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보각국사는 고려 말 원나라 간섭이 한창이던 충숙왕7년(1320)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충혜왕 복위2년(1341) 승과고시 선종선에 급제하였다. 이때는 몽골의 간섭기로 고려인 모두가 몽골황실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던 시기로, 원나라 황실에 뒷줄을 댄 '부원배'들이 실권을 쥐고 고려의 왕실을 흔들던 때이기도 하다. 고려의 서울 개경(개성)에는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원나라에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왕실을 일일이 간섭하였고, 고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원나라에 보고하고 국정에도 깊이 간섭하였다. 그런데 보각국사가 태어난 때 임금인 충숙왕과 그 뒤에 임금이 된 충혜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지만, 원나라의 국정간섭으로 고려 임금을 두 번에 걸쳐 교대로 하였다. 당시 요동지역 선양에는 심양왕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려의 전쟁포로 , 항복한 외국인 떠돌이 유민 등의 집단이 많았는데, 이들을 다스리던 임금으로 충선왕은 고려왕을 그만둔 뒤 심양왕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황실 및 귀족들과 교우하기도 하였다. 충숙왕때에는 왕고(충선왕의 조카)가 심양왕이었는데, 충숙왕은 고려의 임금이 된 뒤로 백성을 위한 정치에는 소홀하였여, 이 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역사를 돌아보면 태평성대라기 보다는 하루 하루 한해 한해가 모두가 격동의 시절이었다. 멀리 보면 단군의 고조선 이래 5,000년의 역사라고 하지만, 고조선시대의 역사는 대부분 만주지역에 있었다. 이후 5국시대(고구려, 부여, 백제, 신라, 가야)는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서로 경쟁하며 이어오다가 한반도로 완전히 고착화 된 시점은, 불행하게도 신라가 통일하면서 부터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하였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만주지역에 대진(발해)을 건국하여 230여년을 지속하다가, 한반도 지역에서는 후삼국을 거치며 대진국의 유민들도 고려에 부분적으로 흡수되기 까지 하였으니 한민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잃은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고 할 수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세운 왕조이나 실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별로하지 못하였다. 고려 중기 한때 서경(평양)으로 천도한 뒤 만주를 되찾겠다는 정지상과 묘청의 북진주장파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개경파에 숙청되었다. 이후로 고려는 내부 문신과 무신의 정권다툼을 하다가 결국 몽골족 원나라에 패하여 오랫동안 간섭을 받다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강할미꽃은 강원도 영월 정선 경계 태백산 주변계곡 동강의 주변에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뿌리는 흑갈색이며, 뿌리에서 잎이 무더기로 나와서 옆으로 퍼진다. 꽃은 3월 말에서 4월 초에 피는데 꽃의 색은 자주색, 홍자색, 분홍색, 흰색 등으로 다양하다. 꽃잎의 주변으로는 흰 털이 나는데 털은 안쪽에는 없고 바깥쪽에만 있다. 열매는 긴 달걀모양이며 끝에 4cm 안팎의 암술대가 남아 있다. 그 이름은 흰털로 덮인 열매의 덩어리가 할머니의 흰머리 같기에 할미꽃이라고 부르나, 한국의 다른 지역에 자라는 할미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풀이다. 동강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유독성 식물로 이를 잘 이용하여 뿌리는 지사제, 학질, 신경통 등에 쓰인다. 그러나 이제는 무척 귀한 식물로, 동강주변에만 있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철저히 보호해야할 귀한식물이다. 약성이 있어도 뽑으면 안되는 보호대상의 식물자원이다. 동강할미꽃은 꽃이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이고, 다른지역의 할미꽃은 해가 떠도 고개를 떨군 모습임이 가장 확실히 구분된다. 봄이오면 동강주변 햇볕이 잘드는 바위틈에 따스한 기운을 받고 화려한듯 수줍은듯 피어나, 봄꽃을 찾아 나선 사진작가들을 유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를 지나다 이름이 고운 백운암(白雲庵) 안내판을 만났다. 그런데 백운암은 이름처럼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높디 높은 첩첩산중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골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였다. 지금의 백운암은 그리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이곳에 모셔진 철조여래좌불(쇠로 만든 앉아있는 부처님)은 고려때 조성된 것으로 최근 보물 제1527호로 지정된 부처님이다. 