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바다위에 난파 된 판옥선의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조선 수병의 참담한 몰골도 그대로 드러났다. 판옥선 한 척에 격군이 100여 명, 수군이 60여 명 탑승 했다면 약 2만 여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 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순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아 나왔다. 이럴 수는 없다. 개벽호의 전원이 울음을 삼켰다. 어제만 하여도 친구이며 형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린 현실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존자를 확인하라. 이순신은 목이 메어 소리쳤지만 바다는 응답하지 않았다. 첨사 이순신과 군관 나대용, 조방장 송희립 등이 사방을 둘러 봤지만 몇 구의 시체만 넘실대는 파도에 떠밀려 오르락내리락 할 뿐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믿을 수가 없다. 함대가 몰살이라니! 이순신은 급기야 통곡(痛哭) 하였다. 자신의 손으로 일궈낸 조선 수군의 정예병들이 아니던가. 조선수군의 위기를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를 당할지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과 같이 대업을 도모하려고 했건만, 그들은 원균의 지휘아래 칠천량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장군님! 갑자기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배수사는 이렇게 생존해 계시지 않소. 경상우수사 배설은 입맛을 다셨다. 나는 함대의 후미에 있었기에...... 포위를 당했다면 선단과 후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어떤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했느냐가 중요 합니다. 배설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지금 내게 전투도 하지 않고 꽁무니를 뺐다고 질책하는 거요? 난 그런 말을 드린 적이 없소. 배설은 몹시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서 한산도로 가자. 그곳에서 급수를 받은 후 일단 노량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왜적들은 곧 한산도 본영으로 쳐들어 올 태세이니까. 배설이 지휘하는 판옥선들이 무리를 지어 패잔병 신세로 개벽호를 지나갔다. 이순신은 역으로 부산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첨사 이순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에게 물었다. 장군, 적의 함대가 한산도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대로 향하다가는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두려운가? 장군님을 모시고 숱한 전투에 참여 했으나 그랬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무리한 항해가 아닙니까. 이순신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무리하지 않은 날들이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배설우수사! 이순신이 배설의 판옥선으로 다가가서 소리쳤다. 초췌한 몰골의 배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장군? 어떻게 된 것이요? 배설은 마치 지옥이라도 다녀 온 사람처럼 진저리를 쳤다. 우리 함대는 전멸했소. 전멸이란 말에 이순신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이 함대는 대업을 성취해야 할 막중한 함대였다. 조선을 수호하고 일본을 유린해야 할 함선이었다. 그런데 전멸이라면? 이순신은 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존한 함선이 그럼......? 우리들 뿐 이요. 130여 척이 출전하였는데 살아남은 함선이 고작 10척이라니! 이순신을 비롯한 개벽의 장수들은 눈앞이 캄캄 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송희립이 울분을 토해냈다. 배설은 몹시 지쳐보였다. 칠천량(漆川梁)에서 적들은 사방으로 조여 왔소. 왜적들은 우릴 함정으로 유인한 것이요. 원수사와 이억기수사, 최호수사 등 우리 모두 분전(奮戰) 하였으나 적들의 숫자가 워낙 대규모였소. 견내량과 춘원포 등지의 퇴로도 그들이 이미 봉쇄하고 있었소. 이순신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했다. 원수사는? 다른 분들의 생사는 어찌 됐소? 배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괴로운 듯 눈을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원수사가 위험하다. 이순신의 입에서 나온 원균에 대한 염려는 실로 의외였다. 이첨사를 비롯한 송희립과 나대용 등의 얼굴이 일제히 경직되었다. 그럼, 이 판옥선을 운행 하려는 것은 원균수사를 구하기 위함입니까?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원균이 누구인가?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앞장섰던 위인이 아니던가. 