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4월 6일( 저녁 7시 30분 백제음악 ‘수제천’을 들었습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은 올해 정기공연으로 가곡 ‘태평가’, ‘영산회상’, ‘해령(解令)’과 함께 <정악사색(正樂四色)>을 선보인 것입니다. 특이 이 가운데 더욱 관심을 끈 것은 ‘수제천(壽齊天)’이었는데 이 음악은 서양 악기의 박자를 측정하는 메트로놈이란 기계로도 측정하기조차 힘들어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을 크게 초월해 있다는 음악이지요. ‘수제천(壽齊天)’은 ‘빗가락정읍’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노래 ‘정읍사’인데 조선 중기 이후 노래는 없어지고 관악 합주 형태로 남아 있는 음악입니다. 이날 공연에서 ‘수제천’을 듣는 내내 귀에 잘 들어오는 것은 주선율 피리 소리였습니다. 그 작은 악기들에서 들려오는 ‘앵앵앵’하는 소리는 예악당을 꽉 메우고 남는 것은 물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잔향이 오래도록 남았지요. 모든 국악에 반주악기로 쓰이는 장구는 단 한 대로도 ‘수제천’에서 전혀 위축됨이 없이 담백한 소리를 내 강력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려터진 음악에도 아무도 긴장을 늦추는 청중은 없었지요. 다만, 음악의 끝을 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청명(淸明)입니다. 청명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하루 차이인 내일은 명절의 하나로 지냈던 ’한식(寒食)‘입니다. 이 ’청명‘과 ’한식‘은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이어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에 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는데 이를 “사화(賜火)”라 하며, 임금은 이 불을 문무백관과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줍니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하지요. 청명 무렵에는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논농사의 준비 작업으로 봄밭갈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가래질 말고도 논밭둑 다지기, 보리밭 매기, 푸성귀 씨앗 뿌리기 같은 일들을 하느라 일손 구하기가 힘들지요. 이날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땅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제주도 무고한 양민 3만여 명이 학살당한 제주4.3항쟁이 시작된 날입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가 있습니다. 비석 앞 설명판에는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4.3항쟁으로 붉은빛이 덧 씌워지고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된 제주, 이제 그곳의 어둠을 걷어내고 해원의 살풀이를 해야만 합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이 일어난 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권 수립 반대를 목표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이 벌어진 것이 <제주4.3항쟁>입니다. 이 때 죽은 3만이란 숫자는 제주도민의 1/9 정도가 되기도 하지만, 이 희생자 가운데 33%가 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먹었던 과자를 흔히 “한과(韓菓)”라 하는데 이는 한복, 한식처럼 서양의 과자나 중국의 한과(漢菓)와 구분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 토박이말로 “과줄”이지요. 1913년 밀양손씨가 펴낸 음식의 조리법과 재료 손질 등에 관하여 기록한 조리서 《반찬등속》이란 책 가운데는 ‘과줄하는 이야기라’라고 하여 과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과줄”에는 유밀과, 약과, 정과, 다식, 숙실과 따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줄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유과”라고도 하는 “유밀과”를 꼽아야 합니다. 유밀과는 찹쌀가루에 콩물과 술을 넣어 반죽하여 삶아낸 것을 얇게 밀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내어 쌀 고물을 묻힌 것이지요. 유밀과는 크기나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큰 것은 “산자”, 손가락 굵기는 “강정”, 팥알만 하게 썰어 말려 튀긴 뒤에 엿으로 뭉쳐 모나게 썬 것을 “빙사과(氷砂果, 賓砂果)”라고 합니다. 그 밖에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어 만드는 것으로 제사 지내는 데에 빠지지 않는 “약과”, 생과일이나 식물의 뿌리 또는 열매에 꿀을 넣고 조린 “정과”, 쌀, 깨, 밤 등을 가루 낸 것이나 송화가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13년 전인 1910년 오늘(3월 26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 강점기 독립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투사로 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재판 내내 당당하게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안 의사는 일본 검찰에게 이토의 15개 죄상을 낱낱이 밝혔지요. 그 죄상을 보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독립을 요구하는 죄 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죄인을 처단한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음을 당당히 밝혔지요. 안중근 의사를 조사했던 일본인 검사는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운현(雲峴)이란 글자가 쓰인 <백자 청화 넝쿨무늬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청화(靑畫) 물감만으로 세련된 화려함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목은 곧고 긴 편이며 몸체 아랫부분은 공처럼 둥글지요. 유색은 맑고 환하며 청화의 발색도 밝고 선명합니다. 