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기원전 3천년경 나일강 하구 삼각주에서 이집트문명이 시작되었다. 이집트문명은 수메르문명을 이어 발전한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영향을 받은 문명으로,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삼각주를 기반으로 고대왕국이 건설되었다. 나일강은 아프리카 중간지역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다 지중해에 이르는 긴 강인데, 해마다 비가오는 철에 시작된 범람은 해마다 같은 때 발생하였으며, 상류에서 흘러온 흙탕물은 나일강 하구 삼각주에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시기를 알아 맞추기 위하여 태양을 관측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이집트인들은 그 시기를 알기 위하여 태양을 관측하여 1년을 기록한 달력도 만들었다. 또 이를 기록하기 위하여 상형문자를 발명하여 이집트에는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우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 삼각주에서 생산된 풍부한 농업을 기반으로 강력한 고대국가를 만들었으며, 이런 힘을 바탕으로 거대한 왕들의 피라밋을 비롯한 세계를 다스리는 신전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음날 또 다시 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현화사(玄化寺)는 고려 현종 9년(1018)에 창건된 고려의 왕실사찰이다. 현종은 현화사를 창건하고, 둔전(屯田) 1,240결을 내려주어 절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당시 고려내 고승이었던 삼각산 삼천사의 주지 법경(法竸)스님을 모셔 현종의 왕사로 받들었다. ] 현종은 1021년 현화사에 다시 거동하여 현화사를 세운 내력을 담아 창건비를 세웠다. 이후 덕종1년(1032)에는 현화사에 휘신도량(諱辰道場 선왕 또는 선왕비의 기일(忌日)에 행하던 불교 행사)을 개설하였고, 문종 1년(1047)에도 휘신도량을 개설하였으며, 문종 6년(1052)에는 임금이 직접 스님들을 공경하는 의미의 반승(飯僧)행사도 베풀었다. 이는 현화사가 고려왕실의 으뜸 절이었음을 반증한다. 이후로도 문종 21년(1067)에는 현화사에 주석하던 고승 해린(海麟)국사가 노환을 이유로 개경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종이 직접 현화사에 들러 탕약과 금은기(金銀器-금과 은으로 만든 귀한 그릇)를 해린국사에게 전하였으며, 문종 24년(1070)에는 왕자 탱(竀)을 이 절로 보내어 출가 승려로 만들었다. 그 왕자가 바로 훗날 초조대장경을 편찬했던 대각국사 의천스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구려는 한반도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국가였다. 그것도 중국의 전진의 왕이었던 부견이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갖고자 기원후 372년 순도스님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이때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이미 300년이 더 되는 때로 중국은 불교가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도 평양을 중심으로 많은 절들이 들어서고 불교가 융성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 불상은 연가 7년(53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참으로 귀한 고구려 불상이다. 불상 뿐 아니라 불상을 보호하며 부처님의 후광을 나타내는 광배가 온전하게 남아있고, 그 광배의 뒷면에는 불상이 만들어진 때와 목적도 자세히 글로 새겼다. 광배 뒷편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은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불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1,000구의 불상을 만들었으며, 이 불상은 그 가운데 29번째 것이라고 적혀있다. 그 가운데 999구 불상은 어디론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 불상만 남아서 전하고 있다. 1000구라는 숫자가 결코 작지 않지만, 1500년 세월 속에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 사찰에서 불상 1000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수많은 승탑 중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승탑으로는 원주에 있었던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과 충주에 있었던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이다. 승탑은 왕사 국사급 스님들이 돌아가신 뒤 나온 유골을 수습하고, 그 때 나온 사리들을 모아 스님들이 살았던 인연깊은 절에 탑으로 모신 것인데, 승탑의 유래는 불교의 여러 종파중에서도 선종(禪宗: 경전이나 염불 등이 아닌 좌선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교종파)이 성립된 후의 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시대에는 선종의 스님들 중 훌륭한 스님들은 국가나 왕의 스승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하며 국가적 행사에 왕사 국사를 앞세워 국론을 통일하고 결집시켰다. 이분들은 정치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깊은 산속에 수행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국가적으로는 든든한 의지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분들이기에 왕사 국사가 돌아가시면 국가에서는 큰 다비장을 마련하여 화장하였고, 이때 나온 스님의 사리를 모아 승탑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그런 승탑이지만 스님들의 덕과 법력의 정도에 따라 승탑의 규모와 형식도 달랐는데, 그 당시 국가적인 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이촌동)에서 한국 동남쪽 해안에서 문화의 꽃을 피운 가야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가야는 그 지배층이 북방의 유목민족이며 그 초기에 남방의 해양민족과 흉합된 문화를 꽃피웠다. 현재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서력기원 후 42년 북방 유목민인 김수로왕을 비롯한 6명의 수장들이 한반도 동남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국가를 세웠다. 이후 6년 뒤 인도의 해양문화를 가지고 온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여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결합한 복합문화를 꽃피웠다. 가야는 당시로서는 최첨단무기인 철기를 제작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 노천철광석을 가공하여 각종 철제무기를 만들었고, 전투에서 사람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철갑옷과 투구, 철재 비늘갑옷 그리고 말에도 갑옷과 투구 등 다양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가야는 철을 가공하여 덩어리 또는 납작한 철정을 만들어 이를 수출하였다. 또, 생활용품으로는 각종 토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는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귀족 왕족의 무덤안에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때 만든 토기로는 그릇의 받침이 매우 크고 길어 특이하다. 