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후렴이 탄생 된지 120년이 되었다. 곧 오늘의 애국가 후렴이란 점에서 곧 애국가의 출현 120년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120년 전부터 현 애국가가 탄생하는 1907년까지는 ‘무궁화가’, ‘무궁화노래’, ‘애국가’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불렀다. 이 번 회에사는 이 ‘무궁화가의 미디어상의 전승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무궁화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국민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자주독립 국가로 가야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언론도 이에 앞장섰다. 그래서 애국계몽 노래들을 발표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가운데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에 ‘무궁화가’라는 곡명의 4절 노래가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이 역시 이 신문의 자주독립을 각성시키기 위해 ‘무궁화’를 수록했다.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기리 보젼셰 二. 츙군 일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1963년 안웅권(安雄權)은 “전세계적 강국이 시발되기를 위하여 모순된 애국가부터 개창(改唱)하려 국가(國歌) 제정과 애국가를 개작(改作)····”했다며 자신의 작사 국가와 애국가를 담은 청원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송했다. 1963년 6월 1일자로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 박정희 의장에게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를 보냈다. 이 건의서의 핵심은 1955~56년에 문교부가 애국가 작사자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했지만 “안모(安某)와 윤모(尹某) 씨가 유력하다고 했으나 유시무종(有始無終)이어````” 자신이 새롭게 작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경일 등에서 자신이 작사한 국가를 선창(先唱)하고 만세3창 직후 역시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를 부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웅권의 현 애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작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애국가(愛國歌)가 아니라 슬픈 국가 애국가(哀國歌)이다. 둘째 누가 시문작사(詩文作詞)했는지 모르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셋째 가사가 비국적(悲國的)이다. 넷째 1961년 들어 여러 개작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다섯째 5.16군사혁명 과업 완성과 새 공화국의 번창을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문화재청은 2011년 초 근대음악유물 등록문화재 3편을 공고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50년 이상이 지난 것 중 역사, 문화, 예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급격한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2001년도에는 건축물 및 시설물, 2005년도에는 동산문화재 분야에 도입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근대기의 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해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보존ㆍ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광복군가집 제1집」(1943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펴냄), 「애국창가 악보집」(1916년 하와이 편찬 등사본),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악보」(1949년 필사) 세 가지를 등록했다. 이상의 3가지 음악자료는 애국가의 수록을 주목한 자료이다. 처음으로 근대 음악인 애국가의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게 된 것으로 바람직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자료에는 현 애국가의 해외동포사회 확산과 광복군 수용 사실, 그리고 안익태가 작곡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만으로는 현 애국가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윤치호는 세 가지 애국가류를 작사했다. 1897년 이전에 <KOREA>를, 1897년 <무궁화노래>를,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을 애국찬미가 모음집인「찬미가」에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여 발행한 것이 1908년(재판)이다. 이 때 창작 3편을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게 됨으로서 「찬미가」 판권(板權)에 윤치호 ‘저(著)’나 ‘저술(著述)’ 또는 ‘역(譯)’이나 ‘번역(飜譯)’ 아닌, ‘역술’(譯述)이라고 밝혔다. 대부분 번역하고 나머지는 창작으로 이뤄졌다는 개화기적 출판 용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은 일본, 중국, 미국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895년부터 1907년 사이에 각기 다른 시기와 목적과 상황에 의해 작사되어 유통ㆍ전승됨으로서 작사자 표기나 작사 당시의 기능이나 작품명도 고정되지 않은 채, 일정 기간 함께 또는 길항(拮抗,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함)하며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 전선에서 유통되었다. 특히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는 내놓고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되어 의도적으로 또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애국가>의 후렴은 1897년부터 불린 <무궁화가>에서 쓰인 것이다. 그래서 <무궁화가>를 작사한 이가 <애국가> 작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논리에서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작사했음이 확인 되어야 한다. 이는 최근 영문판<독립신문>의 발굴에서 확인 되었다. 1897년 8월 8일에는 독립협회 <통상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게 독립협회 활성화를 위해 토론회의 조직체 결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위원 3인을 선출했는데 윤치호 등이 선출되었고,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시민들의 참여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각종 기념행사에서 강연과 통역은 물론, 기념가를 지어 사용하는 활동이 확인이 된다. 바로 1897년 8월 13일 오후 3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 참여다. <독립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 대해서 먼저 당시 독립신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행사 4일 후 17일자의 보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뚜렷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라고 전제하고, “윤치호의 처지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리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이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한”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윤치호가 1945년 9월 자필로 애국가 4절을 남긴 <가사지>이다. “고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 위정당국은 이 사실을 규명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 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될 것”(동아일보, 1948. 10. 7) 이후 이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55년부터 1956년 8월까지의 국사편찬위원회 소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첫 해 3차에 걸친 조사결과로 윤치호가 유력하나 확정을 하지 못했다. 위원회에서 표결결과 11:2로 만장일치가 되지못해 윤치호로 확정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일면 신중을 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문제를 학술적 결론이 아닌 거수로 결정하려했다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 못 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듬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는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오해가 있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안창호가 1907년 귀국하여 국가(國歌), 국기(國旗), 국화(國花) 같은 국가상징의 필요성을 강연을 통해 표하고 나름의 ‘애국가’를 작사한 것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귀국한 다음 달 의무균명학교에서 ‘애국가’의 기능을 설하고 지어 제창할 것을 강조한 기록이다. “西署萬里峴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였던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학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其開明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