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이 있다. 아무리 더위가 심해도, 또 이상하리만큼 덥지않고 지나가는 여름이라도 매년 세월이 흘러 9월 중순이 되면 땅속에 웅크리고 있던 뿌리에서 꽃대가 솟아나 주변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이 꽃이 바로 가을을 알리는 꽃무릇이다. 꽃무릇은 뿌리덩이 여러해살이 식물로, 꽃과 잎이 서로 다른 계절에 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잎과 꽃이 함께 있는 때가 없기에 둘은 그리워 하지만 영원히 만날수 없다고 하여, 상사화로도 불린다. 꽃무릇의 꽃은 9월 중순에 피어나 9월 하순이면 시들고 말지만, 그 잎은 꽃이 지고 난 뒤 늦가을이면 푸른 난초잎처럼 곧게 피어나, 다른식물들이 다 시든 겨울동안에도 얼어죽지 않고 푸른 잎으로 살아있다가, 다른 식물들이 피어나는 봄이면 시들어 버린다. 그리고 땅위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이 여름을 견디고, 가을 찬바람이 불 때면 어김없이 다시 꽃대를 올려서 이처럼 정렬적인 꽃을 피워낸다. 가을의 전령인 꽃무릇은 한국의 남쪽지방인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에 많이 피어나며, 그밖에 다른 절들에는 조금씩 군데군데 피어난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과 함께 그동안 박물관에 수장 전시되고 있던 유물들 중에 그 값어치를 정당하게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가. 새롭게 국보 또는 보물로 인정되어 그 번호를 새롭게 받은 선조들의 예술작품들을 모아서 오는 9월 27일까지 전시중이다. 이번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 특별전은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 동안 지정된 국보・보물 157건 가운데 이동이 어려운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 등을 뺀 83건 196점을 공개하는 자리로, 국보와 보물 공개 전시로는 사상 가장 큰 규모다. 이번 전시는 기관・개인・절 등 문화재 대여 기관만 모두 34곳이나 되는 만큼 평소에 한 자리에서 보기 힘들었던,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종류의 국보와 보물이 새롭게 납시는 자리다. 전시는 ▲ 역사를 지키다, ▲ 예술을 펼치다, ▲ 염원을 담다 등 3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마침내 국보가 된 기록유산1부 ‘역사를 지키다’는 우리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다양한 기록 유산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침내 국보로 승격된 《삼국사기》(국보 제322-1호, 옥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조선의 임금들은 중심도읍인 한양의 근처에 그 능들이 펼쳐져있다. 이에 파주에도 두곳의 조선왕릉이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통일로 근처에 있는 파주삼릉(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을 찾아보았다. 파주 삼릉 가운데 공릉은 조선의 7번재 임금인 세조시절 온갖 권력을 휘둘렀던 한명회의 딸로 세조의 첫번재 아들인 예종의 왕비가 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원손(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고 만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은 1445년 태어나 1461년에 죽었으니, 꽃다운 나이에 죽어, 왕비로서의 예를 갖추지 못한 채 무덤을 썼으며, 뒤에 능으로 승격되었으나, 능의 석물들은 왕비의 능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편이다. 장순왕후는 예종이 왕이 되기 전에 죽기도 하였지만, 예종 또한 1468년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13달만에 죽고말았기에 왕비의 능으로 잘 가꾸질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순왕후의 공릉을 살펴보면, 능의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정자각으로 인도하는 신도가 있으나, 이 또한 최소한의 형식만 갖추고 있다. 신도를 따라가다 능방향으로 꺾어들면 정자각이 있고, 그 정자각의 뒷편에 소박한 장순왕후의 능이 있다. 능의 앞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파주 장릉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에 있는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 ~ 1649) 인조와 그의 부인 인열왕후가 함께 묻힌 왕릉이다. 파주 장릉은 두사람이 함께 있으나 봉분은 하나이며 능의 앞에 있는 혼유석은 2개가 설치되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이되었는데, 반정에 성공한 뒤 공신록상 등급에 불만을 품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켰으며, 북방의 여진족을 무시하여 결국 국란을 불러들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결국 내려와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나라 황제를 향하여 항복하였다. 인조는 이를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당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아무리 청나라가 강한 나라라 하더라도 이들은 유교의 종주국인 명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요 언젠가 반드시 그 원한을 되갚아야할 원수였다. 그리하여 늘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한번도 북벌을 위한 출병은 하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시는 송나라 주자가 세운 유교의 한 학파인 성리학만이 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였다 이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유교경전 중에서도 오직 주자가가 해석한 것만을 믿고 따르고 가르쳤는데 주자가 해석한 것과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사문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의 산하에는 역사의 현장에서 흥망을 거듭했던 절들이 많다.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산속에 있는 절들이지만 격동기에는 어김없이 그 현장에서 전란의 바람과 우뢰를 피하지 못했다. 오늘은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의 사나사(遮那寺)를 찾아 본다. 사나사는 경기도 북부지역에 있는 본찰 봉선사 말사로 그 창건연대는 923년이며 창건주는 대경스님으로 전해오고 있다. 창건주인 대경스님은 제자 융천과 함께 삼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삼층 석탑이 대경스님이 조성한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현재 절에 있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는 신라석탑의 전통을 이었지만 규모가 작고, 탑의 상륜부도 변형된 형태이다. 그 이유가 전란으로 없어진 상륜부를 부분적으로 보완해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흡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라의 전형인 불국사 석가탑의 모습과 비례와 구성(2층기단, 3개층의 석탑)이 거의 비슷하며, 다만 그 크기만 작은 편이다. 