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그러나 유성룡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하던 선조의 표적이 김충선에게로 옮겨진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랐다. 하여간 이순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전심전력을 다하는 김충선에게는 악재(惡材)였다. 그들이 무엄하구려. 유성룡이 선조의 노기를 가슴으로 품어 주었다. 소신이 그들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일본의 재침략을 봉쇄하는데 있어서 중요 역할을 하게 된다면 자연 이순신은 본래의 위상을 되찾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랬소? 김충선이 장담했습니다. 뭐라? 상감마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두 장수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다고 말입니다. 선조의 용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떤 자들을? 서애 유성룡은 일본 장수들의 이름을 대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옵니다! 선조는 그 순간 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하하핫... 유성룡도 선조의 큰 웃음에 덩달아 따라 비웃었다. 선조는 아예 어좌의 모서리를 붙잡고 숨이 끅끅 넘어갈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왕의 위엄과 체면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끝내 왕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비쳤다. 짐이 이렇게 웃어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인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충선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선조의 탄식을 들으며 유성룡은 얼굴 색 조차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고 감히 신하 된 도리를 다하지 않아 의금부로 압송되어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이제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간신히 출옥하지 않았습니까? 이순신은 지난 한 달간 옥중에서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와 같은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영상 역시 모르지 않을 일이었다. 이순신과 같은 장수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소. 유성룡은 자신의 견해를 한 발자국도 물리지 않았다. 신이 살펴 보건데,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한 죄를 뉘우치고 있으며 진심으로 함대 통제사로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건 불가하오. 소신 역시 그러한 청탁을 들어줄 수 없음을 분명히 했사옵니다. 선조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랬더니요? 이순신은 매우 실망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항왜 장수 사야가 김충선이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복직을 강력히 요청해 왔습니다. 선조의 눈에서 노기가 뿜어졌다. 저런, 고얀 놈을 봤나? 김충선이란 작자는 대관절 어떤 놈이요? 유성룡은 그에 관하여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활략했다면 그 김충선은 육지에서 공로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은 조선 11대 임금이던 중종과 그 후궁 사이에서 출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선조는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의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혈통의 치명적 약점은 선조의 재위기간 내내 그를 자유롭지 못한 신분으로 피해망상 속에서 헤매도록 했다. 넌 그들의 대화를 들었어야 했다. 황공하옵니다. 당장 영상을 불러야겠어. 선조가 독백처럼 중얼거리고 있을 때 내관 고명수가 문 밖에서 아뢰고 있었다. 영상께서 납시었나이다. 선조와 사헌부 지평 강두명의 눈빛이 교차 하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애 유성룡이 출현 하였다. 선조는 강두명에게 손을 흔들어 조용히 몸을 숨기라는 시늉을 했다. 강두명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는 즉각 용상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모셔라. 선조의 명이 떨어지자 궁녀들이 좌우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서애 유성룡은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왕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신 유성룡, 상감마마를 뵈옵니다. 어서 오시구려. 마마에게 아뢰올 것이 있사와 입궐을 서둘렀나이다. 유성룡의 시선이 용상의 선조에게 향하였다. 마침 잘 되었소. 나 역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영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어떤 분부이시옵니까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33번의 파루(罷漏)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은밀히 방문한 곳은 서애대감 댁이었습니다. 사헌부 지평 강두명은 황송하다는 듯이 어전(御殿)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정녕 영상을 만났단 말이냐? 선조는 눈을 부릅떴다. 그들의 발걸음이 북촌(北村=육조거리 주변의 고관대작들 저택이 주로 밀집)으로 향할 때부터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외에 이상한 행동은 없었느냐? 강두명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순신과 김충선이 길을 걷다 말고 땅바닥에 했던 낙서(落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보고를 올리지 않을 생각 이었으나 왕이 추궁하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이 있었습니다. 말하라. 강두명은 그 날 새벽에 목격했던 그들의 행위를 고스란히 보고했다. 왜적과 여진족이라고? 그러하옵니다. 땅바닥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선조는 다시 물었다. 그들이 영상을 방문하여 오고갔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겠지? 예. 그러하옵니다. 아쉽구나. 아직도 죄인의 신분을 벗지 못한 이순신이 영상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했을꼬? 강두명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백의종군의 신분을 하루라도 빨리 벗겨 달라는 탄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두 분 말입니다. 우리가? 김충선의 지적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일국의 왕이 보낸 감시자가 두 분을 면밀히 관찰 중이거늘 어째서 이리 태평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왕의 저주가 정녕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유성룡이 은근히 물었다. 자네는 상감과 독대를 하지 않았던가? 김충선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이순신의 방면(放免)을 위해서 왕이 감추었던 이순신의 장계(狀啓)를 왕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찾아내어 선조와 담판을 지었었다. 김충선은 침중한 자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요. 유성룡의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왕이 어떠하시던가? 왕이 어떠했던가? 김충선은 잠시 선조를 생각했다. 왕권에 매달려서 그는 불안했고 초조 했으며 때로는 비굴했었다. 일국의 지도자라고 하기에 왕은 위엄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었으며 백성들 역시 왕을 왕답게 여기지 않았다. 임진년의 전쟁으로 그는 왕의 권위를 상실하였다. 전쟁을 피해 백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 했으며 명나라로 망명을 하고자 했었다. 그 시간에 이순신을 비롯한 권율, 정기룡, 곽재우 등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 했으며 신립, 조헌, 김시민 등의 장수들은