부하 장수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현 통제사 원장군은 장군에 대해서 비방과 모함을 일삼는 정적(政敵)이 아니옵니까? 정적이라? 예전에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닐세. 아니라 하시면? 내 꿈이 바뀐 것이지. 아니, 이제야 제대로 눈을 떴다네. 이첨사를 비롯한 송희립과 나대용 등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들로서는 이순신의 원대한 의도를 파악할 길이 없었지만 약간은 느낄 수가 있었다. 정도령이란 신비한 청년의 발언을 상기한 것이다. 새로운 군주의 나라. * * * 개벽이 드디어 바다를 갈랐다. 이순신과 그 측근들만을 태운 항해였다. 격군들은 신호에 따라서 손으로 배를 젓기도 하고 때로는 발을 맞춰서 배를 저었다. 110명으로 이루어진 격군들은 교대로 판옥선을 바다위에서 능숙하게 조정했다. 원수사의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이 판옥선은 장군님을 위하여 새롭게 제조한 것입니다. 제조비용은 저희를 비롯해서 호남의 각 상단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순간적으로 코등이 찡 하였다. 그렇습니다. 장군님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반드시 돌아오시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장군님을 위한 판옥선을 건조(建造)한 것입니다. 이순신이 판옥선을 어루만졌다. 장하도다. 그리고 고맙도다. 판옥선의 이름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뭐라 했는가? 개벽호(開闢號)! 정도령이 지었습니다. 새삼 정도령이란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자신을 찾아왔던 것도 그렇고 판옥선을 개조하여 보다 완벽한 군선으로 건조한 능력만 보더라도 대단한 인물이지 않은가. 게다가 서슴없이 그는 대업을 입에 올리며 천기를 누설 한다고도 말했다. 일찍이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 이순신은 들은바가 없었다. 정종사관! 종사관 지위에 있었던 정경달이 허리를 굽혔다. 예, 장군. 자네는 즉시 이 길로 영상을 찾아뵙고 오게나. 서애 대감에게요? 다른 이야기는 전할 것이 없고. 내 서신만 전해주고 답을 받아오게. 이순신은 지필묵(紙筆墨)을 가져 오라고 해서 그 즉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이 사람은 죽도에서 왔는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으니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장군을 알고 계시오? 조선 사람 치고 장군을 모르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장수가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역천(逆天)의 모함을 받아서 수인(囚人)이 되었으나 이는 예정된 시련이고 반드시 무사히 방면(放免)되실 것입니다. 군관 나대용은 믿고 싶었다. 사실이요? 우리 장군님이 무사히 석방되신다고요? 오호, 감사합니다. 바다의 용왕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그보다도 장군이 안계시니 두 분과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첨사 이순신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장군님과 혹 면식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첨사는 상대방을 유심히 살폈다. 준수한 용모에 푸른 도포가 바람결에 약간 나부끼는 것이 마치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인(仙人)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대용 역시 정도령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그러지요. 잠시 들어갑시다. 이첨사와 나군관은 그를 임시로 지어진 대기소로 안내했다. 격군들이 출항하기 전에 잠시 쉬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휴게실이었다.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막료 하나가 김충선을 지적했다. 예당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나를 깨우쳤다. 여진은 같은 동족(同族)이다. 우리는 형제다. 금나라의 후손이 우리인 것이다. 피를 흘리며 골육상쟁(骨肉相爭)을 해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예허부족장 예당케의 외침이 막사 안에 울려 퍼졌고 그의 막료들은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김충선이 생사의 기로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나는 기적의 순간이었다. 장군님, 장군님에게 달려갈 날이 좀 더 가까이 올 모양입니다. 이순신의 염원(念願)이 담겨있는 눈빛이 조선의 산과 들을 훌쩍 뛰어넘어서 여진의 벌판으로 치달려 왔다. 눈물이 울컥 김충선의 앞섬을 적시었다. * * * 정도령이라고 했는가? 이순신은 놀란 나머지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되 뇌이었다. 나대용 역시 적지 않게 놀란 얼굴이었다. 장군께서 그를 아십니까? 순천으로 날 찾아왔었네.