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실록 5년(1423) 2월 10일 기록을 보면 당시 요리와 관련된 사옹원에 소속된 실제 노비는 250여 명이 넘었습니다. 또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사옹원에서 궁에서 요리 관련 일을 하는 노비의 숫자는 400여 명이었지만 잔치가 있게 되면 그 수는 더 늘어났으며, 요즈음으로 치면 주방장이었을 숙수(熟手)가 있고 각 영역의 전문가들인 각색장(各色掌)이 있었지요. 이 기록에는 그 각색장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고기 요리를 담당한 별사옹(別司饔), 찜 요리 전문가 탕수증색(湯水蒸色), 채소요리 전문가 채증색(菜蒸色), 굽는 요리 전문가 적색(炙色), 밥 짓는 반공(飯工), 술을 담그는 주색(酒色)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재미난 것은 물 긷는 수공(水工),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 쌀을 고르는 미모(米母), 상차림 전문가 상배색(床排色), 상에 음식을 높이 괴는 앙련(仰聯), 음식을 보관하는 장자색(藏子色)도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수라간에서 요리하는 일이 얼마나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각 수라간에 배치된 미모(米母)와 떡 전문가 병모(餠母)를 빼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해 12월 9일부터 올 1월 21일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MBC 금토드라마로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7년 전 세자빈을 잃고 금혼령을 내린 임금 앞에 죽은 세자빈으로 빙의할 수 있다는 혼인 사기꾼이 나타나 벌이는 궁궐 사기극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비나 세자빈을 들이려 할 때 ‘간택령’을 내렸고 이와 함께 ‘금혼령’을 함께 내렸지요. ‘금혼령’은 나라에서는 신중하게 국모감을 고르려고 내리려는 것이겠지만, 백성들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왕비나 세자빈을 고를 때의 금혼령만 있는 줄 알지만 《순조실록》 순조 23년(1823년) 5월 10일 기록에 보면 "명온 공주(明溫公主)의 부마(駙馬)를 이제 간택하여야 하겠으니, 15살에서 12살까지는 금혼(禁婚)하고, 제외 대상자 이외는 단자를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여 공주의 배필을 구하기 위한 남성 금혼령도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힐 일이 고려시대에 보입니다.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는 고려에게 공녀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충렬왕은 고려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기 위해 금혼령을 내렸습니다. 13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일곱째 입하(立夏)입니다. 입하는 '여름(夏)에 든다(入)'라는 뜻으로 푸르름이 온통 뫼(산)와 가람(강)을 뒤덮어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는 절기지요. 입하는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하며,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릅니다. 이맘때는 곡우에 마련한 못자리도 자리를 잡아 농사일이 좀 더 바빠지며, 세시풍습의 하나로 쑥버무리를 시절음식으로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입하에 산과 들에 가보면 하얗고 탐스러운 이팝나무를 봅니다. 요즘은 도심의 가로수로도 인기를 끕니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입하 무렵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또 이밥은 하얀 쌀밥을 뜻하는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여 일반 백성들도 쌀밥을 먹게 되었고, 그래서 백성들이 이 쌀밥을 '이성계가 준 밥'이란 뜻으로 '이밥'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고도 하지요. 실제 흐드러진 이팝나무꽃을 보면 마치 쌀밥(이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은 모양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5월 3일 치 기록에 보면 “경성이 함락되자 도검찰사 이양원 등이 도망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뒷부분에 보면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으므로 왜적 대장 평수가(平秀家)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놀라서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그래서 평수가는 할 수 없이 남별궁(南別宮, 소공동에 있던 태종의 딸 경정공주가 살던 궁)으로 옮겼다.”란 기록이 보입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면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廟)’라 하고, <제의(祭儀)>에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임금이 도성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세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종묘는 사직과 함께 나라의 뿌리였습니다. 그래서 종묘에서 지내는 ‘종묘대제(宗廟大祭)’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포함된 의례로, 임금이 직접 거행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종요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前) 판서 김만중이 남해(南海)의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는데, 나이는 56살이었다. 사람됨이 청렴하게 행동하고 마음이 온화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 벼슬을 하면서는 언론이 강직하여 선(善)이 위축되고 악(惡)이 신장하게 될 때마다 더욱 정직이 드러나 청렴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고, 벼슬이 높은 품계(品階)에 이르렀지만 가난하고 검소함이 유생(儒生)과 같았다. 왕비(王妃)의 근친(近親)이었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경계하여 권세있는 요로(要路)를 피하여 멀리했고, 양전(兩銓) 곧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대제학을 극구 사양하고 제수받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대단하게 여겼었다.” 이는 《숙종실록》 숙종 18년(1692년) 4월 30일 기록으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 1692)의 졸기입니다. 김만중은 우리 고전소설의 으뜸이라 평가됨과 동시에 동아시아 고전소설의 절정이라고도 하는 《구운몽(九雲夢)》, 《금오신화(金鰲新話)》, 《운영전(雲英傳)》 등을 쓴 작가입니다. 