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의 남해안은 수많은 돌섬들이 많이 있어 섬이 많은 바다라 하여 다도해라고 부른다. 남해안 중에서도 순천만은 갯뻘이 펼쳐진 드넓은 뻘밭에 갈대가 가득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앞의 산들은 육지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바다에 솟아나 있는 섬들이 겹겹이 펼쳐졌다. 오늘 보는 순천만 해넘이는 갯뻘 사이에 순천시내를 지나온 동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굽이쳐 흐르는 동천에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해걸음에 동천을거슬러 올라오는 고깃배의 귀가모습과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의 조화가 가장 아름다운 순천만 해넘이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지은 것으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귀한 건축물이다. 고려시대 건축물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수덕사 대웅전, 그리고 북한 황해도 성불사 응진전이 남아있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큰건축물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이다. 안타깝게도 전란과 화재로 훌륭한 우리의 건축물들이 많이 사라져 갔지만, 그런 고난의 세월을 피하고 살아남아 고려시대 선조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을 오늘에 전하고 있어, 고려시대 사라진 건축물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오래된 옛날일수록 문물이 발달되지 않아서, 기술이 뒤떨어졌을 것으로 생각하며, 건축물도 작고, 그 꾸밈도 단순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한국에 남아있는 옛 건축물들을 살펴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그 아름다움이 더 하고, 건물의 꾸밈 또한 복잡하고, 예술적 감각이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을 살펴보면, 건물의 기본 구성요소인 기둥과 보와 도리의 짜임을 보아도, 기둥은 주춧돌 위에 반듯하게만 세워도 될 것을 둥근기둥을 배흘림으로 단아하고 우람하게 다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삼밭의 삼나무가 빼곡하듯 많은 스님이 수행했다고 하여 유래한 마곡사의 가을이다. 조선말 나라의 국운이 위태로울 때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의 낭인을 처단한 김구 선생이 잠시 스님으로 머물러있었던 절로도 알려진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원도 양양하면 설악산과 동해바다를 옆에둔 곳으로, 양양의 고찰이라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난 뒤 지었다는 낙산사만 생각하기 쉬우나, 역사적으로는 낙산사에 못지 않은 고찰도 여럿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절로 오늘은 진전사터 돌아본다. 진전사는 한국땅에 선종의 씨앗을 뿌렸던 가지산파의 초조인 도의국사의 승탑과, 그가 세상을 뜬 뒤 세워진 삼층석탑만이 남아있는 절터다.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한다면 진전사를 창건했던 도의국사는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조라고 할수있는 것이다. 양양의 진전사는 도의국사의 자취뿐 아니라, 도의국사의 뒤를 이은 염거화상과 송광사에서 선종의 꽃을 피웠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스님으로 입문한 절이며,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스님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진전사는 기록상 1467년까지 있었다고 하나, 이후 언제인지 폐사되어서 절의 유무에 대한 언급된 흔적이 없이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에 둔전사로 개창되어 다시 절이 되었다. 이후 주변에서 흩어진 기왓장에 진전(陳田)이라 새겨닌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바로 신라때 창건된 진전사임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원도는 백두대간의 높고 험한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뻣어내리면서 동쪽에 동해바다를 두고있고, 서쪽으로는 첩첩산중 아주 험한 산지로 되어있다.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산들로 동서를 넘나들려면 어디에서든 1,000m의 고갯길을 넘어야만 하였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동쪽과 서쪽은 험한 산세로 말미암아, 옛날에는 한번 넘기가 평생에 한 두 번도 하기 어려웠을 첩첩산중이었다. 그런데 그 험한 첩첩산중에도 부처님의 뒤를 이어 우주의 진리를 깨쳐보겠다는 스님들의 발자취가 있으니, 당시 스님들의 일념에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천골은 강원도 양양의 깊은 산골로, 백두대간의 동쪽에 있으면서도 찾아들기 매우 어려운 산골짜기였다. 지금은 사통팔달 길도 잘나있고,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까지 나있어 쉽게 찾았지만, 선림원지가 크게 융성하던 신라말에는 참으로 찾기 힘들었을 험한 곳이었다. 이곳 선림원터에는 신라말 홍각선사라는 스님이 있어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를 찾아온 스님들이 많아, 스님들이 먹을 밥을 짓기위하여 쌀씻은 물이 계곡아래까지 흘러내려와 물색깔이 하얗게 변하여 이곳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어느덧 추분이 지나고 해가 짧아지는 가을이 깊어 간다. 오랜 장마와 코로나19로 모두가 지쳐있지만, 세월의 흐름은 한치도 변함이 없이 흘러감을 느낀다. 아침저녁 서늘함과 낮에는 파란 하늘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느끼게 한다.