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좀처럼 인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패륵의 입에서 찬사가 튀어나왔다. 날짐승을 명중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실감한 적이 있던 그로서는 김충선의 화승총 솜씨에 그만 감격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김충선은 패륵의 칭찬에 공손한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시는 까만 눈동자에 불만을 가득 담아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별로 훌륭하지 않아. 김충선은 순간적으로 긴장되어 뒷목이 뻐근해졌다. 왕손들을 모두 감동시켜야만 누루하치와의 면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패륵이 눈을 흘겼다. 홍타, 넌 사냥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몰라. 독수리를 잡는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고. 칸은 활로 독수리를 사냥한 적이 많아. 누르하치의 활 솜씨는 대단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난처한 김충선을 곁에서 지켜보던 일패공주가 거들고 나섰다. 홍타, 이번에는 굉장히 멀리 날고 있는 독수리를 명중시켰어. 칸의 독수리 사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홍타이시는 콧방귀를 날렸다. 칸의 활솜씨가 훨씬 더 멋있어. 패륵도 홍타이시를 달랬다. 물론 칸의 활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냐? 어린아이답지 않게 홍타이시는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찌푸려진 콧등이 귀여움을 더했다. 김충선이라 합니다. 김충선은 예의를 다하였다. 비록 어려 보였지만 왕도의 풍모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시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우릴 감동시킬 자신이 있다고? 최선을 다할 따름이지요. 그보다 중요한 일은 별로 없다. 하늘과 땅에 맹세코 부끄럽지 않게 정성을 다한다면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야. 김충선은 내심 탄성을 토했다. 5살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린 홍타이시는 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격려, 감사합니다. 천만에, 모처럼 귀한 손님이시니 기대가 클 뿐이야. 홍타이시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면서 막사를 나섰다. 김충선은 경탄의 실소를 흘리면서 그 뒤를 따랐다. 이미 막사 밖에는 패륵을 비롯한 일패공주 등 누르하치의 왕손들이 진을 치고 김충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김충선이 어떤 행동을 보여줄 것인지 잔뜩 기대하는 시선들이었다. 김충선은 칭칭이 하얀 천으로 감겨진 석 자 길이의 화승총을 봇짐에서 풀었다. 저것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조총이란 병기 아닌가? 패륵이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칸으로 행세하는 누루하치의 자식들이니 그들은 모두가 공주이며 왕자의 신분이었다. 하나하나 눈여겨보니 어딘지 모르게 늠름하면서도 왕족의 특권인 오만한 자태도 엿보였다. 특히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첫 째 패륵은 누나가 데려온 김충선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방자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난 그가 어떤 재주로 우리 형제들을 만족 시킬지 정말 궁금해. 나이는 16세나 17세 정도 되어 보였고 허리에는 호랑이 가죽의 허리띠에 짧게 보이는 호신용 패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손목에는 금빛의 장식물을 감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 마다 경쾌한 짤랑 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우리 집안의 장자죠. 패륵왕자라고 해요 일패공주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동생을 소개했다. 김충선은 패륵을 마주 응시하며 친밀한 미소를 보였으나 어색하게 마무리 짓고 말았다. 패륵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손님은 처음이니까 우리도 기대하는 바가 크지만 과연. 누르하치의 첫째 왕자라면 향후 누루하치의 뒤를 이어 칸의 보좌에 오를 대상이니 만큼 예사롭지 않은 위치이며 형제들에 대한 영향력 역시 최고가 아니겠는가. 김충선은 누구보다도 그를
[그린경제/얼레빗= 유광남 작가] 공주는 방도가 있을 것이라 믿소. 김충선의 믿음이 일패공주는 싫지 않았다. 밉지 않았다. 당신은 꽤나 사람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어요.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거요? 옳아요. 하지만 수월 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약간의 관문을 돌파해야 해요. 관문을 돌파해야 한다? 일종의 칸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시험하겠다는 것이구려. 일패공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김충선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뿌렸다. 칸을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어려움이라도 난 헤쳐 나갈 것이오. 어떤 시험이요? 내가 미리 알려준다면 어찌 시험이라 할 수 있겠어요. 일패공주는 불빛에 상기 된 표정을 지었다. 김충선은 그녀의 미묘한 얼굴빛을 대하자 갑자기 젊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새침하게 보이면서도 애교가 내포되어 있는 야릇한 얼굴이며 표정은 충분히 사내의 감정을 뒤흔들 만 하였다. 그...렇소? 김충선은 가까스로 대답을 하고 그녀를 외면했다. 혹시나 자신의 심경을 상대방에게 들킬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패공주가 누구인가. 그녀는 예사롭지 않은 내력을 소유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과감하고 담대하며
[그린경제/얼레빗 유광남 작가] 당신은 정말 이기적이군요. 이기적이라는 지적을 받게 되자 김충선은 토끼구이의 비릿한 향기가 더욱 역겨웠다. 어린 철부지 시절, 바닷가 고향 해정에서 부친의 망치소리와 더불어 어머니의 속삭임은 한결같았다. 정의로운 사내가 되어라. 어머니는 조선의 어느 누구로부터 교육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린 사야가 충선에게 그렇게 훈육하였다. 정의롭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적어도 그것은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덕목이리라. 김충선의 일그러진 표정을 힐끔 살피던 일패공주는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이해 할 수 있어요. 이해 할 거예요. 아니, 어쩌면 이미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나 역시 당신이라도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는 없었을 거예요. 김충선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마땅히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요. 사과도 받고, 용서를 빈다고 하니 그 또한 용서 하는 것으로 하죠. 역시 그녀는 대범하고 시원했다. 대륙의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본능의 기마 민족의 기질을 유감없이 지니고 있는 탓일까. 고맙소. 경직된 얼굴로 던지는 고맙다는 말은 별로 고맙게 들리지 않아요. 여전히 매섭구려. 일패공주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화제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일패공주? 