특히 《구운몽》이 세상에 나오자 사대부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임금 영조 또한 신하들과의 대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일본에서 환수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지난달 30일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이번에 환수된 <대동여지도>는 1864년 제작된 목판본에 가필, 색칠하고 <동여도>에 기술되어 있는 지리정보를 필사(筆寫)해 더한 것으로, <동여도>와 <대동여지도>가 하나의 지도에 담겨 있어서 목판본인 <대동여지도>의 한계를 <동여도>의 주기 내용을 필사해 보완한 처음 사례로 확인됩니다. <동여도>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의 저본(底本)으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조선전도로, 조선시대의 교통로와 군사시설 등의 지리정보와 약 18,000여 개에 달하는 지명이 실려 있는 채색 필사본입니다. 이에 반해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 새겨야 하는 한계 때문에 많은 지명과 주기(註記)가 생략되어 있지요. 이번에 환수된 <대동여지도>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것은 <동여도>의 주기 내용이 대부분 필사되어 상세한 지리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예를 들어, 백두산 일대가 묘사된 제2첩의 경우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는 1919년,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나라 밖 독립운동을 이끄신 이동녕 선생이 하신 말씀입니다. 선생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에 선출되어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이어 정부의 관제와 국무총리 그리고 각 구성원을 뽑았습니다. 또 헌법으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ㆍ통과시켰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나라 안팎에 선포함으로써 한국 역사상 첫 민주공화제 정부 수립을 이끌었지요. 선생은 이후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고난을 함께하며 나라 밖 독립운동을 끌어나가는데 온 몸을 던졌습니다. 선생은 또 1939년 10월 25일 국무회의에서 주석으로 다시 선출되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체제를 확대ㆍ강화하고 일제에 대항할 무장 세력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하다가 1940년 3월 13일 치장에서 지병이었던 폐렴으로 72살을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임시정부는 치장 산기슭에 터를 마련하고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갓 올린 잎새를 달고 별 바라보던 가지 끝에 곡우(穀雨) 나리시면..... 겨우내 할퀴던 바람이 첫사랑의 숨결처럼 달콤하고 별빛 부서지던 잎새, 촉촉한 입술을 반긴다. 곡우 발길 아래서 부정한 사람은 악귀를 몰아내고 볍씨를 담그는 농부의 손은 조심스럽다.” 홍순천 시인의 시 ‘곡우(穀雨)’ 일부입니다. 내일은 24절기의 여섯째로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穀雨)’지요 “곡우(穀雨)는 봄비(春雨)가 내려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한다.”라고 하여 붙여진 말인데 곡우 무렵이면 못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농사철로 접어듭니다.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와 같은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합니다. 시골에서는 못자리할 볍씨 담그기 따위로 바쁠 때인데 볍씨 담그기 전날은 부정 탈까 봐 부부가 잠자리도 하지 않습니다. 또 곡우 무렵엔 나무에 물이 많이 오르는 때인데 이때 사람들은 곡우물을 마십니다. 곡우물은 주로 산 다래, 자작나무, 박달나무 따위에 상처 내서 흘러내리는 수액인데 몸에 곡우물이 좋다고 해서 예전부터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에서는 깊은 산 속으로 곡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는 고등학교 야구 중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선수들이 입고 나온 운동복에는 학교 이름이 모두 한자로 쓰였습니다. 운동복에 학교 이름을 쓰는 것은 자기의 학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알리려는 뜻일 텐데 굳이 한자로 쓰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학교의 이름을 몰라도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자료를 찾으려고 1960년 치 조선일보를 보니 온통 한자투성이였습니다. 신문 이름은 물론 1면 머리기사부터 정치, 사회면은 물론 광고면까지 우리나라 신문이라고 하지 못할 만큼 한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요. 특히 광고면의 영화광고도 물론 한자로 도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情熱的인 長時間킷스나 가벼운킷스를 不問하고 입과 입이 交錯된 것을 1回로 셈함. 主役킷스와 助演陣킷스를 모두 셈해야 됨.”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4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시고 광복 뒤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지내시면서 각종 교과서에 한글만으로 가로쓰는 체재를 확립한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제강점기 한 음식점의 금서집(錦書集,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입었던 예복인 당의가 소장돼 있습니다. 저고리 위에 덧입었었던 당의는 색에 따라 연두ㆍ자주ㆍ남색ㆍ백색 당의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가장 많이 입은 것은 연두당의입니다. 당의에는 보통 겉감을 녹색으로 하고 안감은 붉은빛으로 합니다. 여름에는 당의 속에 슬쩍 비치는 저고리와 치마의 사각거림, 겨울에는 초록 비단에 화려한 금박무늬가 돋보이지요. 여름에 입는 홑당의는 당적삼ㆍ당한삼이라고도 합니다. 당의의 특징은 한복의 곡선미를 강조한 데 있으며 길이는 무릎까지 오고 소매가 좁았습니다. 앞뒤 길이는 저고리 길이의 약 3배 정도가 되며 겨드랑이 아래부터 양옆이 트이고, 맨 아랫부분인 도련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룹니다. 고름은 자주색으로 왼쪽 코깃에 2장을 겹쳐 달고 오른쪽에 짧은 고름을 1장 달지요. 당의는 조선시대 여성 예복의 하나로 왕실에서는 크고 작은 예식과 윗분한테 문안할 때 입었을 뿐만 아니라, 재료와 꾸밈, 구성에 차이를 두어 상궁과 내인(內人)들도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또 양반집 부인들은 입궐할 때 예복으로, 일반인들은 혼례복으로 입기도 하였지요. 당의를 혼례복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