가야의 철기는 신라 백제를 비롯한 일본(왜)에 중요 무역품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600년 대 삼국통일기 신라는 불교의 화엄종사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의 체계를 세우던 지엄스님의 수제자가 되어 화엄학을 이어받아 신라로 돌아왔고, 자장율사도 중국에 유학하여 청량산에서 기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은뒤 문수보살로 부터 불사리를 받고 들어와 신라땅에 명당터를 찾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절들을 창건하였다. 이때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신라를 세계의 중심 불국토로 만들고자 황룡사를 창건하고 당시 최고의 기술로 구층목탑도 세웠다. 한편 당시 고승으로 쌍벽을 이루던 원효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도 화엄사상을 통달하여 신라에 토종화엄사상을 펼쳤다. 자장율사가 모셔온 진신사리는 신라땅 이곳 저곳 중요한 명당 터에 모시게 되었는데, 당시로는 신라 최북단으로 험한 산지인 이곳 오대산 비로봉에도 모시게 되었다. 오대산은 자장율사가 중국의 청량산과 비슷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찾은 곳으로, 오대산 중대 사자암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부처님의 화엄불국정토를 구현한 곳인데, 가운데에는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인 사자암을 짓고, 주변 사방으로는 동쪽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암, 서쪽에는 대세지보살을 모신 서대 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경업장군(1594 ~ 1646)은 조선중기 임진왜란 중에 태어나 조선의 변방을 지키는 장군으로 살다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명청 교체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명나라의 편에 들었다가 결국 청으로 압송되었고, 도중에 또 탈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가 죽은 장군이다. 그는 억울하게 죽었으나, 50여년 뒤 숙종때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복권된 뒤 임금으로부터 충민공(忠民公) 시호를 받았고, 임금으로부터 사액현판을 받는 등 재평가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정만 있던 작은 사당과, 초라한 모습이던 그의 묘가 1981년 전두환정권에서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태어난 임경업장군은 광해군10(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갑산에서 복무를 시작으로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잘 갖추는 등, 무장으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그 뒤 직위가 올라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인조반정 당시 일등 공신인 김류의 휘하에 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와 진무원종공신1등이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사자빈신사터에는 특이한 조형의 석탑이 있다. 본래는 9층석탑이었으나, 5층 지붕돌 윗부분은 산실되어 불완전한 석탑이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독특한 형상과 아름다움은 각별한 대접을 받을만 한 석탑이다. 윗부분이 없어졌지만, 기자가 찾은 날에도 석탑 바로 뒷편 바닥에 한층의 지붕이 뒹구는 것으로 보아, 주변을 발굴조사 한다면 없어진 부분의 석탑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천 사자빈신사는 고려 여덟번째 왕인 현종13년(1022)에 창건한 절이라고, 탑의 기단 앞 부분에 새겨놓아, 그 조성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석탑이다. 이런 변형된 석탑은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에서 벗어나 차츰 새롭고, 다양한 모양의 석탑으로 변형 발전해가는 한국석탑의 변천사를 알게 해주어 매우 소중한 탑이다. 한국의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완전한 형태로 보고, 오랫동안 답습되어오다가, 신라 말 이후 차츰 층수도 5층, 7층, 9층 등 다양하게 발전하여 탑의 조형성도 변하고 기단의 모양도 변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자빈신사터 석탑의 기단은 특이하게도 석사자를 네 모서리에 배치하여 사자가 지키는 석탑으로 만든 것이다. 이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는 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된 아담한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입체적 비례감과 체감이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석탑이나, 그 규모는 불국사탑의 절반정도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처음 불교를 전했다고 전하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땅에 몰래 들어와 포교하던 중 신라 눌지왕 19년(435)때 부처님을 꿈속에서 만난 뒤 절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그 절이름을 향산사라 하였다. 그러나 묵호자가 불교를 신라땅에 전하였으나 당시에는 생소하고 이상한 이교로 신라왕실로부터 탄압받아 정식으로 포교도 하지 못하였다. 그뒤 묵호자가 입적한 뒤 불교가 공인되고,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대의 스님들이 이곳에 절을 세우고 탑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어떤 연유로 모셔온 것인지 몰라도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탑이란 법당의 앞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모시기 위한 최고의 조형물이었다. 향산사는 그런 유래를 간직한 신라시대 창건된 고찰로 창건이래 800년 이상을 유지한 뒤 조선시대 최대 국난인 임진왜란때 전란의 와중에 전각은 모두 불타버렸고, 이 삼층석탑만이 외롭게 남겨졌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조선부터 한민족의 고대역사가 살아있고 전란이 있을 때마다 최고의 요새중에 하나였던 강화도에는 해안가 돌출한 곳이면 빠짐없이 탐망을 위한 관측소와, 적의 침입에 대비한 작은 성들이 많이 있다. 강화도의 섬 주변에는 현재 48개의 작은 성인 돈대들이 확인되었는데, 돈대는 전체 둘레가 100m 안팎으로, 그 형태는 원형 각형 등 지형에 따라 다양한 소규모의 방어시설로 한국에서는 강화도를 빼면 찾아보기 어렵다. 강화도의 돈대는 주로 병자호란 이후인 숙종 때(숙종 4~5년인 1678~1679) 세워졌다. 이때 한양의 중앙군과 전국의 지방군을 총동원하여 강화도 해안가 지나가는 배들이 잘보이는 전망이 좋은 요충지에 국방을 위한 요새로 만들었다. 이렇게 세워진 48개의 돈대는 개화기에는 프랑스군 참략시 병인양요, 미군의 침략시 신미양요, 일본의 침략시 운양호 사건때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으며, 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조선군들이 순국하였으나, 일본에 굴복한 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난 뒤 하나 둘 무너지고 훼손 되어갔다. 그런 돈대들이 최근에 다시 그 역사적 중요성을 알게되어 발굴조사를 한 뒤 하나 둘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돈대의 성벽은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