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김충선은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하다부족의 누군가가 당신을 사주한 것이 아니고, 당신 스스로 범행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것을 난 믿소. 감사하군요. 눈물이 나도록 감격해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 아란은 김충선을 비꼬았다. 그래도 김충선은 어떤 동요도 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하다부족과 건주여진은 전쟁을 해야만 하오. 이것은 단순한 유희(遊戱)가 아니라 수 만 명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비화(飛火)될 수 있소. 그러니 신중히 처신해 주기 바라오. 김충선이 선의를 지니고 진솔한 자세로 아란을 대하자 그녀는 내심 크게 놀랐다. 소문에 들었던 조선에서 온 사내는 귀신도 놀랄 정도로 철포를 잘 다루며 사람의 목숨 따위는 파리처럼 죽일 수 있는 전쟁터의 전사(戰士)라고 들었다. 누르하치는 그를 사위로 삼아서 여진의 몇 몇 남아있는 부족을 통일 시킨다고 하였다. 아란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부족이 통합되어 이제 하다부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일 하다부족이 건주여진으로 통합 된다면 그녀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오빠는 되돌아 올 곳이 없지 않겠는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혈육에 대한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보고프다. 너무나 많이! 장예지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질끈 눈을 감고 광해군을 외면하였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보드라운 느낌이 장예지의 입술을 살짝 스쳐갔다. 아주 찰나의 감촉이었으나 그것은 장예지의 뇌리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녀는 차마 눈을 떠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바로 거기, 눈앞에 광해군의 입술이 머물러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눈은 떠지지 않았으며 눈물 한 방울만이 장예지의 콧등을 타고 흘러 내렸다. * * * 아란은 포박되어 덩그러니 뇌옥에 홀로 감금되어 있었다. 형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김충선은 그녀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밧줄을 손수 풀었다. 아란은 약간 놀란 시선으로 노려볼 뿐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충선은 그녀의 마지막 매듭을 풀게 되면 그녀가 기습을 가해 오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탑! 아란은 자유로운 몸이 되는 순간에 김충선의 사타구니와 면상을 노리고 몸을 틀면서 발길질을 가해왔다. 그녀의 수법은 놀랍도록 빨랐으며 사악했다. 두 군데 모두 급소에 해당 했으며 충격을 당하는 순간 무서운 고통을 호소해야 하는 곳이었다. 악독하구려. 김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광해군은 장난 끼가 발동했다. 감사하다고? 그렇다면 진작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난 감사를 주고 싶지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요. 어인 말씀이십니까? 예지낭자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오. 덕분에 아바마마와의 사이가 급격히 좋아 졌으며 이제 곧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서 민심을 추스르고 병사와 무기, 식량 등의 활동을 재개할 것입니다. 장예지는 진심어린 말투로 축하 했다. 경하 드리옵니다. 이제 저하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옵니다. 인내하신 보람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낭자의 덕이라는 겁니다.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저하의 복이십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요. 나의 복이 맞소. 예지낭자를 내게 보내주신 것을 보니 이혼은 참으로 좋은 복을 타고 났어요. 장예지는 광해군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였다. 장난은 이제 그만 치시고 소녀를 부르신 용건이나 하명해 주십시오. 이순신을 이번 기회에 나의 장수로 만들고 싶소. 김충선 장군이 그리 해줘야 하오. 예지낭자가 도와줘야겠소. 아바마마와의 관계를 개선시켜 준 것처럼 말이요. 세자 저하? 장예지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쯧쯧, 그런 표정은 별로 예지낭자에게 어울리지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동궁전의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장예지는 담장의 그늘진 곳을 따라서 걷는 광해의 뒤를 새색시의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따랐다. 유성룡이 광해를 만나고 간 후 두 번째 부름이었다. 