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장예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충선을 위해서 여진의 군사를 움직일 정도라면 이건 매우 심각한 국면이었다.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장예지는 더욱 신중히 처신했다. 그건 이순신장군의 잃어버린 장계가 발견됨으로 인해서였어요. 반드시 나라고는 할 수 없지요. 일패공주는 예리했다. 이 마당에 우리 솔직하죠? 장낭자는 타협을 원했던 거 아닌가요? 그래서 광해군을 김충선과 더불어 설득한 것이고요. 지적은 날카로웠다. 장예지는 그 점에 대해서 변명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판단이 맞았기 때문이다. 일패공주는 이미 모든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진의 유능한 첩자였다. 사부는 무모하고 너무 위험해요. 바로 그 점이예요. 장낭자는 김충선을 그리 생각하고 있잖아요. 난 달라요. 난 그 사람의 가슴속 야망을 읽고 있어요. 그가 원하고 있는 이순신의 조선을 난 지지해요. 이순신의 조선이라고? 장예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김충선이란 이름의 사내에게는 일패공주와 같이 영특한 권력의 소유자가 존재해야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새 하늘을 열고자 하는 개벽의 사나이에게는 그를 배후에서 도와줄 절대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장예지는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왕으로부터 김충선을 구원 할 방도가 어디 있겠는가. 왕의 명령은 바로 법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왕법에 의해서 약혼했던 장수 김덕령이 지난 병신년(丙申年)에 매질 당해 죽었다. 이번에는 또 그녀가 온 몸과 정신으로 사랑하고 있는 김충선이 표적이다. 장예지는 자신의 기구함에 맥이 풀렸다. 절대 그 사람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장예지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일패공주는 이때 미소 짓지 않았다. 그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하나 뿐 이예요. 장예지는 그녀의 다음 말이 무서웠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알려줘요. 듣게 되면 후회 할 수도 있어요. 아니, 분명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녀는 정색했다. 내게 그 말을 듣기를 강요하지 않았나요? 사부를 살리기 위해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 있는 거죠? 일패공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장예지는 생각보다도 현명한 여자라는 것을 일패공주는 느끼고 있었다. 난 이제 준비 되었어요. 장예지는 어떤 운명이든지 받아드릴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일패공주는 그녀에게 또박또박한 어조로 설명했다. 김충선이 죽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는 일본을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김덕령장군을 해치웠죠. 이번에는 이순신 장군 때문에 사부를 노리고 있군요. 사부는 김충선이었다. 장예지에게 약간의 무공을 전수해 준 인연이 있었으며 이제는 김덕령 대신에 가슴 깊이 화인(火印)처럼 찍혀버린 사내. 맞아요. 그는 지금 조선에서 가장 위험에 노출된 사내가 되었어요. 장예지는 김충선을 떠올렸다. 늠름하고 다정하면서도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와 헤어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고, 그를 잊기 위해서 목 놓아 울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숨어서 은거하며 지내던 장예지의 마을을 굶주린 일본군들이 양식을 털어가기 위해 기습을 하였고 달아나다가 우연히 김충선과 해후하게 된 것이다. 운명으로 생각했었다. 장예지는 그를 만나게 되어 행복했다. 많은 언어를 주고받지 않아도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김충선의 곁에서 그가 느끼고 싶어 하는 조선의 숨결을 전달해 주고자 마음먹었다. 조선의 운명을 눈앞에 두고 고민하는 김충선에게 평화로운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와 함께 광해군을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의 왕 선조와 담판을 짓기 위해 떠나간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장예지는 여진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오표는 허리를 굽혔다. 영상마저도 군왕 선조를 버리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그럼 영상이 이순신과 손을 잡았단 말입니까? 방안 구석의 내부로부터 싸늘한 질책이 쏟아져 나왔다. 오표, 너무 입이 가볍구나. 순간 오표는 자신이 흥분했음을 상기하며 몸을 도사렸다. 황송하옵니다.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목청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김충선을 너에게 제거하라는 밀명이 내려졌단 말이냐? 어명이옵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였다. 쯧쯧, 여전히 하성군은 바보로구먼. 하성군(河城君)이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불렸던 선조의 호칭이었다. 여인은 당돌했다. 일국의 왕에 대하여 이렇게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표는 그녀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달려왔습니다. 오표는 주렴의 옥구슬 속에 숨겨져 있는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난 수년간 조선에서 경험하고 수집했던 모든 일에는 오표 자신도 관여했던 일이었다. 특히 항왜 장수 김충선에 대해서는 그들은 예민했다. 오표는 그 숨어있는 주인이 김충선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감정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강두명은 본래 소인배들이 그러하듯이 강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약하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강하게 군림했다. 그러나 오표에 대한 강두명의 태도는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네를 발굴한 것은 내게도 행운일세.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이번 임무만 무사히 끝내게 된다면 자넨 내금위(內禁衛=임금을 측근에서 경호, 보필하는 부대)의 중요 직위에 오를 것이야. 지금이야 전쟁으로 인해서 내금위를 임시 폐지하였으나 이제 곧 복설(復設)될 것이니까 말일세. 오표는 이미 강두명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 강조하지 않아도 난 이미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했네. 김충선이라고 했던가? 그를 반드시 제거하겠어. 그러니 너무 염려 마시게. 강두명은 계면쩍은 미소를 흘렸다.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신중하자는 것이지. 오표의 예리한 눈매가 번뜩였다. 목표가 이순신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어째서 김충선으로 바뀐 것인가? 강두명은 오표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영웅이 아니라 필부(匹夫)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신 모양일세. 이순신이 필부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 일세. 의외로군. 나 역시 믿기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하지만 이 사내가 지니고 있는 냉혹함을 알게 된다면 누구든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오표(吳豹)라 불렀으며 강두명이 그를 만난 지는 약 오 년이 넘었다. 