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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다시 백남준을 묻는다

한 예술장르를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은 백남준이 유일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0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해마다 7월이면 나는 백남준 씨를 생각한다. 그분의 생신이 7월 20일이기에 해마다 탄생 몇 주년 등등의 수식어가 붙으면서 필자에게 그분은 늘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백남준 씨는 2006년 1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서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큰 충격이었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그의 유해가 우리나라에도 일부 왔다. 국내에서도 추모의 열기가 잠시 일었다. 그러다가 곧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부설 어메리칸 아트 뮤지엄이 백남준의 아카이브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2012년 12월에 그 아카이브를 정리해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제목은 '백남준:글로벌 비저너리(Global Visionary)', 곧 '백남준, 지구의 예언자'였고 전시회는 그다음 해 8월까지 8개월 이상 열고 있었다. 마침 2013년 5월 7일에 워싱턴에서 우리 대통령의 미국방문으로 한미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어서 우리 외교통상부와 문화부는 이 전시회를 한미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협업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이 전시장을 찾아 둘러본 다음 대강당에 마련된 한미수교기념 만찬에서 백남준을 한미 문화협력의 아이콘으로 키워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그날 밤에 수행 대변인의 성추문 사건이 터지고 모든 언론이 그 사건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뜻깊은 만찬행사 소식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한국과 미국이 문화를 통해 서로 새로운 창조의 세기로 나아가자는 의욕적인 기획도 추진이 중단되었다. 이 기획은 황병기 씨가 이사장으로 있던 우리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처음 제안해 극적으로 이뤄진 것인데 한순간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백남준은 늘 우리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아는 백남준은 괴상한 예술가였다. 비디오아트를 한다는데, 그거 뭐 텔레비전을 조각의 도구나 재료로 생각해서 선을 연결하고 수상기를 갖다 붙이거나 쌓는 것 아니냐? 그까짓 것 누구는 못 한단 말인가? 아니면 그의 예술이 너무 어렵다... 이런 정도의 인식이 아니었을까? ​

 

그렇지만 백남준은 세계적인 예술사조를 당대에 혼자서 창조해낸 독보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음악에서 출발해서 행위예술, 시각예술을 넘어, TV수상기를 예술의 재료나 수단으로 삼아 그동안 아무도 표현하지 못한 전자예술의 영역을 열었고, 걸어 다니는 로봇을 만들었으며. 비디오들을 마구 쌓고 펼치고 해서 사람과 역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당대에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장르를 창조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21세기를 내다본 세계적인 예언가였다는 점이다. 전 세계 예술인들을 모아 위성으로 연결해 텔레비전 시공예술을 선보이면서 인류문명의 미래를 진단하는 메시지를 발표했고, 전 세계 정보고속도로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미 40년 이전에 제창함으로서 오늘날 인터넷 시대를 예견하고 또 선도했다.

 

 

​그러므로 백남준이야말로 여전히 이 시대 문화창조, 그것을 통한 경제창조의 핵심 화두이자 아이콘이다.

 

오늘날 우리의 목표는 이런 것이다. “정보통신(IT)과 과학기술을 중심에 두고 각 산업과 문화를 융합시켜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 이를 통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런데 백남준의 작품과 예술관, 문명관에는 이런 것들이 이미 다 섭렵 돼 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산업’, 그것이 새로운 경제창조의 핵심이라면 창조는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깨고 나옴을 의미한다. 바이올린은 연주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텔레비전은 보라고만 있는 게 아니다. 인공위성은 전파를 송수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꼭 눈앞에서만 보고 듣는 게 아니다.

 

백남준은 이런 기존의 존재방식과 한계를 깨고 넘어섰다. 기존 것의 파괴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창시했다. 그는 당시의 기술을 문화에 융합시켜 새로운 개념의 미래예술, 곧 일거리를 만들었다. 그것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미국의 스미소니언이나 미국 언론들이 주목하는 백남준의 실체이다. 그러기에 스미소니언은 백남준이 세상을 뜨자 그의 아카이브를 다 가져갔는데, 이에 대해 미국 예술계는 스미소니언이 복권에 당첨됐다는 말로 그 값어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고는 미국은 그것을 세계에 자랑하기 위해 수도 워싱턴에서 무려 8개월이나 전시회를 연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인은 K-팝, K-아트 등으로 세계문화를 선도하는 길에 들어섰는데, 그 앞에는 바로 백남준이란 예술가가 보여준 한국인 특유의 창조적 영감의 발휘가 있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여전히 우리의 브랜드다. 전자제품으로 유명했던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던 브랜드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러를 지휘하던 오자와 세이지였다. 일본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예술 면에서 그런 브랜드를 제법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세계적인 지휘자나 연주가가 제법 있지만 세계음악사에 올라간 정도는 아니다.

 

이에 견줘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한 예술장르를 당대에 스스로 창조하고 발전시킨 사람으로서 예술사에 기록돼 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이 창조의 땀을 흘려 이뤄지는 예술장르를 당대에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은 백남준이 유일하다. 그에게는 한국인이란 이름이 항상 붙여진다. 그만큼 세계에 자랑할 한국의 브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백남준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 브랜드를 우리 것으로 키우고 있는가? 그의 생각, 그의 발상, 그의 착안, 그의 모험심, 개척심, 창의력...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문화창조, 창조경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이 시대에, 백남준은 어디에 있고, 우리에게 백남준은 무엇인가?​

 

백남준을 우리가 알게 된 1984년의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오웰'도 이미 40년 전의 일이다. 세상을 뜬 지도 벌써 17년이다. 젊은 사람들은 그를 거의 모르는 때가 되었다. 이경희, 김원 씨 등 '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이 백남준의 생애와 값어치를 재평가하는 책을 새로이 펴냈고, 그의 첫 출발인 음악으로부터 그의 영혼의 울림을 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도 20일, 21일 이틀 동안 서울대학교에서 열린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백남준은 우리나라의 차원을 넘어서서 세계적으로 더 키우고 평가받도록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 에언가의 위치로 확고하게 끌어올리려면 그의 예술과 생각을 세계인들과 함께 조명하고 알려야 한다. 미국 최대의 미술관인 뉴욕근대미술관이나 프랑스의 루부르 등에서 그를 조명하는 대대적인 전시회나 학술대회를 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기에 국가적인 추진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는 다시 백남준이 필요하다. 기존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이를 새로운 예술이나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며 아울러 나라 안팎 산업계에는 활력을 만들어 내는 것, 과거 백남준이 독일에서 30대 초반의 청년이었을 때에 시작하고 펼친 그 창조적인 에너지를 이어받아야 한다. 이 시대 우리 젊은이들이 백남준처럼 도전과 땀과 수고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우리 경제가 살아날 터이다. 그 계기가 탄생 100주년이다.

 

백남준은 내일 20일이면 탄생 91주년이다. 곧 탄생 100주년이다.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곧 닥친다. 그냥 멍하니 있다가는 세기적인 보물 백남준이란 브랜드를 놓치고 그를 망각의 시간 속으로 날려 보낼 수도 있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