사나사라는 절 이름은 매우 익숙하지 않은 특이한 이름인데, 이는 불교의 한 부처님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부처님의 이름은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은 이 세상에 오신 석가모니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청간정(淸澗亭)은 강원도 고성군 동해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지어진 작은 정자이다. 한국인은 옛부터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풍광을 즐기며, 여름이면 무더위를 식히며, 보이는 자연을 자신의 느낌으로 시를 지었고, 그 중에 내노라 하는 시인들을 이를 목판에 새겨서 정자의 한편에 붙여놓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하였다. 이곳 고성 청간정은 한양에서 강릉을 향하여 걷고 걸어 크고 높다는 대관령을 구비구비 오르고 또 올라 먼 산길을 돌고 강릉으로 내려와, 다시 북쪽 바닷가 길을 따라 오르면서 설악산과 울산바위를 돌아보며, 속초에 다다른다. 속초부터 그동안 걸어온 험한길은 끝나고, 앞으로는 평탄한 길로 왼쪽으로는 험한 설악의 산세를 감상하며, 오른쪽에는 탁트인 파란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금강산까지 쉬엄쉬엄 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에 지은 멋진 누각으로 운치있는 정자이다. 속초를 지나 고성에 접어들어 바닷가에 지어진 청간정으로 가는 길은 빽빽한 소나무 숲인데, 역사를 음미하며 옛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지나며 들르지 않을 수 없는 명소이기도 하다. 청간정은 백두대간이 동서로 나눈 대관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제주도는 지구의 깊숙한 곳에서 끓고 있는 용암이 분출한 화산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다른 지역과는 지질학적 차이로 인하여, 옛날에는 사람 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곳이었다. 제주의 토양은 용암이 분출한 돌들로 연중 많은 비가 오지만 물이 고이지 않고 빠져버려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환경이었고, 들판에는 딱딱한 화산바위가 있어 곡괭이도 잘 들어가지 않는 땅으로 밭농사도 지을 수 있는 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비좁은 농토를 갈고 가꾸어 밭농사를 짓고, 넓게 펼쳐진 바닷가에서 어업과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며 삶을 이어갔다. 이런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 옛날 제주도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여겨 큰 죄를 지은 관리들을 귀양보내는 유배의 땅으로도 쓰였다. 그 대표적인 유학자로 추사 김정희를 꼽을 수 있고 스님으로는 허웅당 보우스님 등이 있다. 추사는 귀양이 풀려 다시 육지로 갔지만, 보우스님은 당시 제주목사에게 고문을 당하여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육지에서 삼일독립운동이 벌어질 즈음에 제주 조천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조천진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이곳 미밋동산에서 열네분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하여 흘러내린 용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제주도 가운데에 높이 솟아오른 한라산 뿐 아니라, 제주도 이곳 저곳에 펑퍼짐하게 솟아난 작은 산들도 모두가 화산의 분출로 이루어진 것들이고,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바닷가에 이르러 제주의 바다는 온통 검은 화산용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는 용암 속에 수증기들이 탈출한 구엄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제주의 표선면에 펼쳐진 화산석들로 이루어진 바닷가를 살펴본다. 수 천 년 전 솟아오르고 흘러내린 용암이 갑자기 바닷물을 만나 그대로 식어버린 검은 응회암들은 마치 지구의 뜨거운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바닷물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험한 환경이지만 생명이 살고 있는 현장에는 끈질긴 생명들의 향연 속에 또 다른 아름다움도 느껴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튤립은 백합과의 뿌리식물로, 유럽과 아시아의 가운데인 터키가 원산지다. 둥근모양의 뿌리를 가을에 심으면, 봄에 곧게 줄기가 올라오고 잎이 피어나면서 곧바로 꽃대가 올라와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하나의 뿌리에서 오직 하나의 꽃대만 올라오며, 꽃의 색깔은 원색으로 붉은 색은 정렬적이고 흰색은 순수하고, 또 다른 색의 꽃들은 화려하여 튤립꽃은 부유한 귀족이 갖춘 돈과 명예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튤립은 16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귀족들이 좋아하여 부와 욕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대유행함에 따라 가격이 폭등하였다. 하지만 그 욕망은 한송이 꽃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으로, 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부질없는 욕망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느끼게도 한다. 튤립이 유럽의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아지자 튤립 알뿌리 하나가 집한 채 값과 맞먹기도 했다고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튤립은 꽃을 피운 뒤에는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여러 칸으로 나뉘어져 각 칸속에 많은 종자가 들어있다. 꽃이 핀 뒤에 맺은 열매로 싹이 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 뿌리의 구근을 분양받아 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산천초목이 기지개를 피고 깨어난다. 봄이오면 식물들은 대부분 잎을 먼저 내지만, 더러는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피기도 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꽃이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있다. 목련은 나무가 위로 곧게 자라는데, 크게 자라면 10m가 넘게도 자라며, 위로 올라가면서 가지가 옆으로 불규칙하고 무성하게 갈라진다. 목련은 겨울이 오면 무성하던 모든 잎을 떨구고, 새봄에 꽃을 피우기 위하여, 나뭇가지 끝에 꽃을 피우기 위한 눈을 준비 하고, 추운 겨울을 견딘다. 그런데 땅속 뿌리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봄바람이 불기시작하면 준비했던 꽃눈이 커지기 시작하여 봉오리가 되고, 화창한 봄(3월말, 4월초)이 오면 꽃봉오리가 터지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 목련꽃의 봉오리는 터지기 전에는 많은 털이 감싸고있어 차가운 봄 꽃샘추위를 견디다 꽃망울을 피우는데, 그때의 봉오리진 모습은 마치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봉오리와 비슷하고 또 꽃으로 피어난 모습도 언뜻 연꽃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꽃을 나무에서 피어난 연꽃이라 하여 목련(木蓮)이라 부르게 되었다. 2020년 봄은 코로나19가 엄습하여 봄꽃이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