조일전쟁 중에 강두명은 왜적들에게 포로로 붙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 오표를 만났다. 그는 강두명을 비롯한 네 명의 무리로 쇠사슬이 연결되어 함께 끌려 다녔다. 그때 오표는 탈옥을 위하여 다른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살해 했다. 강두명은 지금도 왜 그가 자신의 목숨은 살려 두었는지 가끔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표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함께 탈옥시켜 주었다.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김충선이란 인물이 있어. 이번 이순신의 방면에 그 자가 백방으로 구명을 위해 노력했지. 혹시 자네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뜻밖에도 오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왜 장수 아닌가? 알고 있군. 오표는 아주 잠깐 동안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 자를 우선 제거하라고 밀명을 내리시던가? 그의 예리한 추측에 강두명은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하이. 오표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쉽지 않은 어명이군. 그러나 강두명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건넸다. 자네가 해내
[그린경제=유광남 작가]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어찌 이순신을 상감마마와 비교할 수 있겠나이까. 신은 한때 발칙한 죄를 저지른 이순신을 거듭 경계해야 함을 주청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러한 자가 다시 신분을 되찾게 된다면 지난 과오를 다시 범할 염려가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순신은 후환이 된다는 것이구나. 바로 그러합니다. 선조의 눈빛이 변하였다. 넌 김충선을 자세히 모르지? 소문을 들어 약간 알고 있나이다. 솔직히 말하라. 강두명이 머리를 조아렸다. 모르옵니다. 짐작하기에 무서운 놈이다. 조국 일본을 배신한 독종이로다. 총기를 다루는 기술과 무장으로의 배짱도 두둑하다. 넌 그 놈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내라. 약점을 파고들란 이야기다. 이순신을 우선 대신해야겠다. 강두명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순신을 대신하라는 것은? 선조는 거침이 없었다. 김충선을 제거해야겠다. 강두명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아......전하. 선조의 야비한 시선은 혼란에 휘감긴 강두명의 전신에 머물렀다. 아주 미약한 신음처럼 선조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순신을 도모하라. 이순신에 대하여 선조는 지극히 집요하였다.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조는 우선 왕세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어찌 이순신을 상감마마와 비교할 수 있겠나이까. 신은 한때 발칙한 죄를 저지른 이순신을 거듭 경계해야 함을 주청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러한 자가 다시 신분을 되찾게 된다면 지난 과오를 다시 범할 염려가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순신은 후환이 된다는 것이구나. 바로 그러합니다. 선조의 눈빛이 변하였다. 넌 김충선을 자세히 모르지? 소문을 들어 약간 알고 있나이다. 솔직히 말하라. 강두명이 머리를 조아렸다. 모르옵니다. 짐작하기에 무서운 놈이다. 조국 일본을 배신한 독종이로다. 총기를 다루는 기술과 무장으로의 배짱도 두둑하다. 넌 그 놈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내라. 약점을 파고들란 이야기다. 이순신을 우선 대신해야겠다. 강두명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순신을 대신하라는 것은? 선조는 거침이 없었다. 김충선을 제거해야겠다. 강두명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아......전하. 선조의 야비한 시선은 혼란에 휘감긴 강두명의 전신에 머물렀다. 아주 미약한 신음처럼 선조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순신을 도모하라. 이순신에 대하여 선조는 지극히 집요하였다.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조는 우선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서했던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상감마마 황공하옵니다. 유성룡은 더 이상 선조와 마주 하기가 괴로웠다. 왕을 고립시켜 끝내는 파국으로 장식해야 하는 현실이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유성룡은 왕 선조에 대한 증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원하는 것은 조선다운 조선을 만드는 길이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나이다. 선조가 갑자기 제지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오. 예...전하. 선조는 다시 몸을 굽혔다.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을 때의 버릇이었다. 이순신과 김충선이 왜적과 여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유성룡은 뜬금없는 선조의 질문에 잠시 주춤거렸다. 의도를 알 수없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짐작하기에 그들 여진과 왜적은 조선의 주적이 아니옵니까? 주적(主敵)이지요. 이순신과 김충선은 지난 6년 간 왜적을 상대해 왔습니다. 이순신은 훨씬 전 군관으로 변방의 여진족과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사오나 김충선은 여진을 아직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유성룡의 답변을 들으며 선조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강두명의 보고에 의하면 김충선도 분명 여진이란 호칭을 땅바닥에 남긴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조선의 주적들을 낙서하며 주고받았을까? 선조는 이순신
[그린경제=유광남 작가] 선조의 비굴함이 용서되지 않았다. 이순신의 장계를 숨기고 그 충성스러운 무장을 제거하려 했던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웠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 임진년 일본의 기습 공세에 밀려서 파천(播遷)을 단행 했을 때, 조선의 땅과 백성들을 버리고 명국으로의 망명을 하고자 했던 왕에 대하여 유성룡은 그 상실감에 통곡했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이 나라를 포기하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유성룡은 눈물로 애원하며 왕 선조를 붙들었다. 선조는 그런 유성룡에게 호통 했었다. 짐이 살아 있어야 조선을 보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곧 조선이 아닌가? 내가 이대로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그때는 끝이 아닌가? 짐이 저들에게 붙들려 항복하게 된다면 조선은 다시 회복할 수 없도다. 유성룡이 호소했다. 전하, 명나라로 피신하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 조선을 포기하시게 됨을 모르옵니까? 조선을 선선히 일본에게 내주고자 하십니까? 만일 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수습되면 백성을 등진 왕을 누가 인정하며 받아 드리겠습니까? 그리고 명국 또한 조선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지니게 되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옵소서! 선조는 귀찮았다. 왕궁을 떠나 평양으로 의주로 피난하는 생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