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용천을 떠나 의주에 도착하여 목사(牧使)의 관청에 좌정하였다. 이때 고을 사람들이 평양이 포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흉흉하여 두려워하더니 명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 성안으로 들어와 약탈하자 백성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성안이 텅 비었다. 목사 황진(黃璡)과 판관 권탁(權晫) 등이 벼슬아치들과 관아의 여종 두어 명을 직접 거느리고서 임금의 수라(水剌)를 장만하였으며 호종한 관원들은 성안의 빈집에 분산 거처하였다. 꼴과 땔나무가 계속 조달되지 아니하여 비록 행재소라고는 하지만 적막하기가 빈 성(城)과 같았다.” 이는 선조 25년(1592년) 한양이 함락되기 사흘 전인 4월 30일 새벽 백성 몰래 궁궐 뒷문을 통해 한양을 나와 22일 뒤 의주에 도착했을 때의 기록입니다. 문제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줄 것으로 생각한 선조의 뜻과는 달리 명나라 병사들은 성안으로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성안이 텅 빌 수밖에 없었지요. 김영진이 교수가 쓴 책 《임진왜란(성균관대학교출판부)》에 보면 조선 중기의 문신ㆍ정치인이자 성리학자인 윤두수는 선조에게 일갈하는 내용이 나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으뜸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 가운데 <무동(舞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거기엔 무동이 춤을 추는데 위 맨 왼쪽에 좌고를 치는 이가 있으며, 그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구와 두 대의 향피리, 대금ㆍ해금이 연주합니다. 여기서 ‘향피리’란 중국에서 들어온 당피리에 견준 우리 고유의 피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무동>의 그림에서 보는 이런 악기 편성이 삼현육각입니다. ‘삼현육각(三絃六角)’은 조선시대 궁중무용과 행진 음악, 지방 관청의 잔치, 높은 관리의 행차, 향교 제향 그리고 각 지방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두루 쓰이던 민간의 주류음악이지요. 삼현육각은 <무동>에서처럼 6명으로 구성되지만. 경기ㆍ호남ㆍ해서ㆍ영남 등 지역에 따라 악기 종류, 편성인원,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에 조금씩 차이를 보입니다. 삼현(三絃)이라 해서 3대의 현악기를 뜻하지는 않으며, 삼현육각이 주로 연주하는 음악이 <삼현영상회상>이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또 육각(六角)은 피리를 불고 북을 치는 6명의 연주자를 말합니다. 조선시대 민간음악의 주류를 이루던 삼현육각은 광복 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박물관은 오는 7월 16일(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천마, 다시 만나다」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정기 천마총 발굴단장은 “‘아차!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라고 1973년 발굴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백마처럼 보이는 말 그림입니다. 말다래는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지요. 신라의 예술혼이 즈믄해(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있었던 세계적 유물 천마도. 김정기 단장은 유기물로 된 유물이 햇빛에 노출돼 미세한 가루로 변하여 감쪽같이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경험했기에 또 그런 일을 당할까 봐 눈앞이 캄캄해진 것입니다. 심하게 썩은 상태였던 말다래. 발굴단은 겹친 말다래 사이로 여러 개의 대칼을 조심스럽게 꽂아 넣고 그 밑으로 켄트지를 끼워 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마도 말다래를 무사히 걷어낸 다음 소독된 화선지로 쌓아 상자에 집어넣음으로써 숨죽였던 천마도 발굴을 끝낸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 망종입니다. ‘망종(芒種)’이란 벼, 밀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라는 속담이 있는 망종 무렵은 보리를 베고 논에 모를 심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고 할 만큼 한해 가운데 가장 바쁜 철입니다. 그런데 보리 베기 전에는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6월 7일 치 동아일보에도 ”300여 호 화전민 보리고개를 못 넘어 죽을지경"이라는 기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또 ‘보릿고개’를 한자로 쓴 ‘맥령(麥嶺)’과 더불어 ‘춘기(春饑)’, ‘궁춘(窮春)’, ‘춘빈(春貧)’, ‘춘기(春飢)’, ‘춘기근(春飢饉)’, ‘춘궁(春窮)’, ‘궁절(窮節)’ 같은 여러 가지 말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옵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망종 무렵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많았습니다. 보리는 소화가 잘 안돼 ‘보리방귀’라는 말까지 생겼지만, 보리방귀를 연신 뀔 정도로 보리를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기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상이 하교하기를, ‘막 병란(兵亂)을 겪었는데 또 전에 없는 가뭄과 우박의 재해를 만났다. 며칠 내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침식조차 잊고 만다. 지금, 이 재변은 실로 내가 우매한 탓에 일어난 것으로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비를 빌고자 한다. 해당 조에 말하라.’ 하였다. 예조가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인조실록》 인조 6년(1628년) 5월 17일 기록입니다.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던 조선시대엔 모내기 전인 망종과 하지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까지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고,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 하여 임금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고 음식을 끊기까지 했으며, 궁궐에서 초가로 옮겨 거처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년) 5월 6일 “가뭄으로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내다.”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기우제’라는 말이 무려 3,122건이나 나옵니다. 