백운암에 모셔진 철조부처님은 본래 백운암 근처에 있었던 고려시대 큰 절 '억정사'에 모셔졌던 부처님으로 추정되는데, 억정사는 현재 백운암에서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절이다. 지금은 억정사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고, 그 터로 추정되는 곳의 비탈면은 밭과 과수원으로 되어있으며, 몇 가구의 농가가 있는 볕 잘드는 시골 마을에 불과하다. 차를 몰아 백운암 이정표를 보고 먼 거리에서 바라다보면 언덕 위에 요즈음 보기 어려운 커다란 한옥비각이 있는데, 그 비각이 바로 고려시대 후기 억정사 대지국사의 탑비다. 대지국사가 고려시대 국사로 추앙받았던 스님이고 보면, 비석 뿐 아니라 그의 사리탑도 있었을 것이나 승탑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대야산 칠부능선 산줄기 위에는 거다란 거북바위가 자리잡은 곳에 작은 암자 석천암이 있다. 석천암(石泉庵)이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생명수가 흘러넘치는 암자라는 뜻의 절 이름이지만, 본래는 보덕암이었다고 한다. 이 석천암에 오르려면 안내 팻말을 보고 삼송리 마을로 접어들어, 대야산 개울을 따라 좁은 산길로 2km 이상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비록 좁은 길이나 지금은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포장이 되어있고, 가파른 길 중간 중간에는 자동차가 서로 비껴갈 수 있는 곳도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걸어서 오르면 매우 숨이 찰 것 같아 차로 오르다 보니 혹시 다른 차를 만날까 걱정되 되었지만 다행히 다른 차는 만나지 않았다. 석천암이 깃들어있는 대야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온 산이 서쪽 내륙으로 돌아들어 속리산을 타고 내려온 산으로,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야산은 930m에 이르는 꽤 높은 산이다. 대야산에는 괴산쪽으로는 선유구곡, 화양구곡이 있고, 문경쪽으로는 용추계곡이 있고, 산에는 깎아지른 암봉과 기암괴석이 즐비하며, 계곡에는 폭포와 계곡이 많아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 절은 신라 경덕왕23년(764)에 창건되었던 절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달사의 창건은 한 석공이 불심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 고달사는 신라를 거쳐 고려 광종(재위949~975)때 왕실의 전폭적 지원으로 구산선문인 봉림산문을 대표하는 절로 크게 융성하였으나, 조선에 들어선 이래 억불정책으로 차츰 쇠약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불탔고 이후 폐사되고 말았다. 폐사가 된 뒤 고달사의 전각이 있던 곳은 논과 밭으로 변해 버렸고, 주춧돌과 기단석은 주변 집들의 주춧돌 담장 빨래판 등으로 변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가 끝나고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고달사는 묵묵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1993년 고달사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382호로 지정되고 1998년부터 문화재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달사터에 남아있던 여러 석조물들이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1993년 사적지로 지정되기 전에는 고달사터 전체가 논밭이었고, 국보 보물급 석조물도 논밭 속에 방치되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석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종대왕(1397 ~1450, 재위 1418 ~ 1450)은 조선의 4대왕으로 즉위하여 조선의 기틀을 굳게 다진 임금으로 배달겨레의 영원한 성군으로 존경받고 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형(양녕대군) 둘째형(효령대군)을 제치는 과정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성군의 성품을 알아본 아버지 태종이 자신의 뒤를 이을 임금으로 충녕대군(뒤에 세종대왕)을 택하여 임금이 되었다. 또 태종은 임금의 주변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제들을 비롯한 친적 외척들을 쳐내는 악역을 자처하였고, 훌륭한 인재들를 등용하여 아들인 세종이 임금으로 성공하는데 앞 길을 다져주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다져놓은 기반위에서 무난히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의 문화를 최고로 꽃피웠다. 세종은 백성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한문공부로 인한 서러움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신의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글자를 만들고자 하였고 결국 세계 으뜸 글자인 한글을 만들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이 되는 각종 의례와 제도를 법으로 정하여 누구나 따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방면의 책을 출판하여 농업,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은 서울의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으면서 서울을 북쪽에서 불어로는 찬바람으로부터 막아주고 시각적으로 서울을 감싸고 있어 풍수적으로 서울지역을 명당으로 만들어주는 산이다. 