첫 번째 날에는 몸소 장예지가 머물고 있는 별채를 방문하여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서애대감이 내게 이순신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였소. 대가는 나로 하여금 이 동궁전을 벗어나서 남쪽 지방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요. 난 거절하지 않았소. 광해군의 긴장감을 장예지가 풀어주었다. 좋은 결정이십니다. 기다리시면 자연 기회가 오는 법입니다. 상감마마와의 독대도 성공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시고 유념하십시오. 저하는 보위를 이으실 조선의 왕세자이십니다. 임금의 경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가장 가까운 대상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시오. 임금 편에서 도모하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어쩌면 상감께서는 더 외로울지도 모릅니다. 세자의 손길을 기대하고 계실 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판단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임금은 자신보다도 겁이 많았고, 극심한 고독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순신을 얼마나 알고 있소? 세자의 질문이 느닷없이 쏟아져 나왔기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선조 이연의 용안이 일그러졌다. 추악한 권력이라고 했느냐? 올바로 사용하는 권력은 아름답습니다. 길을 잃은 권력은 혼란스럽습니다. 백성을 기망(欺罔)하는 권력은 추악한 것입니다. 백성을 속인다고 반드시 추악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아닙니다. 논어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란 말이 있습니다. 도에 벗어나지 않으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이 흡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속이는 것은 도에 어긋난 것이니 그것은 욕심이며 야욕입니다. 광해군의 날카로운 지적에 선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순신이 주목 받게 된다면 왕권이 동요하게 됨을 그대는 모른다. 광해군은 입술을 깨물며 아뢰었다. 그 때문에 파행의 권력을 일삼게 된다면 먼저 민심이 요동칠 것임은 왜 모르십니까? 민심은 임금의 권력으로 장악할 수 있다. 착각이옵니다. 착각이라고? 백성들을 제압할 수 없는 권력이라면 그것은 이미 권력이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란 놈은 권력으로도 쉽게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를 따르는 권력 또한 매일매일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순신과 승부를 벌려야 한다면 당당하게 하옵소서. 소자가 아바마마를 적극 지원하겠나이다. 세자가? 광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선조는 용상에서 일어나서 몸소 계단을 내려와 세자를 마주했다. 천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바로 지척 간에 만났다. 눈앞에는 아버지의 눈과 코, 입과 수염이 맞닿을 듯 있었다. 얼음덩이처럼 싸늘하게 가슴을 압박하던 아버지 선조의 두려움이 봄눈 녹아 흐르듯이 사라져 버렸다. 너에게만 고백하마! 아들 광해군에게만 고백한다는 고백이 광해군의 얼어붙은 심장을 다시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시옵소서. 조선임금 선조 이연이 광해군의 귀에 속삭였다. 애비는 이순신이 두렵다. 임금이, 자신의 권위를 모조리 내던지고 자식에게 호소했다. 임금과 신하로서가 아닌 개인 그대로의 선조 이연은 몹시 지치고 고통스러웠으며 외로웠다. 광해군의 눈에서 핏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익호장군도 그리 하셨던 것입니까? 선조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느냐? 소자의 유일한 장수였습니다. 그래. 과인이 예민하였다. 광해군의 분조 활동으로 선조의 명성을 능가하자 왕은 또 두려웠다. 왕권을 이양(移讓)하라는 백성들의 요구가 들려오자 선조는 그 조짐을 애초에 제거해버릴 요량으로 광해군의 남자 김덕령을 제
[한묵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임진전쟁이 발생하여 피난도중에 황급히 세자에 책봉되어 분조(分朝=임시로 왕권을 나눔)의 책임자로 활략하였으며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나이는 스물 셋이었지만 정치적 경험과 식견은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세자 광해군 역시 현재는 선조에 의해서 상당한 견제를 받으며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세자께옵서 수군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신은 일본 재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세자 저하를 동궁 전에서 풀어드려 경상과 전라지방에서 군량과 병기의 수집 등 활동을 하시도록 윤허(允許)를 받겠나이다. 거래였다. 그래요? 광해군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기회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동궁전에서의 갑갑함과 조급증은 거의 정신병자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일 그녀 장예지가 아니었다면 진작 포기 했을지도 몰랐다. 우연히 청계천 수표교에서 그녀를 만나 데리고 왔었고, 장예지는 급격히 우울해 하고 사나워지는 광해군에게 누이처럼 부드럽게 다독이며 속삭여 주었다. - 세자 저하, 마음을 비우소서. 비어있는 그릇에는 언제든지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나이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옵니
