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파원군 윤평이 숙신옹주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3월 4일 세종 17년인 1435년 3월, 윤평과 숙신옹주가 혼인을 올렸다. 이 혼인은 무척 특별했다. 조선 왕실에서 친영례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처음으로 왕가의 혼인을 친영례로 치른 것이다. 친할 친(嚫), 맞을 영(迎)으로 된 말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와서 혼례를 치른 뒤 곧바로 시집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친영례는 명나라의 풍속이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랑이 혼례를 치른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지내는 ‘처가살이’ 전통이 강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줄곧 조선의 혼인 풍속을 문제 삼았고, 조선 왕실에서는 성리학에 따라 생활 예법을 중국식으로 바꾸며 친영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명나라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숙신옹주가 혼인을 올린 뒤에도 친영례는 한참 동안 일반화되지 않았다가, 무려 200년이 지난 17세기에 가서야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니까 17세기 때까지만 해도 ‘시집간’ 여인보다는 ‘장가간’ 남성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 책, 《옹주의 결혼식》은 조선 첫 친영례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니, 궁중의 옛일부터 국가 제도, 다른 집 족보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한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서 질문하면 하나하나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혜경궁지문」, 《순조실록》, 1816년 1월 21일 / 20쪽 혜경궁 홍씨. 정조의 어머니이자 순조의 할머니인 그녀는 죽은 다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총명하다고 해서 ‘헌’, 늘 조심스러웠다고 해서 ‘경’이라는 글자를 썼다. 칠십 년 가까이 계속된 그녀의 궁중생활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런 살얼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열 살에 입궁한 혜경궁은 빨리 어른이 되었다. 1744년 가례를 올리고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약 18년 동안 이어진 불안한 혼인 생활,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외척 척결에 따른 친정의 몰락, 그리고 마침내 손자 순조가 즉위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칠십 년 궁중생활이었다. 정병설 작가가 쓴 이 책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왕실은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조선 왕실에 태어난 아이는 특별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핏줄로 태어난 것부터가 특별한 일이거니와, 특히 왕위를 이어갈 ‘원자’로 태어난 아이는 그 출생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존망이 그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에, 왕실에서는 자녀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 정성이 반드시 아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조기교육’은 그저 뛰어놀고 싶을 나이의 아이들에겐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물론 특별한 자질이 있는 경우에는 공부로 가득 찬 일과를 즐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버거운 일상이었다. 신명호가 쓴 책,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은 조선 왕실의 태교부터 육아, 청소년 시기의 갈등 해결 방법까지 자녀교육의 모든 면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았나 싶어질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조선 왕실을 보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p.243)좌의정 채제공: 회의를 시작한 지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원자는 마치 심어 놓은 나무처럼 단정하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는 <고향의 봄> 동요의 노랫말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 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지금도 ‘새터마을 소답꽃집’으로 불리는 그 집이다. 한국 조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 조각가, 김종영은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태어났다. 조은정 작가가 쓴 이 책, 《생각을 새긴 조각가, 김종영》은 한국 조각계의 거목인 김종영의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미술관’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어린이미술관’ 시리즈는 ‘온 가족이 보는 예술책’답게,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고도 알차게 내용을 담아냈다. 김종영의 증조부 김영규는 조선이 강제로 합방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했다. 그리고 1915년, 증손자 김종영이 아버지 김기호와 어머니 이정실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종영은 집안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사랑방에서 글씨를 쓰고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며 자랐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30년, 일본인이 세운 학교가 아닌 민족재단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1월 17일. 대련 수상경찰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는 짧았다. 그가 살다 간 태산 같은 인생에 견주면 허무한 결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간다지만, 30년이 넘는 숱한 시련에도 건재했던 아버지였기에 아들 이규창의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는 곧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가 대련으로 간다는 정보가 어떻게 일본 경찰에게 들어갔는지 모든 연결망을 동원해 샅샅이 알아보았다.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이 누구인지 찾게 될 때는,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김은식이 쓴 이 책, 《이회영-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는 1910년, 망국의 파도가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그해, 일제의 치하에서 단 한 해도 살 수 없다며 1910년 12월 30일 재산을 처분해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일가의 이야기다. 나라가 망했을 때 조상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으며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권문세족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책에 소개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자결, 사설 게재, 무장투쟁을 하는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대다수 양반은 일제가 던져주는 달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구절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봄은 왔다. 