[그린경제=유광남 작가]저 아이가 운이 좋다면 아마 조선의 새 하늘 아래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네만. 유성룡의 말꼬리를 김충선이 붙들었다.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장군이 아니고서는 조선의 바다를 누가 수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때는 우리와 같은 마음이시어야 합니다. 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겠네. 유성룡의 답변을 들으며 김충선은 이순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돌아가자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런데 불쑥 이순신이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들이 아직도 밖에서 우릴 감시하고 있으려나? 김충선이 흠칫 하였다. 미행을 눈치 채고 있으셨습니까? 이순신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의 예민함이 오늘의 이순신을 만든 것이지. 서애 유성룡은 약간의 당혹감을 드러냈다. 미행이라니? 김충선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누군가로부터 사찰(使察)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감이 아니시라면 누구겠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내 집을 방문했다는 것은? 굳이 설명 드린다면 대감께옵서도 우리 편이라는 것을 알려야지요. 허허...... 유성룡은 어이가 없던지 실소를 흘렸다. 그는 침묵하는 이순신을 돌아봤다. 삐쩍 마른 체구에 눈이 십 리
서애대감은 불가사의하구나. 김충선은 유성룡에 대해서 새삼 경외심을 지닐 수밖에는 없었다. 동시에 이순신에 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순신은 34일 간의 옥중 생활을 마무리하고 출옥 한 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순신의 나라를 위한 왕도(王道)를 걷게 되리라. 이순신은 유진을 잡아 일으켰다. 조선의 희망은 자네와 같은 젊은이라네. 부족함이 많사옵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대감께옵서 이 새벽에 자네를 내 앞에 세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조선의 동량(棟梁)을 내 눈으로 확인하라는 의도가 아니시겠는가. 유진은 이순신의 어깨 너머로 서애 유성룡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장군을 뵙고 싶었습니다. 오호, 그랬던가? 임진년에는 소생의 나이가 열 살 이었습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던 일본의 무리들이 무섭고 두려웠지요. 그때 처음으로 장군의 승전 소식을 피난길에서 들었습니다. 어린 소견에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유진은 그 날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는지 감회(感懷)에 젖었다. 그게 어디 이 사람의 공이던가? 자부(慈父)이신 대감의 안목(眼目) 때문이지. 한낱 종 6품의 지방 현감을 정 3품의 수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이순신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는 파직이 되었고 그의 강력한 함대는 원균에게 모조리 넘어갔다. 그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 움직이던 군사들은 이미 타인의 군졸로 변해버렸다.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의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이순신은 절망(絶望)적 상황이었다. 내게는 육신(肉身)이 남아있고 정신(精神)이 살아 있나이다. 이순신의 반박에 유성룡은 냉정했다. 단지 그것으로 개천(開天)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소? 나의 하늘이 아니라 우리의 하늘이기에 가능 하외다. 확률이 낮은 승부에 모험을 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요. 장군의 의지는 그저 평범할 뿐이요. 나는 절대 무모하지 않소. 서애 유성룡의 단호함을 지켜보면서 김충선은 의아했다. 일본인 사야가에서 조선인 김충선으로 변신한 그는 유성룡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순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그는 왜 이런 새벽에 귀중한 아들을 내보내어 이순신의 방문을 고대 하였는가? 그는 분명히 그들의 방문을 예견하고 있었다. 설마 이순신과 김충선에게 왕권에 대한 무모한 도전을 경고하고자 기다렸단 말인가. 대감이 원하는 것은 진정 무엇이요? 김충선
[그린경제=유광남 작가]이순신의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외가 있었다면 그래도 임진년의 전쟁 때문에 많이 참아 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을 통하여 이순신이 영웅으로 탄생하자 선조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급한 불안증으로 어전회의를 제대로 해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성들에 대한 이순신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자 선조는 이탈하는 민심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순신에 대해서도 김덕령과 같은 함정을 팠다. 하지만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은 치밀한 전략가인 동시에 꼼꼼하고 섬세한 기록자였다. 이순신의 숨겨졌던 장계! 그것의 폭로 때문에 이순신은 김덕령과 다르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희들이 이 새벽에 찾아올지 알고 계셨다면 능히 연유도 아실 터이지요. 김충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유성룡이 답했다. 함부로 입에 올릴 까닭은 아니지. 이순신은 이제 침묵하지 않았다. 대감, 내게 길을 인도하소서. 유성룡은 깊은 상념의 시선을 이순신에게 고정하였다. 과하지도, 모나지도 않은 눈빛이 이순신의 전신을 훑었다. 34일 간의 감옥 생활로 이순신은 피로가 누적되고 쇠약한 몰골이었다. 유성룡은 가슴이 미어져왔다. 오로지
[그린경제=유광남 직가] 김충선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소생은 지금 대감의 혜안(慧眼)에 감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조선 제일의 재상(宰相)이시옵니다. 서애 유성룡이 싱긋이 웃었다. 그대야말로 삼국시대의 장수 관우(關羽)나 자룡의 헌신이 아니던가. 내가 보면 볼수록 자네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 김충선은 몸을 더욱 조아렸다. 대감께서는 과연 신(神)의 기운을 지니고 계시옵니다. 그걸 어찌 아셨는지요? 관운장과 조자룡은 소생이 가장 흠모하는 장수들이옵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유진은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관우와 조운이 가당키나 하는 것입니까? 아버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감언(甘言)이 대단하시구나. 후훗 그러나 부친 유성룡은 결코 농담을 건네는 표정이 아니었다. 만일 자네와 같은 장수 한 명 만 더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참으로 조선의 기쁨이 될 것일세. 김충선의 입가에 안타까운 미소가 머무르다가 홀연 부드러운 표정이 적막해졌다. 김덕령! 그가 있었다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지요. 의병장 김덕령은 왕세자 광해군이 직접 익호장군이란 칭호를 내려줬던 장수였다. 분조 무군사(無軍司) 시절에 광해군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용맹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