특히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년) 7월 2일에는 ”사내아이 수십 명을 모아 상림원에서 도마뱀으로 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목멱산(木覓山, 남산) 아래 치인(痴人, 바보)이 있다”로 시작하는 책 《간서치전(看書痴傳)》은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쓴 책입니다. 평생 이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는 그는 자신을 목멱산 아래 책 읽기에 미친 ‘독서광(讀書狂)’ 바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덕무는 선비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은 물론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 등 많은 책을 펴낸 학자로 유명하지요. “지난 경진년ㆍ신사년 겨울에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나의 게으른 성격으로도 밤중에 일어나서 급작스럽게도 《한서(漢書)》 1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으니, 이러지 아니하였다면 거의 묏자리 귀신이 될 뻔하였다. 어젯밤에 집 서북 구석에서 독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노론(魯論)》 1권을 뽑아서 바람을 막아 놓고 스스로 변통하는 수단을 자랑하였다.” 이는 이덕무가 자신의 책 《청장관전서》에서 말한 얘기입니다. 이덕무는 옛사람이 금은 비단으로 이불 해 덮은 것보다 책으로 해 덮은 나의 이불이 낫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며칠 전 ‘데일리안’에는 “올봄엔 '데님 셋업'이 유행하며 이른바 ‘청청 패션’이 재귀했다.”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1930년대, 서부극이 유행하며 영화 속 주연 배우들이 청바지를 입고 등장하여 유행했던 그 ‘청청패션’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옷의 유행이 조선시대 한복에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의 저고리를 보면 조선 초기인 1580년 청주 한씨의 덧저고리 길이는 무려 81cm나 되어 엉덩이까지 내려갔는데 1670년대의 누비 삼회장 저고리를 보면 42cm로 짧아집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오면 극단적으로 짧아졌지요. 1780년 청연군주의 문단 삼회장저고리는 19.5cm이며, 조선말 1900년대에 아주 짧아진 저고리는 길이가 12cm밖에 안 된 것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짧아진 저고리는 젖가슴이 보일락 말락 하는 것은 물론 배래(한복의 옷소매 아래쪽 부분)도 붕어의 배처럼 불룩 나온 ‘붕어배래’가 아니라 폭이 좁고 곧은 ‘직배래’여서 이 정도 되면 누가 입혀주지 않으면 혼자는 도저히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맵시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던 것이 1930년대에 오면 다시 저고리 길이가 길어져 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올렸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1894년~1895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물로 썩은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입니다. 한국이 번영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놓았으며, 유사한 외국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 관아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민ㆍ관 협력(거버넌스)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지요. 이는 19세기 당시 전 세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었던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평가됩니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조선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값어치를 지향했던 기억의 저장소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지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과 함께 〈4.19혁명기록물〉도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렸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제 흙비가 내렸으니 하늘이 내리는 벌이 가볍지 아니하다. 예전에 수(隋)나라 황제가 산을 뚫고 땅을 파며 급하지 아니한 역사(役事)를 하자 마침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번거롭게 일으키므로 백성의 원망이 ’흙비‘를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숭례문(崇禮門)의 역사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아니겠는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 이는 《성종실록》 성종 9년 4월 1일(1478년) 기록입니다. 이런 흙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183번이나 나옵니다. 심지어 태종 6년(1406년)에는 동북면(東北面) 단주(端州, 함경남도 단천)에 흙비가 14일 동안이나 내렸다고 하고, 세종 1년(1419년) 3월 13일에는 흙비가 내려 젖은 곳이 새까맣게 되니 ‘먹비’라 하였다고 했으며, 세조 13년(1467년) 5월 28일에는 어유소(魚有沼)가 거느린 군사는 흙비로 인하여 군사의 복장과 장비는 물론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기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1965년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RCY)가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이후에 모두가 따라 합니다. 그런데 이날을 ‘스승의 날’로 한 것은 바로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는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라는 세종임금의 탄생 기록이 보입니다. 세종이 태어났다는 준수방은 지금의 어디일까요?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일대로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현재는 경복궁 전철역에서 북쪽으로 200여m쯤 가면 길가에 초라하게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 하나만이 달랑 있습니다. 별로 행적이 없는 사람들도 생가 하나쯤 복원해두는 세상인데 우리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신 세종대왕의 생가 복원이 안 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세종임금 탄신 기념관이 없으니 올해도 문화재청은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