그녀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아침 식사는 혼자보다도 둘이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워요. 일패공주는 바닥에 떨어진 토끼구이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흙이 묻어 있는 부위를 손으로 털어냈다. 그 광경을 김충선은 묵묵히 주시할 다름이었다. 건주여진의 누루하치를 독대하고자 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던 사람이 바로 일패공주였다. 김충선은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던 터였지 않은가. 내 건강을 위해서 와 준 거요? 일패공주는 병사들을 향해서 나직하게 명령했다. 전원 물러가라. 만주를 지배하는 누르하치의 병사들은 일제히 군용견을 이끌고 물러났다. 그들은 먼발치에서 경호 태세에 돌입하였다. 일패공주가 토끼의 살점을 뜯어냈다. 아주 잘 익었군요. 솜씨가 제법 이예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설마 당신의 방문을 내가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김충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일은 내가 사과 하리다. 그때의 일이라니요? 일패공주는 되물었다. 아련한 배신감이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그것은 오랜 고통이 되어 가슴에 사무치도록 작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여진의 군사를 움직일 수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새벽의 한기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서릿발처럼 내리 꽂혔다. 만주의 북풍은 예사롭지 않게 대지를 훑었다. 시리다. 김충선은 추위를 넘어선 한파에 몸을 도사렸다. 이미 봄이 왔건만 만주의 얼어붙은 벌판은 얼음장 같은 바람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작별을 고하고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를 만나기 위해서 머나 먼 길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이로구나. 김충선은 독백처럼 중얼 거렸지만 그 벌판의 끝에 목적지가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서둘러서 야영을 끝내고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이제 거의 건주여진의 누루하치와 상면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시장 끼가 몰려들었다. 요기를 좀 해야겠군. 김충선은 봇짐에서 건량을 뒤적였다. 비어 있었다. 간밤에 마지막을 잠결에 씹어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흘간의 행군 끝이었던 탓에 너무도 피곤하여 요기와 잠을 동시에 해결했던 것이다. 바스락 김충선의 촉각이 순간적으로 예민해졌다. 그의 손이 옆구리에 닿는 순간에 이미 매끈한 여인네의 손가락 같은 암기가 잡혀졌다. 손으로 잡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이미 암기는 예리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이순신은 냉엄한 표정으로 큰 아들 회와 평소 아끼고 있던 조카 완을 싸늘한 시선으로 쏘아 보았다. 어디서 이리 준엄한 눈빛이 쏟아질 수 있단 말인가. 평상시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순신의 노여움이었다. 이러한 분노의 시선은 바다 위에서나 종종 발휘 되었다. 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적선을 마주했을 때가 아니고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회와 완은 고개를 무참히 떨구었다. 그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용서 하소서. 용서할 수 없다. 너희들이 정녕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난 용서도, 이해도, 용납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의 안색이 푸르게 변해갔다. 노화가 격탕하여 얼굴빛을 시퍼렇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이회외 이완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들은 설마 이순신이 이토록 분노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충선은 날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나갔다. 그는 스스로 어려운 길을 자청하였다. 과연 누가 그러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겠느냐? 이순신의 탄성은 이해가 충분하였다. 사야가 김충선은 오로지 이순신의 새 하늘을 열기 위해서 만주행을 택한 것이지 않은가? 여진과의 대타협을 이루기 위한 김충선의 선택은 위험한 곡예일 수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자객들은 이순신의 강경한 당부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장내를 빠져나갔다. 이제 객관은 적막한 밤기운만이 맴돌았다. 가토 기요마사가 보낸 자객임을 확신하십니까? 큰 아들 회의 질문에 이순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러한 음모를 자행할 수 있겠느냐? 선봉장 고니시도 있지 않습니까? 고니시는 본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이회는 부친 이순신의 정면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다소곳한 자세에서 말문을 던졌다. 아버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가토뿐이 아닙니다. 일본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아버님을 제거 하고자 합니다. 전쟁 전이야 어떤 심경이었는지 모르오나 이미 양 국의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사온데 어찌 고니시라고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렇구나. 이순신은 아들 회의 발언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이회는 내심 고무되어 아뢰었다.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군을 시해 하고자 할 것이옵니다. 너의 생각이냐? 이회는 고개를 흔들었다. 완의 추측입니다. 이완은 숙부인 이순신의 시선을 느끼면서 허리를 숙였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발설할 수 있
[그린경제/얼레빗 = 유광남 작가] 누가 사주한 것이냐? 그의 눈에서는 핏발이 번뜩였다.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일찍 세상을 등진 부모를 대신하여 자신을 거두어준 은인이며, 전쟁터에서는 상관이었고, 앞으로는 대업을 이루어야 할 귀중한 신분이 아니던가. 만주로 떠나간 김충선의 당부가 아직도 생생하게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장군을 측근에서 경호해 주게나. 현재의 장군은 조선에서도 위험하고, 일본 측에서도 첫 번째 암살 목표일세. 철저한 경호가 필요하네. 김충선의 예언은 적중했다. 사실 이완은 김충선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숙부 이순신의 총애가 그를 향할수록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을 뒤틀었다. 여인네들의 투기처럼 질투심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김충선의 경륜은 실로 놀라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한 불편한 감정이 분출되어 올랐다. 어서 발설하지 못하겠느냐? ...... 자객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알고 있음이다. 그냥 보내 주거라. 이순신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이들을 풀어 준다면 다시 숙부님의 목숨을 노리고 올 것입니다. 부디 제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