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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가장 가까운 거울

세심대(洗心臺)에서 내 마음을 닦아 볼까?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0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비가 많이 왔다. 저녁때 내리기 시작한 비가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비는 보는 것인가, 듣는 것인가... 전에 이런 의문을 제기하며 비는 듣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는데 요즘 비바람은 예측 불허로 강하게 불고, 아파트의 유리창문은 기술의 발전으로 든든하게 닫혀 있어 외부와 차단되니 요즘 비는 볼 수는 있지만 듣기는 쉽지 않다. 다만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며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것을 보노라니 나의 상념이 빗줄기를 타고 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착각 같지만, 마음이 시원하게 씻겨 가고 있는 느낌이다.

 

 

드디어 날이 개고 비가 그쳤다. 아침 산책을 위해 집 뒤 골짜기를 찾으니 이번엔 보는 비 이상으로 듣는 빗소리, 물소리가 대단하다. 작은 골짜기를 울리며 퍼져 내려오는 물들이 유리창을 통해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고 있다. 그동안 가뭄으로 물웅덩이 바닥에 깔려있던 썩은 나뭇잎들이나 이끼류들도 이때인가 싶은지 물웅덩이에서 탈출해 하류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곧 파르스름하기까지 한 맑은 물들이 채워지고 있다. 물은 바닥을 비추는 거울로 변해 있다. 물 위로 자라는 나무들의 푸른 잎이 녹색의 장막을 들려주고 있다. 곳곳에 형성된 물웅덩이, 혹은 작은 보(湺)들은 이렇게 비가 온 뒤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고 그 위를 넘어 힘차게 하류로 달려가는 물들의 함성이 진정으로 귀를 통해 더욱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이 이것이 옛사람들이 말하는 세심(洗心), 곧 ‘마음 씻기’구나. 나도 모르게 발길을 머금고 물이 펼쳐내는 소리와 시각의 화려한 잔치를 본다.

 

 

이런 세심의 경지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집 뒤에 작은 골짜기가 있고 비가 오면 그곳으로 물이 모여 흐르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는 비가 많이 오면 바위 사이로 폭포가 흐를 정도여서 폭포동이란 동네 이름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세심을 할 수 있는 곳이 곧 세심대(洗心臺)가 아니겠는가?

 

서울에는 이보다도 더 멋진 골짜기가 있었으니 청와대에서 마주 보이는 인왕산 자락의 수성동(水聲洞)이 그것이다. 그 일대에 세심대(洗心臺)라고 하는 이름이 붙은 곳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항성이란 사람이 이 일대에 정원을 조성하고 누대(樓臺)를 세웠는데,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해 눈처럼 찬란하고 다른 꽃들도 많았다"(심수경, 《견한잡록(遣閑雜錄)》)”라고 한다.

 

그런데 전란으로 누대는 없어졌지만, 이 터는 광해군 때 왕실로 편입되었고 영조 때에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가 사도세자가 죽자 세자를 위한 사당이 이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에 이곳 이름을 세심대(洗心臺)로 바꾸고 신하들과 함께 올라가 경치를 감상하고 또 시를 짓고 했다고 한다.​

 

을묘년(1795, 정조 19년) 3월 7일 상이 세심대(洗心臺)로 행차하여 꽃구경을 하였는데 의궤청의 편집 일을 하는 신하들이 모두 수종하였다. 상이 고(故) 중신(重臣) 박문수의 칠언 절구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아마 감회가 일어나서일 것이다. 신하들도 화답시를 지어 바쳤는데 신 유득공의 시는 다음과 같다.​

 

해마다 꽃이 피면 이 대에 오르는데 / 年年花發上玆臺

금년에는 꽃이 배나 난만하게 피었네 / 花到今年倍爛開

화성으로 능행 갔다 돌아온 뒤이기에 / 爲是華城旋蹕後

백화가 만수 축배를 일제히 비추네 / 百花齊映萬年杯

 

 

정조가 세심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세심이라는 말은 공맹의 도를 따르려는 이 땅의 선비들에게는 친숙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유학이라는 것이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을 닦는 학문이었고 마음을 닦는 것은 곧 마음을 씻는 것에 다름 아닌 때문이다. ​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專一)하게 지켜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으리라. 《서경(書經)》 ​