[한국문화신문=유광남 기자]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질책이 그 말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서애 유성룡은 혀로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세자 저하만이 해결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수군의 폐지는 조선의 전 군권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불가합니다. 대감 정도라면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신이 어찌 세자저하의 도움을 받고자 왔겠습니까. 전하의 심중에는 수군의 통제사 이순신과 신의 관계를 미심쩍어 하십니다. 광해군은 의표를 찔렀다. 영상이 수군폐지를 강력히 반대한다면 상감마마의 그 의심이 눈덩이처럼 자꾸 불어날 것이지요. 그 역할을 내게 맡으라는 압력을 넣으시기 위해 오셨구려. 신을 도와주소서. 내게 그럴 힘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물론이옵니다. 광해군은 갑자기 웃어댔다. 그 웃음은 어쩐지 처량하기도 했고, 다시 들으면 화를 가장한 웃음인 것 같기도 하였다. 분간이 모호한 웃음이었다. 영상은 언제나 내게 갈등을 안겨주는 분입니다. 서애 유성룡은 광해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해군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서애를 찾아와 세자의 길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한 번도 시원한 대답을 해준 적이 없었다.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정도령은 고함을 내질렀다. 선천적인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 되었던 정도령의 분노는 이상한 위엄으로 중인들을 압도 하였다. 이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은 신의 불찰입니다. 조선 수군의 명예를 추락시킨 장본인으로 신을 처벌해 주십시오. 어전에서 목을 늘어뜨리고 죽기를 자청하겠나이다. 원균 장군이 권율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한 원균을 대하자 도원수 권율은 가슴이 미어졌다. 출정하기 싫어하던 원균에게 곤장을 쳐서 바다로 내 몬 것이 자신이었던 까닭이었다. 정도령이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 원 장군의 탓이 아닙니다. 임금의 목표는 언제나 정해져 있었습니다. 수군폐지의 핵심에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 있습니다. 갑자기 적막한 고요함이 그들에게 한꺼번에 휘몰아쳐 들었다. 정도령의 지적에 대해서 감히 누구도 반박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임금 선조는 언제나 백성들에게 신망 받는 이순신에 대해서 위기감을 지니고 있었다. 임금은 병적으로 이순신을 두려워했다. 수군이 폐지되는 것은 결사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곽재우가 이를 악물면서 소리쳤다. 이순신이 의금부에 감금되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수군을 폐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도원수 권율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정유년의 일본 재침략이 시작되고 있는 이러한 시기에 일본과 조선 사이의 바다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식 이하였다. 노여움이 노장군의 목에 선명한 핏줄을 만들었다. 이것이 과연 주상의 뜻인가? 이순신 역시 안색이 파리하게 변하였다. 이런 어이없는 결정이 조정에서 논의 되었단 말입니까? 원균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죄인처럼 몸을 도사렸다. 권율이 가지고 온 소식은 조선의 수군장수들을 모조리 맥 빠지게 만들어 버렸다. 수군이 폐지된다면 우리의 목표가 어찌 되는 것이요? 곽재우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느 누구도 그 물음에 쉽게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수군이 폐지된다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도령은 몸가짐에 흐 뜨러짐이 없었다. 이울이 분노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조정에서는 이미 조선 수군에 대하여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판정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판옥선 몇 척으로 장대한 남해바다를 수호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겠지요. 무모한 행위를 그만 포기하고 현실적으로 육군으로 변경하여 조선을 위해 최선의 전쟁