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란 곡식을 거두어 풍요롭고, 풍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말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곡식을 거두어 식량이 넉넉하고 기르던 말이 살찌면 그 말을 몰고 전쟁터로 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하니, 무더위가 갔다고 반기기만 할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지금은 다행히 말타고 전쟁터로 나갈 일은 없으니,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하여 잠시나마 가까운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들러 옛 조상들의 삶을 돌아보고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변산반도 서쪽 해안가에는 채석강과 적벽강이 있는데 그 이름은 모두 지형 모습이 중국의 땅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채석강이 시선(詩仙) 이태백의 유래에 따른다면, 적벽강은 송나라의 시인으로 당송 팔대가에 이름이 높은 소동파와 관계가 있다. 소동파는 뛰어난 문장가였으나 47세 당시 실권자였던 왕안석과 불화로 황주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곳으로 친구인 양세창이 찾아왔다. 소동파는 친구 양세창과 뱃놀이를 하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는데, 적벽부는 천하의 명문장으로 지금도 유명하다. 그런데 그 적벽부를 지었던 곳인 양자강의 지류인 적벽강으로 그 풍광이 이곳 부안 변산반도와 닮았다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그 이름을 적벽강이라고 한 것이다. 변산반도 적벽강은 화산용암과 퇴적암이 혼합된 페퍼라이트와, 화산석과 퇴적암층이 혼재하고 있다. 또 바위가 깨어져 파도에 뒹굴면서 갈려서 둥근 몽돌이 된 것들과, 그 몽돌들이 바위 암반의 사이에서 휘돌면서 바위 암반을 파서 만든 돌개구멍들도 있어, 한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암반을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곳이기도 하였다. 또 바로 옆 채석강과 적벽강의 사이에는 옛부터 험한 바다를 삶의 터전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변산반도는 한국의 지형 가운데 지질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한국의 지형이 대부분 화강암지대고 그 형성은 백두대간에서 시작된 산줄기들이 남으로 뻗어내려오면서 가지치기를 하며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가지와 가지사이에는 주로 서쪽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남서쪽으로 올수록 평야지역이고, 북동쪽일수록 높고 험하고 깊은 산들로 이루어졌다. 특이하게 변산반도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내려온 호남정맥 줄기에서 별도로 떨어져 독립된 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지형으로, 본래는 지하 용암이 분출로 이루어진 화산암이 물에 씻겨 쌓여서 이루어진 검은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산반도의 산들은 그리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가장 높은 의상봉은 높이 508m에 이르며, 옛부터 호남의 명산으로 불려왔다. 변산반도의 안쪽에는 내변산으로 상당히 험한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변산은 서해로 뻗어 바다에 접하고 있다. 내변산에는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우금산성이 있으며, 그 안에는 천년고찰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는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역사적 전쟁의 흔적으로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첫번째 망한뒤 포기하지 않고 왕자풍을 중심으로 복실장군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꽃무릇이 한창인 9월 말 고창 선운사를 돌아서 도솔천을 따라서 4km를 걸어 선운산 깊숙히 들어가면 도솔암이 나온다. 도솔암으로 길을 걷다보면 약 3.5km 정도 쯤에 둥글고 큰 바위동굴이 나타나는데, 이 굴의 이름은 "진흥굴"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늙어서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진흥굴이다. 그런데 그때는 백제땅이었기에 진흥왕이 왔을 것 같지는 않다. 전설같은 이야기로 이굴의 영험함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흥굴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도솔암이 나타나고, 도솔암에서 한고개 더 오르면 커다란 바위절벽에 마치 초등학교 어린이가 그린 듯한 모습의 천진스럽고 커다란 선으로 그린 돌부처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도솔암 미륵불이다. 도솔암 미륵불은 언제 조성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세상이 혼란스러운 때가 되자, 이 미륵불의 배꼽에 조선의 운명을 예언하는 비기(秘記)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기의 내용이 궁금하여 미륵불의 배꼽에 감추어진 미륵불의 비기를 꺼내려고 하였으나, 이곳이 가파르고 높은 절벽이라 감히 오르기도 쉽지않고, 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무더위와 코로나19로 힘겹던 2020년 여름도 한풀 꺾여,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 지나고 보니 하루가 다르게 계절도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하루에도 동쪽에서 아침에 해가 뜨고 한낮에는 그 강렬함에 뜨겁다가 차츰 기울어 서산으로 기울 때는 그 강렬했던 햇볕도 부드럽고 그윽한 느낌에 아쉬움으로 조금 더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단 1초도 그자리에 머물 수 없는 것이 무한한 영겁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오늘은 서해바닷가 부안의 솔섬에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지는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순간속에 무한 영겁의 세월을 느껴 본다. 오늘 지는 해가 내일 다시 힘차게 떠오를 것을 우리는 알기에 지는 해를 아쉬워 하지 않고, 보내며, 내일 솟을 해에 희망을 걸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