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 이순신은 거기까지만 말을 꺼내고 더 이상 뒤를 잇지 않았다. 아니 계속해서 정도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가 이순신을 방문한 까닭도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정도령이 쏟아내던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김충선이 자진하여 적장을 암살하고자 계책을 내 놓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계책을 받아드려 실행에 옮기고, 오히려 적장에게 김충선의 잠입을 알려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주여진의 칸 누르하치의 행위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적장을 죽이려 했던 것은 죄목이 될 수 없다. 김충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민족의 성전(聖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 소생이 아직 어리고 일본과 조선의 전쟁터에서만 살벌하게 생존(生存)을 위한 싸움만 벌여 왔으니 오늘과 같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김충선은 그 자리에서 예허부족의 족장 예당카에게 큰 절을 올렸다. 정성과 성심을 다한 예를 취하는 김충선을 예당카와 막료들은 예사롭지 않게 주시했다. 이 예절의 의미는 무엇이냐? 사죄 올리는 것입니다. 여진 민족의 성스러운 전투에 외부인으로 개입한 것을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죽음으로서! 김충선은 눈을 감고 목을 길게 늘어뜨렸다. 장검을 쥐고 있던 막료 중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칼은 살벌한 빛으로 번뜩였다. 너의 목은 건주여진으로 돌려보내 질 것이다. 막료의 장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칼이 수직으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예당카의 부하들이 저마다 일어나 칼과 곤(棍), 철퇴 등을 움켜쥐고 족장 주변의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김충선을 내려다보는 예당카의 눈매가 섬뜩하도록 차가웠다. 이곳이 내 부락이요, 내 부족이 있는 곳인데 어디로 대피한단 말이냐? 너희 조선 왕은 도망갈지 몰라도 난 아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조선 왕이라고 부족장 예당카가 분명 말했다. 김충선은 순간적으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가 이미 탄로 난 것이 아닐까? 병장기를 휴대한 예허부족의 막료들이 김충선을 포위했다. 그럴 리가 없다! 김충선은 내심 부인했지만 예당카의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조선에서 온 장수라고? 김충선! 그대가 착각한 것이 있다. 김충선은 맥이 탁 풀렸다. 역시 예당카는 사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실수가 있었던 겁니까? 예당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오만한 어조로 말문을 이었다. 우리 만주의 여진족은 상대 적장을 암살하는 그런 비열한 방법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비록 서로의 의도가 달라서 전쟁을 벌이기는 하지만 우린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우린 하나의 민족이다. 그렇다면......? 건주여진의 칸이 내게 비밀서신을 보내왔다
[한국문화신문 =유광남 작가] 여기인가? 드디어 중앙의 대형 막사를 발견하였다. 입구에는 병사 두 명이 각기 장창을 꼬나 쥐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마침 주변은 오고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싶은 김충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구냐? 여기 하다부족의 장수가 혹시 오셨소? 병사 중 한 명이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하다부족의 진영은 서쪽에 자리하고 있소. 김충선이 아둔한 척 다시 되물었다. 그럼 여긴......어느 부족의 막사요? 병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허 족장님이 머물고 계신 본영을 모르고 있소? 김충선은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자 병사들을 향해서 벼락처럼 공격을 감행했다. 우측의 병사를 향해 발길질을 하는 동시에 손 안에 감추고 있던 암기로 좌측 병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쿠. 기습을 받은 병사들이 반격을 하지 못하도록 김충선은 복부를 걷어차여 쩔쩔매는 우측 병사의 목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었다. 동시에 좌측의 병사에게는 우측 병사와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비수를 힘껏 끌어 올렸다. 커억! 심장을 파고드는 칼끝의 여운이 손바닥으로 짜릿하게 파고들었다. 역시 고도의 간자(間者) 훈련을 받았던 김충선의 솜씨는 절륜했다. 이제 막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