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석사(浮石寺)는 그 이름부터 특이하다. 부석(뜰 浮, 돌 石)이란 '뜬 돌'이라는 뜻으로, 절을 짓는 과정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큰 이적이 일어났던것을 절의 이름에 표현한 것이다. 부석사의 창건은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으로,삼국통일기 신라불교의 대표적 스님으로, 신라에 화엄종을 세웠던 유학승의상대사[義湘(相)](625 ~ 702)가 화엄사상으로 세상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왕명으로 지은 절이다. 부석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함께 전하는데, 그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상은 젊어어지러운 난세에개달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자당나라에서 싹트는 새로운 불교학을 배우기 위하여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당나라 유학시절의상의 공부를 도와주는 중국의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선묘낭자였다. 그런데의상의 인품에 반한 선묘는 의상을 존경하다 사모의 정이 생겨서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상은 출가 수행자 스님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화엄학을 공부하여 10년 동안공부를 다 마친 뒤, 신라에 새로운 불국토를 이루구자화엄종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각화사는 한국불교의 영원한 스승인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로 전한다. 각화사가 세원진 때는 신라의 남북국시대 신문왕 시절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창건 이후 기록은 별로 전하지 않고 있으며, 500여년이 지난 고려 예종 때, 무애(無礙)국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이후 여러차례 전란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각화사는 조선왕조실록 수호절로 임진왜란 이후조선 선조때 (39년, 1606) 전란이 와도 해를 입지 않을 첩첩산중인 이곳에 지어졌다. 임진왜란때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다시 펴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지어진 태백산사고 수호절로 지어진 태백산 문수사의 각화사는 한 때는 8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정진하여 국내 3대 수행사찰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기울고 한일병합이 되고나자, 전국에는 들불처럼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전국의 의병들이 태백산으로 숨어들자, 일본군들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들이닥쳐 귀하게 간수했던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와각화사를 불태웠다. 폐허가 된 얼마후1926년 사라진 절터에또 다시 달현스님이 법당과 요사채를중건하여 각화사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97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문수산 축서사는 673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전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인근에 있는 지림사에서 보니 문수산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자 비로자나불이 광채가 발하고 있어, 그 자리에 축서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 경문왕7(867년) 부처님 진신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팁을 조성하고 축서사를 참선도량으로 가꾸어 축서사는 참선수행의 도량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후 전하는 전각들은 불타고, 석조비로자나불과 삼층석탑의 일부와 석등 등의 석물과 비로자나불의 목조광배와 큰 행사에 쓰는 괘불탱화가 축서사의 보물로 있다. 유서깊은 축사사는 근래 무여스님이 원을 세워 중창을 계속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탑을 새롭게 축조하는 등 많은 변화를 하여, 아름다운 사찰이 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해돋이 명소로 이름난 동해 추암 ‘촛대바위’ 위로 아침 해가 봉긋이 떠올랐다. 날마다 같은 해가 떠오르지만 ‘촛대바위’의 해돋이 정경은 계절마다 다르다. 시리디 시린 겨울은 해가 떠오르는 주변의 바다 물빛도 검은 듯 시려보이지만, 요즘처럼 열대야 끝에 맞이한 아침 해는 겨울 해와 또 다른 느낌이다. 묵직한 카메라를 든 작가들은 겨울 추위 속을 견디듯, 아침부터 찌는 날씨에도 ‘촛대바위’ 위로 떠오르는 해를 잡기 위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해돋이 장관이 유명한 ‘촛대바위’는 동해시와 삼척시를 마주한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 관광공사가 뽑은 "한국의 가볼 만한 곳 10선"에 뽑힌 해돋이 명소 ‘촛대바위’는 주변에 거북바위, 부부바위, 형제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이 온갖 형상을 연출하고 있어 전국의 사진 애호가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동해 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촛대바위에는 재미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추암 바닷가에 살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소실을 얻었는데 본처와 소실 간에 투기가 빚어져 급기야 하늘이 노했다고 한다. 이에 여자 둘을 징벌로 없애고 남자만 남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장암은 남원 실상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실상사의 부속암자이다. 실상사는 신라에 구산선문의 본찰로 신라시대에는 9곳 큰 선종종찰이 있었다.실상사는 신라시대선종이 들어와 큰 사찰이 된 곳 중 가장 먼저 세워진 한국 선불교의 전통종가이다. 그런데 이곳 백장암 이름의 유래는 선사로 유명한백장선사와 관계가 있다. 선종이 꽃피어난 당나라시절 육조 혜능의 계보를 잇는선불교의 큰 스승으로 백장선사가 있었는데,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에만 매이지 않고, 스스로 농사를 짓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곧 놀고 먹는 것을 절대 금하였다. 하루는 노인이 된 백장선사가 밭일을 나서려 하자, 제자들이 이를 말리기 위하여 백장선사의 농기구를 감추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백장선사는 그날 하루를 굶어버렸다. 제자들은 다음날 부터는 백장선사의 농기구를 다시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을 생활화 하여, 이후 선종에서는 경전공부와 좌선 뿐 아니라 경작노동을 필수적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그가 살았던 생활규칙은 백장청규[百丈淸規] 하여 선종사찰의 제도화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왕조에서 식민지로, 광복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과 독재시대를 넘어오는 동안한국의 정치발전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그 중에서도 근세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으로피폐 속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친일파와 재벌들을 중심으로독재정치에서 4.19와 5.18을 거쳐오늘날민주화의 과정은 더욱 격동적이다. 