모처럼 내린 비로 절 앞 계곡에 물이 불어 물소리가 시원하고 힘차다. 걸어오느라 흘린 땀과 세속에서 몸에 밴 먼지들이 이 소리로 씻어지는 것 같다. 다들 시장하지만 모처럼 온 김에 진관사도 보고 가자고 해 같이 다녀보았다

 

 

 

새로 조성된 절 곳곳이 깨끗해서 좋다고는 감탄한다. 이곳이 특히 주한 외국인들 사이에 인기가 많고 이 절의 회주이신 계호 스님이 지켜온 절 음식은 정갈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런 것은 나중에 다른 인연으로 맛보기로 하고 우리들 동아시아 고대학회 일부 회원들의 은평 이말산 답사는 여기서 마감한다. 이런 모임은 항상 좋다. 자연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