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로 빚을 얻도록 합니다. 또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들여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지요. 그러면서 1906년, 1,300만 원이던 일본에서 빌려온 빚이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민족운동의 하나로 국채보상운동이 펼쳐졌지요.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제안된 것은 1907년 1월 29일 광문사 문회(文會) 특별회였는데 이 자리에서 서상돈은 모든 국민이 금연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했고,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면서 즉석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됐지요.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전국 곳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다. 2,000만 민중이 3달 기한으로 담배 피우는 것을 그만두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마다 매달 20전씩 거두면 1,300만 원이 될 수 있다. 설령 다 차지 못 하는 일이 있더라도 1원부터 10원, 100원,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가 밥반찬이나 군것질로 즐겨 먹는 오징어의 한자말은 ‘오적어(烏賊魚)’ 또는 ‘묵어(墨魚)’입니다. 오적어는 까마귀 오(烏)와 도둑 적(賊), 고기 어(魚)가 합쳐 생긴 말로 여기에는 재미난 유래가 있습니다. 오징어란 녀석은 물 위에 죽은 듯이 떠 있다가 날아가던 까마귀가 이를 보고 죽은 줄 알고 쪼려고 할 때 발로 감아 잡아서 재빨리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는다고 해서 오적어(烏賊魚)입니다. 그래서 오징어는 까마귀 도둑이 된 것이지요. 또 다른 별명 묵어는 먹물을 지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징어와 관련된 말에는 ‘오징어묵계’라는 것도 있습니다. 조선후기에 쓰인 요리서 《소문사설(謏聞事說)》에 보면 오징어묵계 얘기가 나옵니다. 이 책에 보면 “오징어는 뱃속에 먹물이 있어 그것으로 글씨를 쓸 수 있다. 다만 세월이 지나면 글씨 흔적이 사라져 종이 위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예전에 간사한 백성이 이것으로 문서를 만들어 사람을 속였으니 송사를 맡은 관리는 알아두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믿지 못할 약속이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오징어묵계라”합니다. 특히 젊은 남녀가 한 사랑의 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치욕스러운 역사입니다만, 명성황후는 일제의 흉계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조선의 국모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했고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명성황후 유물은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2010년 10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를 보면 명성황후가 쓴 많은 한글편지와 아름다운 시전지(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실린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기대 학술연구 교수 글에 따르면 현재까지 찾아진 명성황후 편지는 모두 134점 정도이며 이 편지글은 오늘날 귀한 유물입니다. 그동안 실물이 확인된 황실 여성 최초의 한글편지는 인목대비 김씨(선조 비) 것이 있으며, 이밖에 남아있는 것은 장렬왕후 조씨(인조 비), 인현왕후 민씨(숙종 비), 인선왕후 장씨(효종 비), 혜경궁 홍씨, 순명효황후 민씨(순종 비) 등이 쓴 편지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 한문에 찌든 사대부가와는 달리 한글을 살려 편지를 썼고, 교지 글도 한글로 쓰는 등 글줄깨나 하던 학자들 대신 한글을 사랑하였으며 이것은 그동안 한글 연구와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월 11일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나라 밖에 있던 조선시대 나전함이 기증되었습니다. 이 나전함은 조선 16세기 나전칠기 공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라는 평가입니다. 이 기증품과 매우 유사한 조선시대 나전함으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나전함 1점과 동경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본중요문화재 나전함 1점 등 전 세계에 4점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희귀한데 그 까닭은 나전함의 소재가 나무여서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불에 타서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나전함은 세로 31cm, 가로 46cm 정도로 귀중품이나 문방구 등을 보관하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칠을 하기 전 함을 직물로 싸, 습기로 나무가 변형되는 것을 방지했는데 이는 주로 고급 칠기를 제작하는 데에 사용된 기법이지요. 또 망치로 두들겨 연꽃을 표현한 타찰법이라든지 줄기를 '끊음질'로 표현한 것들은 기존 고려 나전 칠기에서 볼 수 없었던 특징이라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말합니다. 상자 전체에 여러 모양의 나전 연꽃들이 꽉 차게 배열되어 있으며, 각 꽃 장식을 동그랗게 감싸듯 배치된 넝쿨 줄기, 잎사귀 그리고 띄엄띄엄 들어간 칠보문이 그 화려함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인 1914년 오늘(1월 14일)은 철도 호남선이 개통된 날입니다. 그런데 이 호남선은 당연히 서울(상행선)로 가는 철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목포에서 출발한 호남선은 대전역이 마지막 역이었습니다. 곧 호남선은 서울로 가는 철로가 아니라 대전역에서 1905년 1월 1일 개통된 경부선과 만나 부산 방향(하행선)과 연결했을 뿐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호남선은 일제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에서 나온 쌀을 철도와 군산ㆍ목포항을 이용해 수탈해 가기 위한 것입니다. 