광복이후 한민족이 남북으로 분할되면서 남한에는 국민이 선거권을 가진 민주국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진정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기까지는 많은 청년, 학생들의 희생과험난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다. 그 과정에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며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살피고자 기득권과 권력에 섞이지 않고, 힘없는 서민과 민주화를 위하여자신의 젊음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과서의 이론만 따르지 않고, 직접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가난하고 못배워 법으로 보장된 자신들의 권리조차 모르는 사람들과함께 공장에서힘든생활을 하면서 현장에서 문제점을 찾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산업현장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이들은진보정당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법률적으로 정당하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전국을 덮고 있는 7월 중순 남도 땅 끝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절 도갑사를 찾았다. 도갑사에는 백제시대에 창건한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신라말 도선국사가 근처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났다고 하며, 바로 그 도선국사가 후에 도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의 탄생에 대하여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라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를 알 수가 없어서 어머니 성을 따서 최씨가 되었다. 도선의 어머니는 처녀시절 빨래를 머리에 이고 늘 다니던우물에서 빨래를 하였는데, 하루는 우물속에 참외가 떠 있었다고 한다. 처녀는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집안에서는이를 수치로 여겨갓난아이를숲속에 버리게 하였다. 그런데갓난아기를 버린 어미는 아이의 생사를잊을 수 없어 버린 곳에 다시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산비둘기들이 날아와 아기를 보호하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서 기르고 있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님을 직감하고 버렸던 아이를 거두어 이곳 문수사 주지스님께 자초지종을 말하고맡겨 기르도록 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개심사(開心寺)는 서산시 해미면 상왕산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절이다. 개심사가 자리한 상왕산(象王山)은 코끼리 중에 왕이란 뜻으로, 불교에서 코끼리는 보현보살을 상징하며, 보현보살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철저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중생구제를 위해 실천의 보살로 정해져있다. 개심사 절이 깃든 산과 절이름을 함께 생각해보니, 개심사는 중생의 변화무쌍한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고 굳은 믿음으로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세상을 불국토로 바꾸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한 이름으로 어쩌면 개심사를 창건한 스님들의 뜻이 아닌가 싶다. 개심사는 현재 충남의 4대고찰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이다. 이곳은 바다가 인접한 절로 뱃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절이기도 하였다. 서산 간척지 사업의 완성으로 지금은 내륙의 절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개심사의 기원은 백제시대 의자왕 14년(645) 혜감스님이 창건한 절로 전하고 있으며, 고려 충정왕 2년(1350) 저능대사가 절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자세한 일화와 내력은 전하지 않아 매우 아쉽다. 역사가 깊은 한국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호남평야의 서쪽에 위치한 변산반도는 평야지역에 솟은 꽤 높은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최고 높은 봉우리인 의상봉(508m)을 중심으로 신선봉(486m) 삼신산(486m) 옥녀봉(432m) 관음봉(424m) 상여봉(395m) 등이 있으며, 직소폭포, 봉래곡, 선녀탕 와룡소 가마소 등 산과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산반도에는 고찰로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는데 개암사 뒤로는 험한 산 등줄기에 우금산이 있다. 우금산 꼭대기 능선에는전란시 방어시설로 대비한 우금산성이 있으며, 그 우금산성의 한 봉우리에 우금암봉이 불쑥 솟아있는데, 그 바위에 원효굴이 있다. 개암사의 절 이름은 아마도 우금바위에 뚫려있는 원효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개암사(開巖寺)는 그 창건이 백제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찰이다. 개암사는 백제무왕 35년(634) 묘련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신라통일 시대를 살아왔던원효와 의상도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고려 말 1314년 충숙왕 1년 원감국사가 개암사를 중창하여 큰 규모의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선왕조에 들어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높고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문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우뚝 솟은 산이 있어 그 이름을 천주산이라 하였다. 천주산은 해발 800여 미터에 이르러 근처에서 보면 하늘 높이 솟은 기둥처럼 보인다. 또 이 산을 멀리에서 보면 큰 붕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붕어산이라고도 한다. 이런 천주산에 자리잡은 절이 있으니, 그 이름 또한천주사이다. 천주사는천주산의 중턱, 험한 산지에 석축을 쌓아 대지를 조성하고, 그 대지 위에 지형에 따라 전각들을 지었다. 그래서 차로오르기도 쉽지 않고, 걸어서 오르기는 더구나 어렵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천주사는 전각들의 배치가 정연하지는 못하지만, 산지사찰로절에서 내려다 보는경계만은 어느 절에 비할 바 없이 일품이다. 천주사는 본래 작은 암자였다. 그런데이곳에 불사의 원을 세우고 35년동안 중흥불사를 하여 오늘의 천주사를 가꾼 중홍스님이 있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중홍스님의 말씀을 듣자니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중에 건물하나 짓는 것도 쉽지 않은데 험한 비탈과 구릉지로 되어있는산을 깎아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대지를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