 

대개 마음(心)이라는 것은 하늘의 밝은 명(命)이고 나의 밝은 덕(德)이다. 그 본체가 비어 있고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으니, 어찌 일찍이 밝지 않은 적이 있으랴. 다만 기질에 얽매이고 물욕에 가려져서 때로는 어둡게 되니, 군자는 그것을 밝히는 공부를 한층 더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서거정 《세심정기》 ​

 

그러기에 선비들은 어느 정도 경치가 좋은 곳은 세심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마음 씻기를 자주 하였다. 경주시 인강에 있는 옥산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인데 서원 정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있는 자계천이란 냇물 한가운데 있는 너럭바위를 이언적은 ‘세심대(洗心臺)’라 이름 붙이고 마음 수양을 했다. ​

 

고봉 기대승도 세심의 경지를 말했다. ​

 

그윽한 근심에 절로 잠기어 / 幽憂得自潛

책을 덮고 때로 벽을 마주하네 / 廢書時面壁

마음을 닦고 본연을 지키니 / 洗心守太素

시끄럽고 고요함을 모두 잊었노라 / 而忘喧與寂

                                   - 기대승, 《고봉집》 제1권 / 시(詩)

 

 

근세 영주 출신의 학자며 독립운동가인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 1876∼1959)은 문경 대야산 선유동 계곡을 9개의 계속으로 나누어 시로 표현하였는데, 네 번째 계곡을 세심대라고 이름 짓고 ​

 

허명한 이치가 본래 내 마음이거늘

부질없이 세상사에 물들었구나

이 대에 이르러 한번 씻으려고 하니

어찌 묵은 때를 추호라도 남겨두겠는가?

 

라고 하여 이 계곡에서 마음을 씻어 청정한 마음을 얻기를 희망했다.​

 

심지어는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도 순국 전에 세심대라는 유묵을 남겼다.

 

 

내 오늘 세심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며칠 전 큰비로 내 마음을 잘 씻어준 우리집 뒤 계곡도 곧 세심대가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계곡이 크건 작건, 물이 맑고 소리가 시원해서 마음을 씻어준다면 그것이 어디에 있든, 크기가 어떻든 상관없이 마음을 씻어주는 세심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침마다 이곳을 산책하며 흐르는 물을 보고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씻어진다. 살다 보면 세상에서 못다 한 일도 있고 못 얻은 것도 있고 해서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남았을 터지만, 그런 아쉬움, 미움, 욕심, 원망을 여기 이 계곡의 작은 물줄기에 태워 씻어내려 가게 한다. 그렇게 해서 텅 비운, 청정한 마음을 되찾아 그것으로 세상을 보고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거기서 나의 할 바, 갈 길을 다시 더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계곡을 북한산의 세심대로 제안한다. 나 같은 사람이 제안한다고 누가 그것을 인정하고 따라줄 것은 아니지만 인왕산에 세심대가 있었기에 북한산도 이 작은 계곡을 세심대로 불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내려가면서 구파발역까지 이어지는 작은 하천은 예전의 자연하천은 아니어서 그 정취가 아쉽기는 하지만 곳곳에 10개가 넘는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기도 구곡을 설정할 수 있다. 그 첫 계곡을 세심대로 부르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제 이 세심대에서 마음을 씻는다. 내 마음이 곧 우주이며 이 세상의 근본이라는 것, 이 마음을 잘 닦고 키우면 그것으로써 인간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퇴계가 말한 옛 거울을 다시 닦는 이치일 것이다. 그 마음 닦는 것을 나는 날마다 우리집 뒤에서 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인데 사람들도 이런 마음을 가지면 작지만 멋진 세심대가 될 수 있다.

 

세심대라는 거울을 가까이에 두고 매일매일 이 작은 계곡을 찾아 마음의 거울에 비춰보면 그것으로 곧 세상의 혼잡함을 닦아내고 세상을 초월하는 멋진 삶을 볼 수 있다. 며칠 전 내린 비는 이렇게 마음을 씻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침마다 세심을 통해 삶의 시야를 맑게 열어가는 것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