역시 일제가 우리나라에 철도 가설한 것은 전쟁을 위한 것과 원활한 식민 지배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참고로 지난 2018년 5월 8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의 제20회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의결하면서 철도의 날이 기존의 9월 18일에서 6월 28일로 바뀌게 됩니다. 그동안 일제 강점기 시절 한반도 침탈을 목적으로 건설한 경인선 개통일(1899년 9월 18일)이 철도의 날’로 지정된 것을 우리나라 최초 철도국 창설일인 1894년 6월 28일로 변경하는 안이 의결된 것입니다. 기존의 철도의 날인 9월 1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전기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 1575년 10월 29일 기록을 보면 다락방의 책을 중당(中堂, 집 가운데의 마루)으로 옮기는데 모두 3,500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암일기》에 여러 차례 걸쳐 책을 옮기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이 3,500권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책 구하기가 쉬운 요즘에도 개인이 책 3,500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치 않아 3,500권만 해도 엄청난 양이지요. 조선시대 책의 인쇄본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과 지방의 감영, 군ㆍ현 등에서 찍는 소량일 뿐입니다. 또 그것마저 교서관에서 찍은 것은 일부 진상하고, 일부는 중앙부처가 간직하게 하며, 그 나머지가 종친이나 높은 벼슬아치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서관이나 지방관에게 부탁하여 별도로 후쇄본을 찍기도 하지만, 인쇄본을 얻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또 어떤 이는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는 이에게 부탁하여 사 오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쇄본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책을 일일이 베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베끼는 것도 남에게 부탁해야 하므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흥선대원군(1820∼1898)의 관복에 달았던 ‘기린무늬 자수 흉배’가 있습니다. 가로 21.5㎝, 세로 21㎝ 크기의 이 기린흉배는 구름무늬 비단 바탕에 약간 검은 빛이 도는 청색 단에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았지요. 기린은 봉황, 거북이, 용과 함께 영험한 동물을 상징해왔습니다. 기린은 인(仁)을 존중하고 의(儀)를 지키는 명철한 동물로 어진 덕의 세상에 출현한다고 합니다. 흉배는 조선시대 임금과 문무백관의 집무 중 입는 옷에 붙이는 것으로 품계에 따라 무늬를 달리하는데 자수의 섬세함과 다양한 무늬는 옷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2월 10일 치 기록에 따르면 흉배의 무늬를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문관 1품은 공작(孔雀), 무관 1, 2품은 호표(虎豹, 범과 표범), 대사헌(大司憲)은 해태(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하응은 영조의 증손인 남연군의 아들로, 순조 20년(1820)에 태어났습니다. 헌종 9년(1843) 흥선군으로 봉해지고 철종 14년(1863) 임금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라 고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인 소한(小寒)으로 한겨울 추위 가운데 혹독하기로 소문난 날입니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든가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 ‘소한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라는 말처럼 소한 추위는 예부터 대단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매서운 추위가 오면 땔감이나 겨울옷이 변변치 않았기에 견디기 참 어려웠지요. 그래서 동사(凍死) 곧 얼어 죽는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춥고 눈이 많이 와야만 그해 풍년이 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소한 추위라는 것은 꼭 있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또 추위를 겪어야만 따뜻한 봄날의 고마움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추사는 자신의 그림 세한도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다행히 이번 소한은 추위가 누그러졌습니다. 겨울철 겨울나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우리는 따뜻한 차와 신맛이 나는 과일을 권합니다. 한방에서는 ‘총백’이라고 부르는 ‘파뿌리’를 물에 넣고 끓여 마시면 땀을 내주고 기침, 가래를 삭여주며, 항균 작용도 있어 감기 예방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전주박물관은 오는 2월 26일까지 특별전 “깨달은 수행자, 나한: 전라도와 강원도 나한의 만남”을 열고 있습니다. 나한(羅漢)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을 다해 수행하여 아무 괴로움도 없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던 불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열반(涅槃)에 드는 것을 미루고 중생 곁에 머물며, 불법(佛法)을 지키고 모든 사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보살폈습니다. 원래 강원도 영월 창령사(蒼嶺寺) 터에서 2001년 오백나한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오백나한은 국립춘천박물관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부산박물관에 이어 이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이곳 전주박물관은 영월 창령사(蒼嶺寺) 터 오백나한상과 함께 담양 서봉사(瑞峯寺) 터 나한상, 나주 불회사(佛會寺) 나한상, 남원 실상사 서진암 나한상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강삼혜 학예연구관은 “이상하게도 오백나한상 앞에만 가면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발길이 오래 머무르곤 했다.”라고 말합니다. 나한은 바로 우리와 닮은 친근한 모습으로 바로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며, 언제나 복을 내리고 신묘한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