몸 전체를 여백 없이 가득 채운 무늬는 영지버섯 넝쿨무늬입니다. 영지버섯 넝쿨무늬는 십장생의 하나로 19세기에 복을 비는 기복(祈福) 사상의 유행을 보여주면서도, 그림을 그린 솜씨와 정성은 다른 청화백자들과 견줘 한눈에 띄는 수준입니다. 병 전체에 농담(濃淡)을 살려 영지 넝쿨을 정성껏 그렸고 입구 부분과 몸체 밑 부분에 돌린 독경이나 설법 때 법사가 손에 드는 도구인 ‘여의’ 머리 무늬와 연꽃잎 무늬 부분까지 세부를 정성스럽게 묘사하고 청화 물감을 채워 넣었습니다. 굽바닥에는 청화로 ‘운현(雲峴)’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는데, 이로 보아 이 병은 1864년 이후에 만들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살던 운현궁에서 쓰였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운현(雲峴)이 쓰인 <백자 청화 넝쿨무늬 병>은 굽바닥에 사용처를 쓴 19세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는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는 책들이 여럿 있습니다. 먼저 영조 임금의 명으로 펴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지봉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오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풍석 서유구(徐有,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같은 책들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1614년에 펴낸 책으로 우리나라 첫 문화백과사전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이 《지봉유설》의 폭넓은 지식을 보면 권 2의 〈외국조〉에 섬라(暹羅, 태국), 진랍국(眞臘國, 캄보디아), 방갈자(榜葛刺, 방글라데시), 안남(安南,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물론 불랑기국(佛狼機國, 포르투갈), 남번국(南番國, 네덜란드), 영결리국(永結利國, 영국) 같은 유럽 나라들의 정보까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은 당시 중국이 한자로 표기하던 것을 들여온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우리 겨레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댈 수 있는 기둥이나 벽만 나오면 우리는 으레 말뚝박기했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를 못 하는 녀석과 짝이 되면 늘 말이 되어야 했다. 또 상대편에 덩치 크고 뛰어오르기 잘하는 녀석이 있으면 이건 완전 죽음이다. 오늘은 말만 했지만, 내일은 가위바위보를 잘해 신나게 말을 타봐야지.” 한 블로그에 나오는 ‘추억의 말뚝박기’ 이야기입니다. 예전 컴퓨터가 없던 시절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말뚝박기를 했습니다. 지방에 따라선 말타기”라고도 했던 이 놀이는 남자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쪽은 말이 되고 다른 한쪽은 이 말에 올라타고 노는 놀이였지요. 먼저 양쪽에서 각기 대장을 뽑아 가위바위보를 한 다음 진 쪽이 말이 되는데 대장이 담벽 같은 데에 기대서고 어린이들은 허리를 굽힌 자세로 앞사람의 허벅지를 꽉 붙잡고 잇달아 말이 되었습니다. 이긴 쪽 아이들은 차례로 멀리서부터 달려와 앞쪽으로부터 말을 타 나가지요. 이때 말이 쓰러지면 몇 번이고 새로 말을 만들어야 하며, 말을 타다가 한 사람이라도 떨어지면 그쪽이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타는 쪽에서는 어떻게든지 말을 무너뜨리려고 일부러 험하게 말을 타는데 말은 무너지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나라 법 가운데는 <국어기본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2005년 1월 27일 법률 제7368호로 제정된 이 법은 “국어의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하여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하고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제정했다.”라고 합니다. 이 법의 중심에는 제14조 제1호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공공기관은 공문서뿐만 아니라 홍보물도 한글로만 작성하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정부, 지방자치단체와 이에 소속된 기관들은 한글에 영어와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을 넘어서서 영어와 한자를 주인처럼 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국립국악원은 프로젝트 이름을‘Gugak in 人’으로 썼고, 국립무형유산원은 특별전을 열면서 이름을 '함께 EAT다'라고 썼습니다. 이는 영어나 한자를 써서 유식한 체하려는 것인 모양인데 이렇게 썼다고 그들을 유식하게 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영어와 한자를 섞어 이상한 표기법을 만들어 국민에게 내보이는 것은 ‘우리말을 살려 쓰자는 뜻’에도 역행하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자나 영어를 쓰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배고파 지어 놓은 밥에 뉘도 많고 돌도 많다 / 뉘 많고 돌 많기는 임이 안 계신 탓이로다 / 그 밥에 어떤 돌이 들었더냐 / 초벌로 새문안에 거지바위 문턱바위 둥글바위 너럭바위 치마바위 감투바위 뱀바위 구렁바위 독사바위 행금바위 중바위 (가운데 줄임) 서강의 농바위와 같은 돌멩이가 하얀 흰밥에 청태콩에 많이 까 두른 듯이 드문 듬성이 박혔더라. 그 밥을 건목을 치고 이를 쑤시고 자세히 보니 연주문 돌기둥 한 쌍이 금니 박히듯 박혔더라. 그 밥을 다 먹고 나서 눌은 밥을 훑으려고 솥뚜껑을 열고 보니 해태 한 쌍이 엉금엉금.” 위 가사는 잡가 “바위타령”의 일부로 1900년대에 서울 풀무골[冶洞]의 소릿꾼 이현익이 처음 만들었으며 그 내용은 온 나라에 있는 유명한 바위 80여 종을 읊은 것입니다. 이 노래는 가사가 재미납니다. 자기가 지은 밥에서 돌이 나오니까 그것은 임이 안 계신 탓이라고 억지를 떱니다. 그러면서 온갖 바위 이름을 둘러댑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온갖 바위들은 서민들의 애환과 정이 듬뿍 담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삶이 답답하거나 힘들면 타령을 불렀습니다. 타령은 주로 서민들이 애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