비록 35년이나 걸렸지만, 빼앗긴 들은 주인을 찾아 기름진 옥토가 됐다. 특히 우리 문화에 푹 빠진 한류 팬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 만큼 문화 강국이 됐다. 그러나 봄이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위세가 맹위를 떨칠 때, 우리 문화의 정수이자 보배라 할 만한 문화유산도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 책, 《빼앗긴 문화재에도 봄은 오는가》에 실린 열 가지 유산이 특히 그랬다. 이 책은 다양한 경로로 나라 밖으로 빠져나간 문화재를 다루며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고,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의 문화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생생히 일깨워준다. 만약 식민지 시절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문화재가 오롯이 우리 곁에 있었을 텐데, 절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책에 실린 가야 문화재, 경복궁, 경천사 십층석탑, 고려청자, 몽유도원도, 북관대첩비, 의궤, 유점사 53불, 인쇄술, 수월관음도가 모두 보배 같은 유산이지만, 특히 경천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그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소!” 내가 장애인이라 중요한 업무에서 차별을 받을 때, 누군가 이렇게 외쳐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장애를 가졌다 하여 무조건 업무에서 배제하지 않고, 능력을 먼저 보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이는 조선 건국 초기의 명재상 허조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는 어깨와 등이 많이 굽고 키도 작아 ‘말라빠진 매’라는 뜻의 ‘수응(瘦鷹)’ 재상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강직한 성품과 훌륭한 능력을 높이 산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그를 ‘주석지신(柱石之臣)’, 곧 주춧돌 같은 신하라 소개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삶은 쉽지 않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 예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차가운 사람들의 시선, 드러내지만 않을 뿐 언제 어디서나 느껴지는 은근한 차별 … 모두가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는 요즘에도 상황이 그러한데, 하물며 몇백 년 전 조선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뜻밖에 조선은 장애인을 그다지 차별하지 않았다. 능력이 있으면 높은 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궁중 악공으로 직업을 가지고 능력껏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 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풍기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짝지어 줌이라. 은근한 마음으로 사랑의 노래를 보내니 신랑 각시가 되어 신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만생 장필성 근정 (p.26) 그대에게 권하노니 선녀를 만나는 꿈은 생각지 말고 힘써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소서. 채봉 이런 ‘단호박 거절’을 당한 선비의 운명은? 결론을 말하자면, 잘 풀렸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단,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채봉이 기생이 될 정도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말이다. 우연한 만남, 운명 같은 사랑, 갑작스러운 시련, 재회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사랑 이야기는 무수한 이들이 밤을 새워 읽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요즘같이 로맨스 소설이 넘치는 시대에, 그래봤자 옛날 사랑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을까 싶지만 《채봉감별곡》은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다. 박진감 넘치고, 반전도 있으며, 생각보다 재밌다. 이 재미의 상당 부분은 여주인공의 당찬 성격에서 나온다. 운명에 순응하는 지고지순한 양갓집 규수가 아닌, 기생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옛 정인을 찾는 적극적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초 채봉은 평양성에 사는 김 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제대로 된 한옥 사진집을 발견했다.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의 사진기자였던 이동춘과 경희대 주거환경학과 교수였던 홍형옥이 합작한 사진집, 《한옥ㆍ보다ㆍ읽다》가 그 책이다. 한옥의 멋과 매력을 한껏 담은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에 담긴 한옥을 설명하는 글 또한 으뜸이다. 모르고 보면 ‘한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알고 보면 한옥만큼 다채롭고 개성이 살아 있는 우리 문화도 없다. 월간지 기자로 일하며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글쓴이는 자유기고가로 독립한 뒤, ‘내 것’을 찍기 위해 고심하다가 마침내 전통문화를 화두로 삼았다. 그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한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월간지 시절 찍었던 한옥 사진과 자유기고가 시절 찍은 사진, 그리고 홍형옥 교수의 설명에 어울리는 한옥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 찍은 사진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공들여 찍은 사진이 많은 만큼,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풍부한 사진과 자세한 해설이다. 내용이 알차면서도 편집을 공들여 한 덕분인지 잘 보이고, 잘 읽힌다. 한옥이란 어떤 집이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오늘날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천 원권 지폐의 앞면에 나오는 도산서원의 주인공, 퇴계 이황. 그가 17살의 어린 임금을 걱정하며 마지막 충정으로 바친 책이 있으니, 바로 《성학십도》다. 이 책은 성학(性學), 곧 성리학을 잘 깨우칠 수 있는 열 개의 그림을 엄선한 것으로, 어린 임금도 쉽게 그 이치를 살펴 바른 정치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성리학 인포그래픽(데이터 시각화 인포메이션 그래픽)’쯤 될까? 퇴계 이황은 성리학의 주요 내용을 도표로 정리한 것은 물론, 형이상학적인 관념 체계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성껏 그림을 그렸다. 퇴계 이황 같은 성리학의 대가가 평생 쌓아 올린 학문적 성취를 열 장의 그림으로 압축한 ‘족집게 과외’를 받을 수 있었던 선조는 운이 좋은 임금이었다. 성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고 닦아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사단칠정(士端七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단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일컫고 칠정은 희, 로(노여움), 애(슬픔), 락, 애(사랑), 오, 욕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천변만화하는 마음을 다스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