북한산 줄기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볼때 인왕산이 뒤에서 중심을 잡고, 좌우로 뻗어내려 왼쪽으로 낙산과 오른쪽으로는 안산으로 감싸고 있는데, 그 안쪽의 명당터에 경복궁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북한산이 솟아있으며, 북한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서울을 감싸고 있어, 서울을 큰 명당도시로 만들고 있는것이다. 그런 서울의 조산인 북한산은 산 자체가 크고 아름다운 바위들이 많이 있고, 높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사계절 경치도 아름다운 곳이다. 뿐만아니라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자연적으로 국방의 요새가 되어 삼국시대에도 산성이 있었으며, 병자호란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국난시에는 왕이 멀리 강화도로 가지 않고, 바로 북한산성 내 행궁으로 피하기 위하여 산성 안에는 왕의 임시 정무소인 행궁도 지었다. 그런 북한산에는 삼국시대부터 많은 절이 있는데,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절의 스님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또한 성이 완성된 뒤에는 산성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 북서쪽 계곡고양시 지역에 있는 산영루(山映樓)는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 가운데 하나인데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에 비친다"는 뜻으로 붙여진 정자의 이름이다. 처음 산영루를 지었던 때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1603년 시인묵객인 이정귀가 북한산을 유람한 뒤 남겼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산영루 옛터에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성이 축성인 1711년 이전부터 산영루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산영루는 북한산성 주차장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6부능선 쯤에 있어 산행을 한 참 하던 중, 등줄기에 땀이 나 꼭 쉬어갈 만한 곳에 있어, 산영루마루에 올라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계곡의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옛부터 북한산에 오르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루마루에 올라 북한산을 오르며 느낀 감상을 아름다움게 시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그리고 성호 이익 등이 있다. 그러나 1925년 경기지역에 몰아닥친 대 홍수로 인하여, 북한산내 행궁을 비롯한 산내 많은 절들과 함께 계곡의 물에 휩쓸려 사라져 흔적만 남께 되었는데, 산영루도 최근 까지 빈터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태안군 서쪽 끝에는 남으로 길게 뻗은 태안반도가 있다. 이 태안반도에서 서쪽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해당화가 많이 피어난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은 꽃지해수욕장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닷가 해당화를 보기는 쉽지 않고, 서해로 펼쳐진 해수욕장의 중심에 우뚝솟은 바위섬이 2개 있는데, 그 두 바위로 말미암아 해질녁이면 황혼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어 태안반도를 널리 알리는 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꽃지의 명물인 두 바위섬은 하나는 뾰족하고, 하나는 펑퍼짐하여, 각각 할아버지바위 할머니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바위가 생겨난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는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의 휘하장수로 승언장군과 깊은 사연이 있다. 승언장군은 당으로 가는 뱃길의 출발점인 태안반도를 책임진 장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장보고로부터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급히 북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승언장군은 장보고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아내와 기약없이 이별하고 북으로 떠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후 아무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승언장군의 부인인 미도부인은 꽃지 바닷가 펑퍼짐한 바위에 올라 일편단심으로 남편인 승언장군이 돌아오기를 애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